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부석이 되기 직전의 예비국모 연쇄 퇴출
임금의 장남으로 태어나 여덟 살에 왕세자가 된 이향(훗날의 문종)은 외모가 수려하고 성품이 출중하였다.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으며,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대하는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공순하였다. 가무와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고, 안일을 즐기거나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성에 대한 무관심이 지나쳐 배우자인 세자빈과도 부부의 정을 나누지 않아서 세자궁에 괴이한 일이 연달았다. 처음에 돈녕부 판사(종 1품) 김구덕의 손녀를 세자빈(휘빈 김씨)으로 맞아들였는데(세종 9년 4월 9일), 2년이 넘도록 세자가 김씨에게 마음을 두지 앉아 김씨가 남자를 유혹하는 압승술을 쓰려다 발각되었다.
세자궁의 순덕이라는 시녀가 일찍이 김씨의 약주머니에 칼로 베어진 가죽신 껍질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몰래 꺼내서 감춰두었다가 임금에게 바쳤다. 임금이 다른 궁녀를 시켜서 자세히 알아보니, 김씨가 세자가 좋아하는 두 궁녀의 신을 베어다가 불에 태워 가루로 만들어서 몸에 지니고 있었다. 시녀 호초가 김씨에게, 그렇게 하면 무심한 세자가 마음을 돌릴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였다.
임금이 중궁과 같이 김씨를 불러다가 친히 사실 여부를 물으니 김씨가 숨김없이 대답하였다. 기회가 오면 술에 타서 세자로 하여금 마시게 하려고 세 차례나 가루를 준비하였다가, 기대가 번번이 어그러지자 호초를 다시 졸라서, ‘뱀들이 교접할 때 흘린 애액을 수건으로 닦아서 몸에 지니면 반드시 남자의 사랑을 받는다.’라는 비법(?)을 알아낸 것으로 밝혀졌다.
임금이 곧바로 종묘에 고하고 김씨를 폐한 뒤에 책인(冊印)을 회수하고 서인으로 삼아서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호초를 참형에 처하게 하였다(세종 11년 7월 20일). 3개월쯤 뒤에 소윤(정 4품) 봉여의 딸을 새 세자빈(순빈 봉씨)으로 맞아들였는데, 이번에도 세자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마침 왕세자도 후궁을 두게 하는 제도가 새로 생기자, 봉씨가 질투·시기·불안·초조·긴장 등의 감정이 쌓이고 앞날에 대한 걱정이 컸던 것 같다. 설상가상으로 세자의 사랑을 누리던 승휘 권씨가 임신까지 하기에 이르자 봉씨가, 아이가 태어나면 자신은 쫓겨날 것이라며 통곡하였다. 그 소리가 매우 커서 궁중에까지 들렸다.
임금이 중궁과 같이 봉씨를 불러서 위로하고 달래는 말로 타일러 봐도, 봉씨가 혼자서 술을 과하게 마시고 만취해 있을 때가 많았다. 세자가 종학에 들어가 있을 때는 시녀들이 쓰는 화장실에 들어가 벽의 틈을 통해 외간 남자들을 엿보았으며, 여종에게 항시 남자를 사모하는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그래도 임금 내외가 세자를 타일러서 세자가 봉씨를 조금 우대하는 기미를 보이더니, 얼마 후에 봉씨가 스스로 태기가 있다고 하였다. 중궁이 태아의 안전을 염려해 봉씨를 중궁전에 들여서 조용히 지내게 하였는데, 한 달 반쯤 지나서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봉씨가 시어머니인 중궁에게, 자기가 낙태를 하였는데 단단한 물건이 형체를 이루어 나와서 이불속에 그대로 있다고 하여 중궁이 시녀를 보내서 살펴보게 하였더니, 봉씨가 임신을 하지도 않고서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세자에게 궁중의 물건과 음식을 덜어서 친정집에 보내자고 하였다가 거절당하자 자기가 먹고 남은 음식들을 보냈다. 세자가 만류하자 환관들을 시켜서 세자 몰래 보내게 하였다. 또, 환관들의 무릎방석·주머니·자루 등을 손수 만들어주느라 세자의 생일에 바치는 물건들을 만들 시간이 없어서, 전에 바쳤던 것들을 새로 마련한 것처럼 속이고 바쳤다.
친정 아버지가 죽었을 때는 사사로이 당고모부에게 사람을 보내 노제를 부탁하더니, 후에 당고모부가 제사를 지낸 족친의 명단을 작성하여 세자궁을 찾아오자, 세자에게 알리지도 않고 무릎 방석을 주어 사례하였다.
결정적으로 봉씨의 동성애가 발각되었다. 봉씨가 소쌍이라는 궁녀를 사랑하여 항상 자기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니, 다른 궁녀들이, “빈께서 소쌍과 항상 잠자리와 거처를 같이 하신다.”라고 수군거렸다. 임금이 알고서 소쌍을 불러서 사실 여부를 물으니, 봉씨와 동침한 이야기를 자세히 고했다.
지난해 동짓날 빈께서 저에게 같이 자기를 청하셨습니다. 제가 거절하니 빈께서 큰소리로 저를 윽박질러, 할 수 없이 옷을 반쯤 벗고 이불속으로 들어갔더니, 빈께서 나머지 옷을 벗기고 저를 강제로 끌어다 바닥에 눕히시어 남녀가 교합하듯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
임금이 곧바로 종묘에 고하고 봉씨를 폐한 뒤에, 책인을 회수하고 서인으로 삼아서 친정으로 돌려보냈다(세종 18년 10월 26일). 임금은 마흔 살, 왕비는 마흔두 살, 세자는 스물세 살인데 후사가 없어 걱정이 컸던지, 두 달쯤 뒤에 임금이 심사숙고 끝에 호조 참의(정 3품) 권전의 딸을 세 번째 세자빈(현덕빈)으로 맞아들였다(세종 18년 12월 28일).
권씨는 마음이 후덕하고 예의범절이 반듯하여 사람들의 호감과 사랑이 매우 두터웠다. 세자빈에 책봉되고 약 4년쯤 지나서 임금 내외가 학수고대하던 원손(元孫)을 낳으니 임금이 뛸 듯이 기뻐하며 즉시 사면령을 내렸다. 그런데 그만 신하들의 축하를 받을 겨를도 없이 하루 뒤에 권씨(25세)가 허망하게 숨을 거뒀다.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잃은 아이는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고, 그 임금은 더 이상 세자빈을 들이지 않았다. 조부 때의 비극이 재현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는 순탄하게 원자와 세자를 거쳐서 왕위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운이 없었던지 왕 노릇을 시작하기도 전에 숙부인 수양대군의 야욕에 희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