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괴담의 출처를 숨긴 대사헌 제재
대사헌 이계린이 황해도 관찰사로 발령이 나자 임금에게 황해도의 기근 상황을 보고하였다. 지나간 봄에 흉년으로 먹을 양식이 모자라서 끼니를 거른 집이 많았던 사실을 아뢰더니, '허기를 참지 못해 인육을 먹은 자가 있었다.'라고 덧붙였다.
말이 너무도 해괴하여 임금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더니, 계전이 물러간 뒤에 의정부와 상의해 계린에게 말의 출처를 물어보기로 하였다. 마침 계린의 아우 계전이 승정원의 동부승지여서 계전을 시켜서 계린에게 식인 이야기를 들은 곳을 물으니, '사헌 집의 정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다음 날 계린이 동생 계전을 시켜서, 자기에게 식인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알려왔다. 정사가 자기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고, 사헌부의 장령과 지평들 중에도 자기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사람이 없다고 전해와, 임금이 이계린과 함께 사헌 집의 정사•장령 김길통과 원자직•지평 김승규와 문여량 등을 승정원으로 불렀다.
승지들을 통해 한 사람씩 돌아가며 황해도의 식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지를 물으니, 들었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오직 이계린 한 사람만, 황송하고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도, 누군가로부터 분명히 들었다고 대답하였다(세종 29년 11월 16일).
임금이 계린을 형조에 내리고 국문을 지시하니, 계린이 계전을 통해, 자신의 외삼촌인 이백강 집의 집사인 김한이 제 외사촌의 아들인 조수명으로부터 들은 말을 자기에게 전한 것이라고 아뢰었다. 백강은 태종의 맏딸인 정순 공주의 남편이자 임금의 매형인지라, 임금이 승정원을 시켜서 김한과 조수명에게 물어보니, 말이 각기 달랐다(세종 29년 11월 17일).
두 사람을 승정원으로 불러서 승지들이 연달아 압박을 가하자 수명이 자신이 김한에게 식인 이야기를 하였다고 실토하였다. 임금이 보고를 접하더니 승문원 지사 강맹경으로 하여금 해주에 가서 사실 여부를 알아오게 하였다.
그런데 맹경이 해주로 출발하기 전에, 의정부에서 사람 고기를 먹은 자가 또 있다고 보고하였다. 김의정이라는 하급 관리가 그해 봄에 황해도의 고향에 갔다가 산에서 인육을 구워 먹은 흔적을 확인하고 장본인을 직접 만나서 대화한 내용을 글로 자세히 적어서 올린 것이다(세종 29년 11월 18일).
임금이 깜짝 놀라서 군자감 판사 이인손을 김의정과 함께 서흥에 내려 보내 진위를 알아보니, 조수명이 김한에게 들려준 말도, 김의정이 의정부에 보고한 목격담도 모두 사실무근의 유언비어로 밝혀져, 세 사람 모두 사법절차에 넘겨졌다(세종 29년 11월 26일).
김의정은 공모자인 안의생과 함께 전 가족이 먼 변방으로 보내지고(세종 29년 12월 24일), 김한과 조수명은 계전이 임금에게 식인 이야기의 허무맹랑함을 아뢰고 두 사람에 대한 선처를 청해준 덕분에 의금부의 구형보다 세 등급 낮은 형을 받았다(세종 30년 1월 16일).
문제는 이계린이었다. 임금이 계린에게 제수한 황해도 관찰사 직책을 거두고 후임으로 신자근을 임명하자, 계전이 임금에게 계린의 죄를 용서해주기를 청했다. 들은 대로 아뢴 사람을 처벌하면 언로가 막힐 수 있다고 아뢰니, 임금이 계전의 용기를 칭찬하면서, 대신들과 상의해보겠다고 약속하였다(세종 30년 1월 16일)
그런데 나흘 뒤에 의정부가 임금에게 계린을 처벌하기를 청했다. 계린이 처음부터 바른대로 말하지 않은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인데, 임금이 언로가 막힐 가능성을 내세워 따르지 않았다(세종 30년 1월 20일). 의정부가 물러서지 않고, 임금과 신하 사이에 언로를 유지하는 것보다 부정직을 퇴출하는 것이 더 먼저라고 맞서자, 임금이 수긍하고 계린의 직첩(관리 임명장)을 거두게 하였다.
그러자 집현전 학사들이 언로가 막힐 우려를 내세워 목소리를 냈다. 설령 계린의 직첩을 거두는 것이 정당하다 하여도 사람들은 처벌이 따를 것이 두려워 장차 재변이 생겨도 침묵을 지킬 것이라며, 당초의 판단대로 형을 용서해주기를 청한 것인데, 임금이 의정부의 논리로 학사들을 설득하였다(세종 30년 1월 22일).
10개월쯤 지나서 임금이 계린의 직첩을 돌려주었다(세종 30년 11월 28일). 다시 3개월쯤 뒤에 계린을 비상근 직책인 별시위 절제사로 임명하니, 사헌 집의 박중손이 부적절한 인사라며 철회를 청했다. 거짓말로 임금을 속인 자를 다시 등용한 전례를 남기지 말기를 청한 것인데, 임금이 따르지 않고 중손을 타일렀다.
계린의 죄가 어찌 영구히 서용하지 못할 정도에 이르겠느냐. 이미 직첩을 돌려줘서 어쩔 수가 없으니 다시 거론하지 마라(세종 31년 3월 1일, 2일).
두 달쯤 뒤에 계린이 유후사(개성부)의 유수로 임명되니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세종 31년 5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