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자한 불효자를 병영에 보내라

연적(戀敵)을 무차별 폭행한 무관 중벌

by 조병인

성균관 생원이던 이영서가 성균관 노비의 아내와 정을 통하다 붙잡혀서 두발을 잘렸다. 영서의 친구인 병조 정랑(정 5품) 이현로가 영서의 집을 찾아가 영서를 위로하더니, 영서의 머리털을 가리키며, ‘꼭 부추 나물 같네.’라고 놀렸다. 잘린 뒤에 다시 싹이 자란 부추의 모습에 빗대서 농담을 한 것이라 영서가 부끄러워하며 낯을 붉혔다.


뒤에 영서가 이조 정랑(정 5품)이 되었는데, 퇴청 후에 술을 마시고 귀가하다가 무관인 민서의 애첩인 기생 소양비의 처소에 들어갔다. 민서가 알고서 동생인 민발과 조카 효원과 더불어 몽둥이를 지니고 현장을 덮쳐서 영서를 밧줄로 묶고 두발을 잘랐다(세종 30년 6월 5일).


민서가 영서에게 칼을 겨누더니, "내가 네 목을 치지 않는 것은 내가 무과에 응시했을 때 네가 시험관으로 참여하여 나를 합격시켜주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거의 죽기 직전까지 영서를 폭행하고는, 영서의 옷을 빼앗고 양쪽 손을 뒤로 묶어서 소양비와 함께 형조로 데려갔다.


형조에서 소양비만 가두고 영서는 석방하니, 영서가 들것에 실려서 집으로 옮겨졌다. 영서가 민서와 화해할 생각으로 셋째 왕자인 안평대군에게 청을 넣어 민서를 자기 집으로 오게 만들었다. 그런데 진심으로 사과를 표해도 민서가 받아주지 아니하여 어쩔 수 없이 다음날 종을 시켜서 형조에 고소장을 제출하였다.


소문이 대궐까지 전해져 임금이 승지들에게 들은 바를 물으니, 좌승지 조서안 등이 영서를 두둔하고 민서를 비난하였다. 영서는 퇴청하여 술에 취해 귀가하다 소양비의 처소를 갔다가 민서에게 들킨 것이지, 소양비와 정을 통하다 민서에게 들킨 것은 아니라고 아뢰니, 임금이 민서의 과도한 대응을 비난하였다.


설령 영서가 민서의 기생첩과 정을 통했더라도 복수로 두발을 잘랐으면 그만둘 일이지, 뒤로 묶어서 노상에서 구타하고 모욕을 준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았는가(세종 30년 6월 5일).


조서안을 비롯한 승지들이 두 가지 이유를 내세워 민서를 엄벌에 처하기를 청했다. 첫째는, 영서가 소양비와 정을 통하다 민서에게 현장을 들킨 것이 아닌데도 민서가 영서를 함부로 때리고 상해를 입혔다고 하였다. 둘째는, 조정의 관원이 죄를 지으면 먼저 사헌부가 진상을 밝혀서 임금에게 아뢰고 윤허를 받아서 관직을 빼앗은 뒤에 옥에 가두도록 되어 있는데, 민서는 이조 정랑인 영서를 제 멋대로 때리고 가뒀다고 하였다.


임금이 듣고 나더니, 민서가 모후인 원경 왕후(민씨)의 가까운 혈족이 아님을 확인하고, 형조에 엄정한 사법처리를 지시하였다. 민서 형제와 그들의 조카인 효원의 직첩을 거두고 세 사람을 구속하여 수사하되, 혹시 영서가 죽으면 모두 사죄(死罪)로 다스리게 하였다.


그런데 민서가 형조에 잡혀가서, 영서가 소양비와 간통하는 현장을 덮쳐서 붙았다고 우겼던 모양이다. 임금이 의금부에 명을 내려, 민서가 영서를 간통 현장에서 잡았다고 거짓말을 한 까닭과 함께, 사람을 충주에 내려보내 민서가 제 어미를 때렸다는 의혹을 밝히게 하였다.


민서는 제 어미를 때린 적이 없었다. 민서가 충주에 머물 때 어떤 이유로 매화라는 여종을 구타하여 민서의 어미가 뜯어말리다 민서가 손을 뿌리쳐서 방바닥에 넘어졌는데, 사람들이 민서의 행실을 미워해 그가 제 어미를 때렸다고 소문을 퍼뜨렸다(세종 30년 6월 8일).


민서의 어미가 아침저녁으로 슬프게 울부짖으며 구명 운동을 벌였지만, 결국은 민서가 존속폭행죄에 불효죄까지 덮어쓰고 장 1백대를 맞은 뒤에 평안도 여연의 병영에 영구히 배속되었다. 민서의 동생인 민발과 조카 민효원이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런데 두 사람이 훗날 조카로부터 왕위를 빼앗은(1453년 10월 10일) 수양대군을 지지했기 때문인지, 대군이 임금(세조)이 되어 여러 사람을 사면하면서, 민서의 유배를 풀어서 원종공신 명부에 올려주었다(단종 2년 2월 8일, 세조 1년 12월 27일). 민서의 동생 민발과 조카 민효원도 새 임금의 후광으로 승승장구를 거듭하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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