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녀를 먼 객지에서 죽게 하라

부녀자의 도리를 저버린 여인 추방

by 조병인

조화라는 남자의 아내였던 김씨는 음란기가 심했던 모양이다. 남편이 자기 친정 어미(장모)와 정을 통하니 자기도 허해라는 사내와 정을 통했다. 하루는 조화가 첩과 외박을 하는 틈을 타서 허해를 집에 들여 재워 보냈다가 남편과 대판 싸웠다. 허해가 옷을 벗어 조화의 옷걸이에 걸어놓았다가 돌아갈 때 실수로 조화의 옷을 입고 갔다가 들통이 났기 때문이었다.


이후로 김씨는 대놓고 바람을 피웠다. 심지어는 자기 집의 종과도 정을 통하더니, 조화가 세상을 뜨자 왕실의 종친이자 공신인 이지와 재혼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이지가 아내 김씨와 함께 죽은 부모의 제사를 드리러 북한산의 향림사를 갔다가 그곳에서 갑자기 죽었다. 세종실록의 <이지 졸기>에는 이지가 부인에게 살해된 것처럼 적혀있다(세종 9년 1월 3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지 부부가 절에 들어와 며칠이 지나서, 김씨가 중과 간통하는 현장에 남편인 이지가 들이닥쳐 김씨를 꾸짖고 때리자, 김씨가 이지의 불알을 잡아당겨 이지가 죽었다.'라고 하는데, 김씨가 집에서 데려간 종들의 입을 틀어막아, 외인들은 이지의 사인을 알지 못했다.


이지의 전처 아들이자 충청도 절제사이던 상흥이 아비의 부고를 듣고 급히 달려왔는데, 한 남자 종이 김씨에게, 상흥이 장차 아비의 죽음을 형조에 알릴 것이라고 하자, 김씨가 크게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하더니, 이내 발작을 일으켜 천치처럼 행동하였다.


마을사람들이 상흥에게 그의 계모인 김씨가 아비를 죽인 사실을 알려주었다. 관청에 신고하여 검시(檢屍)가 이뤄지게 하라고 권했다. 상흥이 못 들은 척하고 김씨를 관청에 고발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지를 죽인 김씨와 그녀를 관청에 고발하지 않은 상흥을 싸잡아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되지 못할 사람들’이라고 혹평하였다.


그렇다면 상흥은 왜 아비를 죽인 김씨를 관에 고발하지 않았을까? 그것도 도성 방비를 위해 상경하는 병력을 파악하고 지휘하는 장수(절제사)였던 상흥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하는데도 아비를 죽인 계모를 그대로 놓아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실록에 아무런 정보가 없어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아비가 음녀와 재혼을 해서 자식들이 아비를 버렸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쳐볼 수 있을 뿐이다. 이지의 전처는 아들 다섯을 낳았는데 아비의 비보를 듣고 현장에 온 아들은 장남인 상흥 뿐이다. 딸들도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지가 죽고 7개월쯤 지나서 사헌부가 주상에게, 이지의 부인이 이지가 살았을 때 받은 관작(官爵)을 계속 사용하는 김씨를 법에 따라 제재하기를 청했다. 주상은 사헌부의 청을 윤허하면서, 김씨가 과거에 귀양을 갔던 적이 있는지 여부를 물었다.


좌승지 김자가 '두 번이나 있었다.'고 아뢰니 주상이 혀를 차면서, "그리고서도 관명을 사칭하였으니, 그런 이상한 여자는 먼 객지에서 죽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미움을 표했다. 승지들이 입을 모아, "김씨의 행실은 심히 미워할 만하옵니다."라고 맞장구를 쳤다(세종 9년 7월 29일).


열흘쯤 뒤에 사헌부가 상소를 올려서, 관명을 사칭한 김씨를 서울 밖으로 내보내 부인으로서의 도리를 충실히 지키게 하기를 청했다. 주상은 김씨의 아들인 전 부사직(종 5품 무관) 조복초를 불러서, 어미를 서울의 경계로부터 10리 이상 떨어진 곳으로 옮기고 서울 왕래를 막으라고 하였다. 복초는 어미인 김씨를 김포의 통진현으로 옮겼다(세종 9년 8월 8일).


지신사 정흠지가 주상에게 김씨는 통진에 있는 조화의 별장으로 간 것이라며 김씨를 다른 곳으로 옮기기를 청했다. 며칠 뒤에 사간원의 우사간 대부 김효정·정언 김장·사헌 집의 김종서 등이 문산현의 현감이던 김씨의 차남 조심을 파직하기를 청했다. 주상은 그대로 윤허하면서 김씨가 관명을 사칭한 죄를 따지지 말게 하였다.


김씨의 처신이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과거에 공신의 아내가 죄를 범하고 남편의 공으로 면죄된 사례가 있었을 뿐더러, 이지의 아내가 되어 종실에 몸을 들인 사람을 처벌할 수는 없다(세종 9년 8월 16일).


김씨가 조화의 별장에서 음란하게 행동하고 다시 또 시집을 갔다는 보고가 접수되었다. 사헌 집의 김종서가 김씨를 경기도 밖으로 내쫓기를 청했다. 주상은 김씨를 강화도로 옮기게 하였다. 한 달 남짓 지나서 다시 양주 도호부 심악현의 별장으로 옮기게 하였다(세종 9년 8월 20일, 9월 27일).


6개월 남짓 지나서 김씨의 유배를 풀어주게 하였다(세종 10년 윤 4월 1일). 대사헌 최부 등이 명을 철회하기를 청했으나 주상은 따르지 않았다(세종 10년 윤 4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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