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뢰 누명을 쓴 신개의 항변 수용
대사헌 신개가 강원도 고성 군수인 최치로부터 문어 두 마리를 뇌물로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임금이 신개 본인에게 직접 물으니 신개가 펄쩍 뛰면서 극구 부인하고, 대신들도 신개의 결백을 의심하지 않아서, 그대로 넘어가기로 하였다(세종 14년 6월 25일).
그런데 신개가 일터인 사헌부에 출근하지 않더니, 형조가 자신의 대질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며, 임금에게 사의를 표하는 상소를 올렸다. 가뭄이 심해서 나흘 전에 임금이 노역형 이하 죄수들을 용서하였는데, 형조가 그 사면으로 최치의 죄가 용서되었다며 자신의 누명을 벗겨줄 생각을 아니하자 '사퇴'라는 초강수를 둔 것이다(세종 14년 6월 21일).
신개의 상소에 따르면, 신개의 종형인 신정도 집의 망달이라는 노비가 강원도로 물건을 사러 갔다가 정도의 친척인 최치의 고성 집에서 며칠 묵었다. 그 노비가 일을 마치고 고성을 떠날 때 최치가, 가다가 '길바닥 신'에게 바치라며 생대구 두 마리를 주었다. 망달이 그것을 받아서 가지고 오다가 한 마리는 사당에 바치고 한 마리는 회양에서 만난 지인에게 주었다. 그 일이 최치가 신개에게 문어 두 마리를 보낸 것으로 둔갑한 것이다.
신개가 상소에 적었듯이, 생대구는 쉽게 상하는 생선일뿐더러, 햇볕이 뜨거운 5월에 고성에서 서울까지 도보로 생대구를 온전히 가져올 수가 없다. 빨리 걸어도 열흘이 걸리기 때문이다. 또, 강원도 고성은 물산이 풍족한 고을인데 하필이면 도중에 상할 것이 분명한 생대구를 뇌물로 보냈을 리가 만무하다.
또, 최치가 신개에게 문어 두 마리를 바쳤다는 시기에 신개는 맡은 관직이 없어서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그때까지 최치와 만난 적이 없고 인척 사이도 아니었다. 그래서 최치를 데려다가 망달이 회양에서 지인에게 생대구를 주는 것을 본 사람과 대질시켜주기를 청해도 형조 관원들이 사면을 핑계로 움직이지 아니하자, 작심하고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대사헌은 임금의 이목이라 사람들이 완곡한 말로 넌지시 비웃어도 마땅히 직위를 내놓고 의혹이 풀리기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최치의 말이 비록 제게 하찮은 물품을 주었다는 것이고, 그마저도 거짓임이 드러났지만, 전하께서 들으시고 많은 사람이 알아서 대사헌 자리를 지킬 수가 없습니다. 남을 모함하기 좋아하는 무리들이 장차 ‘뇌물을 받고도 대사헌이라 사면되었다.’라고 업신여기면 제가 무슨 말로 해명할 것이며 어떻게 낯을 들고 백관을 규찰할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결함이 있으면서 다른 사람을 바로잡을 수는 없는 일이오니, 제가 모욕당한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저의 직책을 거둬주시기를 간청하옵니다(세종 14년 7월 4일).
임금이 신개에게 사람을 보내 "괘념치 말고 출근하여 직무를 수행하라."라고 하여도 신개가 거부하고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재차 사람을 보내 '모두 잊고 출근하라.'고 명을 전해도 따르지 않더니, 이틀 뒤에 다시 또 사의를 표하는 상소를 올렸다(세종 14년 7월 6일).
임금이 그마저도 반려하고 세 번째로 출근을 명하니, 신개가 마지못해서 다음날부터 사헌부에 출근해 대사헌 직책을 수행하였다. 그로부터 3개월쯤 후에 형조가 임금에게 최치의 나라창고를 축낸 내역을 상세히 아뢰면서 최치를 사형에 처하기를 청했다.
고성 군수 최치가 국고의 쌀과 곡식을 몰래 빼내서, 1백6석은 환자곡을 꾸어준 것처럼 기재하고 4백35석은 도둑이 훔쳐 간 것처럼 적었습니다. 또, 다량의 쌀·콩·젓갈·건어물·꿀 등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조세로 거둬들인 콩 22석과 다량의 젓갈·종이·미역·기름·꿀 등을 죽은 아내의 제사에 쓰고, 자신이 고성 군수였던 2년 동안(1428년~1429년) 돈과 곡식의 출납을 적은 장부들을 모두 없애버렸으니, 감수자도율(監守自盜律)을 적용해 참형에 처하시기를 청하옵니다. 또, 그가 함부로 축을 낸 물품들을 추징하시고, 고성군의 기관(記官)으로서 최치의 횡령을 도운 박절을 장 1백대와 유배 3천 리에 처하여 자자(刺字·얼굴이나 팔뚝의 살을 따고 홈을 내어 먹물로 죄명을 새기는 형벌)를 부가하시기를 청하나이다(세종 14년 10월 4일).
임금이 듣고 나더니 최치의 형을 한 등급 낮춰서 감수자도율로 다스리게 하고, 박절은 죄를 면해주게 하였다. 형조가 감수자도율의 형벌이 무거운 점을 내세워 최치에게 자자형을 부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감수자도율이란 관아에서 관할하는 돈이나 곡식 등을 관리(監守·감수)하는 관원이 자신이 관리하는 물품을 스스로 훔치는 것(自盜·자도)을 말하며, 그러한 범행이 발각되면 훔친 물건을 모두 합산한 수량 혹은 금액을 기준으로 형을 정했다.
그런데 4년 반쯤 지나서 임금이 돌연 최치의 직첩을 돌려주게 하였다. 사헌부가 반발하며 명을 거두기를 청했다. 법대로 하면 마땅히 죽여야 할 사람을 살려준 것도 모자라서 회수한 직첩까지 돌려주면 장차 부정을 저지르는 관리들을 징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아뢰니, 임금이 저간의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장죄(贓罪·횡령)를 입은 자가 빼돌린 물품을 스스로 취하지 않았으면 직첩을 돌려주는 것이 관례인데, 의정부에서 ‘최치는 스스로 취한 물품이 없다.’고 아뢰어서 추징을 멈추고 직첩을 돌려주게 한 것이다(세종 19년 4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