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를 족쳐서 실상을 밝혀라

왕실의 가까운 종친과 사귄 출궁녀 처형

by 조병인

장미라는 궁녀가 병이 들어 잠시 대궐을 나왔다가 왕실의 종친인 사내들의 환대를 받았다. 처음에 임금의 5촌 조카인 신의군 이인이 장미를 자신의 할머니 집으로 초대해 함께 여러 날을 유숙하였다. 그런 뒤에 여러 아우들과 함께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장미를 청하여 거나하게 마셨다(세종 17년 5월 14일).


이인은 태조 이성계의 삼남인 익안 대군 이방의의 외아들인 익평 부원군 이석근의 장남이다. 석근은 일곱 명의 아들을 낳아서 이름을 차례로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ㆍ강(綱)ㆍ상(常)으로 지어주었다(세종 4년 11월 6일).


이인이 자기 매제이자 양녕대군의 처남인 김경재를 술판에 초청했다. 경재가 또 자기 처남들인 김유돈ㆍ김유장과 자기 동서인 정철권을 장미와 함께 자기 집으로 초대해 연회를 베풀었다. 김유돈과 김유장은 이방의의 외동딸이 김한에게 출가하여 낳은 자식들이니 이인의 형제들과 외사촌 고종사촌 사이다.


임금의 지시로 의금부가 수사에 착수하더니 장미와 어울린 사내들이 무더기로 벌을 받았다. 이인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평안도 여연으로 쫓겨가고, 그의 여섯 동생은 도성 밖으로 쫓겨나고, 김경재ㆍ김유돈ㆍ김유장 등도 먼 곳으로 귀양을 갔다. 그들의 신데렐라였던 장미는 대궐로 돌아가지 못하고 친가에 머물렀다.


세월이 8년쯤 흘렀을 즈음, 여연에서 귀양을 살고 있던 이인이 평안감사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다. 정작 엄한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김경재인데 자기가 혐의를 덮어썼다며, 죄를 벗을 수 있게 자신을 김경재와 대질시켜 주기를 청한 것인데 효과가 있었다(세종 26년 1월 11일).


평안도 감사가 그대로 장계를 올리니 임금이 의금부로 하여금 장미가 8년 전 추국 때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까닭을 밝히게 하였다. 밤중까지 고문을 해도 좋고, 압슬을 두 차례까지 가해도 무방하며, 분명치 않거나 미진한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대질을 시키되, 국문이 끝나면 밤을 타서 장미를 대궐로 들여보내게 하였다(세종 26년 3월 4일).


두 달쯤 뒤에 의금부가 이인과 김경재를 대질시키고 장미를 다시 신문하여 결과를 아뢰니, 장미가 '궁녀 신분으로 궁 밖의 남자들과 함부로 놀아난 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이인이 김경재에게 책임을 떠넘기려고 벌인 일이 장미의 명을 재촉한 도화선이 된 것이다(세종 26년 5월 8일).


이인이 죄를 벗은 것도 아니었다. 장미의 거짓말이 드러났는데도 임금은 이인을 그의 귀양지인 여연으로 돌려보냈다. 아울러서 김경재를 평안도 무창의 관노비로 보내고, 장미를 참형에 처하게 하였다. 영의정 황희가 인과 경재도 참형에 처하고 장미의 부모형제 재산을 몰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후자만 윤허하였다.


출가한 여자의 죄는 그 부모에게 연좌되지 않고 미혼이면 죄가 부모에게 연좌되는데, 장미는 일찍이 궁중에 들어왔다가 지금은 친가로 돌아갔으니 마땅히 죄가 부모에게 연좌된다(세종 26년 5월 25일).


장미의 아비는 먼 곳으로 귀양을 가고, 장미의 어미와 형제들은 모두 관노비로 보내졌다. 사헌부ㆍ사간원ㆍ우찬성ㆍ형조 판서가 잇따라 상소를 올려서 인과 경재도 사형에 처하기를 청했다. 임금이 인과 그의 처자를 인의 귀양지인 여연의 관노비로 보내고, 경재의 아내도 관노비로 삼게 하였다. 인의 아우인 예와 지의 직첩을 거두고 예를 먼 곳으로 추방하게 하였다(세종 26년 5월 26일).


하루 뒤에 대사헌 권맹손과 사간원 지사 모순 등이 상소를 올려서 인과 경재를 법대로 사형에 처하기를 재차 청했다(세종 26년 5월 27일). 임금이 따르지 않더니, 이틀 뒤에 장미의 목을 베게 하였다(세종 26년 5월 29일).


만약 이인이 죽은 뒤에 그의 영혼과 장미의 영혼이 만났다면 어떤 대화를 나눴을지 몹시 궁금하다. 이인이 너무도 민망하고 창피해서 할 말을 잃고 고개를 들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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