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을 음해한 대관을 바꿔라

조서를 조작해 황희를 무함한 사헌부 응징

by 조병인

인수부 판관 조연이 경기도 양주 도호부 임진현의 동파역에 이르러 어떤 연유로 역의 관원을 때렸다. 그 지역의 주민인 박용이 아들 박유지와 더불어 거친 욕설과 함께 연의 머리털을 움켜쥐고 흔들며, "서울의 재상 중에 나와 친한 이가 많은데 오각대(烏角帶ㆍ검은 뿔 조각으로 장식한 띠)를 매는 파견관 주제에 어찌 나를 욕하느냐."라고 호통을 쳤다.


박용은 평소 토지를 많이 점유하고 좋은 말을 많이 길러서 서울의 권문세가에 뇌물로 바치면서 주민과 관원들을 괴롭히는 원악향리로 악명이 높았다.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언행이 간사한 데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아무에게나 온갖 포악한 짓을 멋대로 저질러 조정의 신하 중에 그에게 욕을 당한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조연이 괘씸하게 여기고 박용을 붙잡아 임진현에 넘겼다. 현감 이근완이, 박용은 자기도 두려워하는 자라고 말하더니, 박용에게, "서울 세도가의 서찰을 받아오면 죄를 면해주겠다."라고 선심을 썼다.


박용이 자기 부인을 불러서 서울의 세도가 집에 가서 서찰을 받아오라고 시키더니, 이근완과 더불어 농사의 작황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집안사람과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조연이 한심하게 여기고 사헌부에 글을 올려 이근완에 대한 문초를 청했다.


박용이 임진현의 주민이라 경기감사가 박용을 원평에 가두고 추국하니, 좌의정 황희가 서찰을 보내 박용의 죄를 낮춰주기를 청했다. 사헌부가 알고서 박용의 아들 박천기를 붙잡아다 박용이 황희를 비롯한 고관 세 명에게 뇌물을 바쳤다는 자복을 받아서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박용의 아들인 천기가 실토하기를, 제 아비 박용이 좌의정 황희에게 말 한 필과 연회를 바치고 서찰을 받았으며, 대제학 오승과 도총제 권희달에게도 각각 말 한 필씩을 뇌물로 주고, 도총제 이순몽에게는 소 한 마리를 주었다고 하였사옵니다(세종 10년 6월 14일).


사헌부가 황희의 죄를 엄히 다스리게 해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거부하였다. 천기의 말이 뜬소문이라 태조 때 제정된 풍문탄핵금지법에 위배되고, 황희가 박용으로부터 뇌물을 받았어도 이후에 사면령을 내려서 죄를 논할 수 없다고 하였다. 사헌부가 다시, 박용의 일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뿐더러, 황희가 말과 향응을 받고 서찰을 써준 시점이 사면보다 전인지 후인지 불분명하다고 아뢰니, 임금이 마지못해 승낙하였다.


황희가 듣고서 임금에게 나아가 눈물을 흘리며 수뢰 사실을 부인하며 자신을 박용과 대질시켜주기를 청했다. 임금이 듣고 나더니 사헌부로 하여금 먼저 박용의 아내 복덕을 잡아다 물어보게 하였다(세종 10년 6월 14일). 황희가 자기 아들을 승정원에 보내, 사헌부로부터 받은 질의서가 편파적이어서 사헌부에 출석해 조사를 받을 수 없다고 알려왔다.


그런 상황에서 사헌 장령 성염보가, 붙잡아온 복덕이 묻는 말에 바른대로 대답하지 않는다며 그녀를 옥에 가두고 조사하게 해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복덕을 의금부로 넘기게 하였다. 그 사이 박천기가 도망쳐 달아나 의금부가 붙잡아다 다시 옥에 가두니, 다음날 임금이 그의 아비 박용도 잡아다 가두게 하였다(세종 10년 6월 15일, 16일).


의금부가 천기를 신문하니, 사헌부의 닷새 전 보고가 사실무근의 조작으로 드러났다. 천기는 사헌부 관원들에게 '아버지가 황희에게 말과 연회를 바치고 서찰을 요구하였다.'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사헌부 관원들이 천기의 신문조서를 그렇게 꾸민 것이었다(세종 10년 6월 19일).


보고를 접한 임금은 대사헌 최부·집의 남지·장령 이견기와 성염조·지평 김경과 문승조, 그리고 인수부 판관 조연 등 일곱 명을 의금부에 가두게 하였다. 의금부 제조 권진ㆍ안순ㆍ신상 등이, 사헌 집의 남지가 조사에 협력하지 않고 말투도 뻣뻣해서 조사하기가 어렵다며 자신들을 조사팀에서 빼주기를 청하니, "남지가 추국에 순순히 응하지 않으면 한 차례 더 고문하라."라고 명을 내렸다(세종 10년 6월 22일).


의금부에서 조사를 마치고 임금에게 대사헌 최부를 비롯한 대관 전원과 조연 등의 죄를 자세히 아뢰니, 임금이 복덕과 천기는 석방하고 박용은 형조로 넘기게 하였다. 다음날 형조에서 임진현 동파역에서 조연을 능욕한 박용과 그의 아들 유지에 대한 형벌을 정하여 임금에게 재가를 청했다.


박용의 죄는 장 1백대와 노역 3년에 해당하고, 유지의 죄는 장 90대와 노역 2년 반에 해당하오니, 두 사람 모두 장형을 집행한 뒤에 도내에서 가장 후미진 금녕역에 배치하기를 청하옵니다(세종 10년 6월 23일).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더니 다음날 안숭선을 사헌 집의로 삼고 송포와 조서강을 장령으로 삼았다. 좌의정 황희가 물의를 일으켜 면목이 없다며 사의를 표했다. 임금이 극진한 언사로 위로하며 사의를 거둬주기를 청해도 따르지 않았다. 자신은 본래 아둔하고 어리석은데다 귀까지 어두워 더 이상 관직에 머물 수 없다며 극구 사양하는 것을, 임금이 재차 간곡히 설득하여 가까스로 붙잡아 앉혔다(세종 10년 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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