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에 의해 살인범이 된 아낙 구원
황해도 곡산에 사는 약노라는 양민 여인이 고향에서 체포되었다. 혐의는 어떤 주문을 외워서 이웃사람을 죽게 했다는 것이었고, 곡산과 유후사(개성부)를 거쳐 서울의 형조로 압송돼 왔다. 그때까지 약노는 무려 10년 동안을 옥에 갇혀 지내면서 혹독한 고문을 무수히 당하여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세종 15년 7월 19일).
형조 관원들이 약노의 살인을 검증하기 위해 닭과 개를 가져다가 그녀에게 주문을 외우게 하였더니 닭도 개도 죽기는커녕 멀쩡하게 돌아다녔다. 그도 그럴 것이, 주문을 외워서 이웃사람을 죽게 하였다는 약노의 혐의는 그녀가 혹독한 매질을 견디다 못해 범행 도구를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살해 수법을 스스로 착안해 허위로 꾸며댄 것이었다.
하지만 약노가, '여러 해 갇혀 있어서 주문을 받는 귀신이 달아났다.'고 둘러대자, 형조가 그 말을 진실로 믿고 약노에게 살인죄를 적용해 임금에게 사형을 청했다. 임금이 수사기록을 읽어보더니, 주문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그런 술법을 믿으면 억울하게 죽는 백성이 많을 것이라며, 좌부승지 정분에게, "약노를 의금부로 넘기게 할 터이니, 의금부로 가서 제조와 함께 약노를 신문하라."라고 지시하였다.
정분이 의금부로 가서 약노를 신문하니, 약노가 조금도 숨기는 기색 없이 주문 외는 술법을 일일이 설명하며 속히 죽여주기를 청했다. 정분이 약노에게 말을 바꾼 이유를 물었다. 앞서 곡산·유후사·형조에서 조사를 받을 때는 범행을 부인하다가, 의금부에 와서 갑자기 자복하는 까닭을 물으니, "처음에는 죽음을 면해보려고 애써 변명하였으나 이제는 덮을 수가 없게 되었다."라고 힘없이 대답하였다.
정분이 두세 차례 반복해서 다져 물어도 약노의 대답이 바뀌지 않고 말씨 또한 애처롭고 간절하였다. 10년이나 갇혀 있어 옷과 음식을 넣어줄 사람이 없는지라, 임금이 예빈시와 제용감에 지시해 약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게 하고, 정분을 다시 의금부에 보내 약노를 한 번 더 신문하게 하였다. 약노의 대답이 조금도 바뀌지 않아서, 정분이 임금의 뜻을 알리고, 자초지종을 바른대로 말하게 하였다.
임금께서 네가 여러 해 동안 갇혀서 매를 맞으며 고통을 겪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정확한 실상을 알고 싶어 하시니 모든 일을 숨김없이 대답하여라. 네가 정말로 주문을 외워서 사람을 죽였다면 사형을 받아도 할 말이 없겠지만, 만약 매를 견딜 수 없어서 허위로 자백한 것이면 가엾고 딱한 일이 아니겠느냐.
갑자기 약노가 얼굴을 하늘로 향하고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리며 오랫동안 참아온 울분을 쏟아냈다.
저는 주문을 외울 줄도 모릅니다. 우연히 제가 그 사람에게 밥을 먹여주던 도중에 그 사람이 이유 없이 죽은 것인데, 관원들이 제가 살인을 했다고 의심하고 가혹한 형벌을 앞세워 반드시 자복을 받으려고 하여서, 제가 고문과 매질에 굴복해 거짓으로 답변을 하였습니다. 이제 와서 사실대로 털어놓아도 매질을 피하지 못할 것이니 제가 더 이상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다시 또 매질을 당하느니 차라리 이대로 죽기를 원하니 어서 빨리 죽여주시기를 간청하옵니다. 어차피 한 번 죽기는 마찬가지 아닙니까.
말을 마친 약노는 복받치는 설움을 참을 수가 없었던지 오랫동안 통곡을 멈추지 못했다. 임금이 정분의 보고를 듣고서 약노의 처지를 측은하게 여기니, 지신사 안숭선과 승지들이 임금에게 약노의 석방을 청했다.
약노가 곡산과 유후사와 형조를 거치면서 11차례나 고문을 당했고 의금부에 와서도 15차례나 고문을 당했으니, 아무리 진실을 알기 위한 것이었어도 애매한 일에 그처럼 가혹한 형벌을 가한 것은 지나쳤다고 생각되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죄가 의심되면 가급적 형벌을 가볍게 써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약노에 대한 추국을 멈추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숭선이 말을 마치니 임금이 약노를 석방하여 곡산의 제 집으로 보내주게 하고, 집까지 가는 도중에 먹을 죽과 밥을 넉넉히 주게 하였다. 그날 이후로 지방의 수령으로 임명된 관리들이 부임 신고를 하러 대궐에 들어오면, '무고한 자에게 억지로 죄를 씌우는 일이 없게 하라.'는 당부를 빠뜨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와 범죄자를 다루는 형사사법 현장에는 무리한 고문을 비롯한 각종 남형 적폐가 독버섯처럼 자생하였으니, 주된 이유는 형사사법의 태생적 취약구조 때문이었다. 명백한 증거가 있어도 용의자가 범행을 끝까지 부인하면 사법당국이 유죄를 인정하고 형벌을 선고할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