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을 유린한 유생들에 대한 징계 지체
서울 인근의 사찰에서 유생과 승려들이 패싸움을 벌였다. 성균관과 한성부(동부와 남부)의 유생 26명이 삼각산에 놀러 갔다가 불교 사찰인 덕방암의 승도들을 폭행하고 잡물을 빼앗은 것이다. 형조 판서 유계문의 아들이 덕방암의 승도에게 학문을 배우던 참이라 계문이 흥분하여 임금에게 유생들의 죄를 엄히 다스리기를 청했다(세종 24년 7월 21일).
임금이 의금부 도사 박회를 불러서 사건의 경위를 물어보더니, 유생들의 죄를 빠짐없이 밝히고, 생도들을 제대로 지도하지 못한 교관도 함께 국문하게 하였다. 승도들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 들었지만, 국법을 지켜야 할 선비로서 법을 어기고 여러 날 동안 절에서 놀며 불경을 빼앗고 집기 등을 부순 유생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세종 24년 7월 28일).
다음날 사간원 우헌납 윤사윤을 불러서, '자세한 실상은 듣지 못했으나, 승도 몇이서 종을 쳐서 무리를 모아 가지고 몽둥이로 유생들을 두들겨 패서 쫓았다는 말을 들었다.'라고 말문을 열더니, 승도들의 죄도 가볍지 않지만 유생들의 경거망동이 한심하다고 개탄하였다.
공손하고 유순한 마음으로 성인(聖人)의 학문에 전념해야 할 유생들이 공부를 중단하고 한가롭게 놀러 다니며 불경을 훔치고 절간의 기물을 부순 것은 도를 배우는 선비의 행동이 아닐뿐더러, 유생들의 광망함을 방관한 교관도 죄가 없다고 할 수 없다(세종 24년 7월 29일).
그때 마침 과거 시험이 다가오자, 집현전에서 임금에게, 산에 놀러 갔다가 승도들과 싸워서 옥에 갇힌 유생들에게 응시를 허락해주기를 청했다. 그들 중에는 장차 호걸이 될 선비도 있을 것이라며, 귀중한 인재가 시험 기회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유생들에 대한 징계를 며칠 미뤄주기를 청한 것인데, 전혀 먹히질 않았다.
배우기를 게을리하고 한가하게 놀러 다니며 광망한 짓을 일삼은 자들 가운데 설령 호걸감이 있더라도 갇힌 유생들을 풀어줘서 시험을 보게 해 줄 생각이 조금도 없다(세종 24년 8월 5일).
일주일 뒤에, 이번에는 성균관 생원 박충문 등 구십 명이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서 교관의 구금을 풀어주기를 청했다. 성균관에서 기숙하는 유생 전원이 자리를 비우고 놀러 나갔다면 교관에게도 책임이 있겠지만, 농땡이 유생 한두 명이 동료들과 함께 놀러 나간 것까지 교관이 알 수가 있겠냐며 특별히 윤허해주기를 청한 것인데, 역시 효과가 없었다(세종 24년 8월 12일).
사흘 뒤에 의금부가 그 사이 조사한 결과를 아뢰면서, 20살이 넘은 유생 다섯 명은 장 60대에 처하여 죗값을 돈으로 갚게 하고, 나머지 유생은 모두 죄를 면해주고, 승려 두 명은 장 80대에 처하고, 성균관 교관은 죄를 면해주게 하였다(세종 24년 8월 15일). 이렇게 해서 싸움이 나고 액 40일 만에 봉합되었는데, 100일쯤 뒤에 비슷한 사건이 또 발생했다
서부·중부 학당의 생도 이양경 등 10여인이 불교사찰인 보등사에 가서 중들을 결박하고 불경과 면포를 빼앗아, 임금이 전원을 의금부에 내려서 국문하게 하고, 생도들을 규찰하지 못한 교수관도 아울러 추국하게 하였다(세종 24년 11월 26일). 그러자 유생들 사이에 ‘임금이 불교를 믿는다.’라는 소문이 퍼졌던 모양이다.
임금이 승지들을 불러서, 단체로 절에 놀러 갔다가 승도들을 폭행한 유생들을 의금부에 가두어 조사하게 하였더니, 유생들이 나더러 불교를 숭상한다고 한다더데, 대신들에게 '절대로 그렇지 않다'라고 두루 알리게 하였다. 아울러서, 임금은 범죄사건의 시비를 명확히 가려줘야 하고 유생은 심성을 수양하여 그릇되고 간사한 말을 물리쳐야 하는 것인데, 어찌 이단(異端)을 물리친다고 승도들을 폭행하였으며 교관은 대체 생도들을 어떻게 가르치는 것이냐고 분개하였다(세종 24년 11월 30일).
하지만 유생들의 뒷담화가 마음에 걸렸던지, 곧바로 의금부에 명을 내려 성균관 생도들과 교관을 즉시 풀어주고 불구속 상태에서 신문을 진행하게 하였다(세종 24년 11월 30일). 이후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실록에 아무런 정보가 없으나, 앞서 덕방암에서 벌어진 패싸움과 비슷하게 종결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