음탕한 집안을 변방으로 보내라

치정이 뒤얽힌 응사(應師) 가족 추방

by 조병인

한 집안에서 고모와 조카, 형부와 처제가 각기 정을 통했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졌다. 임금을 호위하는 별시위 이석철의 아내이자 이름난 매 조련사(응사·應師)인 유은지의 큰딸 소앙이 친조카인 중인과 정을 통했다는 추문이 입에서 입을 통해 대궐까지 전해졌다.


임금이 듣고 나더니, 풍속을 심하게 해쳐서 죽여도 죄가 남을 것이라며 의금부에 철저한 조사를 지시하고, 좌승지 정갑손으로 하여금 의금부 제조들과 더불어 소앙과 중인을 신문하게 하였다. 중인이 전에도 아비의 기생첩과 간통한 적이 있음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좌승지를 특별히 보낸 것이다(세종 18년 3월 13일, 16일).


며칠 뒤에 의금부에서, 중인이 고모인 소앙과 정을 통한 것은 강상(綱常)을 심하게 위반한 것이라며, 임금에게 대간과 형조에 합동신문을 지시해 주기를 청하니, 그대로 윤허가 내렸다(세종 18년 3월 20일).


20일쯤 뒤에 사헌 지평 홍심이 임금에게 은지의 사위인 석철이 그의 처제인 종비와 간통한 의혹을 보고하며 수사를 허락해주기를 청하니, 그대로 윤허가 내렸다(세종 18년 4월 14일).


하루 뒤에 사헌부가 유은지 일가의 성추문에 대한 수사결과를 아뢰며, 은지는 물론 그의 아내와 자손들까지 모두 먼 변방으로 추방하여 죽을 때까지 벼슬을 못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은지의 가족을 전에 은지의 노모가 살았던 황해도 서흥에 두라고 하였다(세종 18년 4월 15일).


가장인 은지는 음탕하고 음주와 가무를 좋아해 날마다 제 욕심을 날마다 마음껏 채웠다. 그의 여동생도 몰래 승려와 정을 통하다 낌새를 눈치챈 노비 세 명을 죽인 혐의로 참형을 당했다. 그래서 사헌부의 대관들은 그 집안사람들의 음탕한 행동을 집안의 내력으로 여겼다.


며칠 뒤에 사헌부가, 형부와 처제 사이면서 간통을 저지른 석철과 종비에 대한 처벌이 너무 가볍다고 여기고,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서 두 사람의 처벌 수위를 높이기를 청했다. 임금이 도승지 신인손을 불러서, 태조와 태종 때 소문에 근거한 성추문 탄핵을 금지한 이후로 발생한 희대의 치정 사건들을 차례로 거론하더니, 석철과 종비의 처벌에 관한 문제를 의정부와 의논하여 결과를 아뢰게 하였다.


인손이 즉시 의정부에 가서 임금의 말을 그대로 전하니, 영의정 황희ㆍ좌의정 최윤덕ㆍ우의정 노한ㆍ참찬 신개 등이 한 목소리로, 법대로 장형을 집행한 뒤에 먼 변방의 병영으로 보내기를 청했다. 임금이 듣고서, 석철은 장 80대를 때린 뒤에 평안도 여연의 병영에 보내고, 종비는 장 80대를 때린 뒤에 부모와 함께 황해도 서흥으로 보내게 하였다.


사헌부 지평 홍심이 나서서, 석철을 여연의 병영에 영구히 두어서 평생 벼슬을 못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세종 18년 4월 20일). 사헌부 장령 남간이, 서흥은 서울에서 너무 가깝다고 여기고, 은지의 가족을 더 먼 곳으로 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인도적 차원의 임시조치라고 대답하였다.


그들의 죄를 생각하면 마땅히 먼 곳으로 보내야 마땅할 것이나, 식구가 여럿이라 원래 살던 곳이 아니면 생존하기가 힘들 것 같아서 우선 고향으로 보내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게 한 것이다(세종 18년 4월 22일).


중인과 소앙의 간통 의혹에 대한 의금부의 신문이 끝나서 둘 다 참형에 처해질 위기가 닥치자, 중인이 옥중에서 쪽지에다, "네 차례나 매질을 당하고 세 차례나 압슬을 당하여 고통을 견디다 못해 허위로 자백한 것이니, 신문고를 쳐서 사실대로 밝혀라."라고 적어서 자기 집 종에게 보냈다.


그 쪽지를 받은 종이 곧바로 신문고를 울리고 쪽지를 올리니, 임금이 부관과 위관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고, 우의정 노한·형조 판서 하연·중추원 동지사 정연·이조 참판 봉여·병조 판서 최사강·예조 판서 허성·우부승지 김돈 등을 의금부에 보내 중인과 소앙을 다시 신문하게 하였다(세종 18년 5월 11일).


의금부가 중인과 소앙을 재차 조사하더니, 이석철이 자기 집의 여종인 쌀이의 거짓말에 속아 자기 부인과 처조카인 중인을 간통죄로 고소한 사실을 밝혀냈다. 임금이 영의정 황희·좌의정 최윤덕·우의정 노한 등을 불러서 그때까지 중국과 조선에서 있었던 대표적 오결 사례 몇 가지를 들려주더니, 중인과 소앙을 처리할 방도를 물었다.


비록 재조사를 통해 석철의 무고가 밝혀졌어도, 중인이 일찍이 제 아비의 첩과 정을 통했고, 소앙의 동생인 종비는 형부인 석철과 간통하였으니, 언니인 소앙도 조카인 중인과 정을 통했을 수 있다며, 두 사람의 혐의를 의죄(죄과가 매우 의심스러운 죄)로 간주해 둘 다 먼 지방으로 추방하는 방안을 토론에 부쳤다.


세 정승이 입을 모아 소앙과 중인의 간통 의혹은 더 이상 논하지 말기를 청했다. 임금이 그대로 따라서, 소앙과 중인을 부친과 조부가 거주하는 집으로 돌려보내고, 석철만 3천 리 밖에서 3년 동안 노역을 치르게 하였다. 거짓말을 꾸며서 석철이 자기 아내를 간통죄로 고소하게 만든 여종 쌀이는 참형에 처하게 하였다(세종 18년 6월 1일).


15개월쯤 세월이 흐른 뒤에 임금이 성은을 베풀어 전년 4월에 황해도 서흥으로 보냈던 은지와 그 가족을 베풀어 모두 서울로 돌아오게 하였다(세종 19년 9월 7일). 사헌부가 두 차례나 상소를 올려서 명을 거두기를 청해도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세종 19년 9월 9일, 12일). 은지가 매 조련과 매사냥에 능하여 부왕이 생전에 그를 총애했기 때문이었다면, 선사후공(先私後公)과 오비이락(烏飛梨落)의 중간쯤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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