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나의 레트로한 일상>

지금 그들은 뭘 하며 지낼까..

by 박순영

좀 나이가 있는 세대라면 LP판을 다들 알것이다. 바늘이 내던 마찰음, 그 지지직거림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으리라. 내가 대학때 했던건 공부가 아니고 연애와 LP모으기 였던거 같다. 연애라고 해봐야 이미 임자 있는 사람들이 괜히 집적댄게 다반사니 그닥 논할 바가 아니지만 락을 비롯한 올드팝에 대한 내 열정만은 지극했다. 가사 내용도 모르면서 따라부르고 흥얼거리던 그 노래들을 지금도 간간이 드라마나 영화 OST로 들을때면 당연 감회가 새롭다.



LP판을 녹음한 카세트 테잎을 애인이나 절친에게 주는 일은 그당시엔 흔했다. 나역시 수많은 테잎을 주었고 간간이 받기도 하였다. 그때 내 감수성이 최고점을 찍었는지 지금 들어도 전혀 시대에 뒤지지 않는 명곡들이 많았던거 같다. 영국 락 그룹 the baybs의 'everytime i think of you'를 비롯해 아마 수백, 수천곡을 들었고 녹음하고 그리고는 그걸 주고 상대의 반응을 살피고 했던 거 같다.



이제LP를 들으려면 따로 LP 플레이어를 사야 할만큼 시대는 빠르게 디지털화 되었지만 많은이가 나처럼 이젠 듣지도 않고, 듣기도 불편한 LP판을 버리지 못하고 갖고 있으리라 짐작한다.내 아파트 베란다 한귀퉁이는 LP판으로 가득 채워져있다. 그리고 몇년전 제법 거금을 주고 레트로풍의 오디오를 하나 샀다. CD, 카세트 테잎, 그리고 LP와 라디오가 모두 되는. 잔뜩 기대를 갖고 LP 위에 바늘을 얹던 순간의 감흥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한동안 줄창LP를 듣다가 언제부턴가 일에 치이고 디지털에 치이고 하면서 나의 아날로그시대는 막을내렸다.



지난해 언젠가 남친이 와서 레트로 전축을 탐내길래 한번 작동을 해본적이 있는데 CD와 라디오만 간신히 나올뿐 정작 중요한 LP부분은 고장이 나있었다. '뭐야 고쳐써야지'하면서 그는 타박을 했고 고로 가져가지 않았다. 해서 지금도 녀석을 보면 그가 생각난다.



내가 음악을 좋아하게 된 데에는 어릴적부터 있던 축음기격 오디오 덕이 아니었나 싶다.부모님이 딱히 음악 매니아가 아니었음에도 집안 여기저기 LP들이 굴러다녔고 그중엔 올드 팝이 상당수있었다. 그렇게 난 어릴때부터 전축이니 LP니 하는것들과 친숙하게 자라났고 그래서 라디오 음악프로그램 글을 쓸 기회가 주어졌을때 거의 운명처럼 여겨졌다. 원고가 밀릴세라 , 하루키처럼 1,2주일치를 먼저 써두고 그렇게 PD에게 내밀면 PD는 빨리 쓴다고 탄성을 질렀다.

그러면서 한두곡은 직접 선곡해보겠냐고 해서 난 흥분돼서 방송국 자료실을 들락거리면서 음악을 선곡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곡들은 거의 방송을 타지 못했다 . 라이트 팝이나 가벼운 가요 위주로 나가는 포맷인데 난 핑크 플로이드, 레드 재플린 따위를 가져갔으니...



이사를 여러번 다니면서도 난 단 한장의 LP도 버린적이 없다.

대학 4학년무렵, 이른바 싸게 살수 있는 '빽판'을 산다고 청계천 일대를 뒤지고 다닌적이 있다. 수업이 끝나면 친구와 그곳으로 직행하는 일이 다반사였고 그러다보니 단골도 생기고, 빠듯한 돈으로 한 두장 사고나면 세상을 다 가진듯 기뻤다.

그러다 어느날, 나 혼자 갔다가 길을 잃은 적이 있다. 눈 감고도 가는 길을 그날은 왜 헷갈렸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낯선길에 들어섰고 이상한 불빛들이 골목을 메우기 시작했고 유리문이 달린 집들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내또래, 내지는 좀더 나이든 여자들이 하나 둘, 집밖에 의자를 내놓으며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들 주위를 험상궂은 남자들이 맴돌고...

그제야 나는 알게 됐다. 내가 들어선 곳이 말로만 듣던 '홍등가'였음을. 난 이러다 뭔 일이라도 당할까싶어 걸음을 빨리했지만 그럴수록 길은 점점 더 미로로 빠져버리고 난 더 헤어나올수가 없었다. 그러다 그중 한 여성이 나가는 길을 가르쳐줘 난 간신히 그 골목을 나올수 있었다.



지금 그들은 살아있을까, 그렇다면 여태 그일을 하며 살까, 가끔 생각에 빠질때가 있다. 어리숙한 여대생 하나쯤 험한 일 당하게 하는게 어렵지 않았을텐데 그들은 암묵적으로 나를 보호해주고 그냥 패스시켜준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여간 고마운게 아니다...

지금도 그래서 LP들을 보면 찬란했던 내 청춘의 꿈만큼이나 검붉은 불빛의 그 골목이 함께 떠오른다. LP들은 베란다에서 먼지를 쓰고 있고 오디오는 고장이 나버렸지만.


LP를 녹음한 테잎을 수줍게 내밀던 그 시절의 나는 모르긴 해도 사랑을 믿었으리라. 사랑은 학대하고 배반한다는것은 뒤늦게나 깨우친 일이리라..

그렇게 내 테잎을 받은 그들과는 모두 헤어지고 정리했고 정리당했지만 내가 준 테잎들이 어디선가 툭 튀어나올수도 있다는 생각,마치 프루스트가 마들렌과자에 영감을 받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써나간 것처럼 그런 기적은 언제든 일어날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홍등가에서 헤매는 나에게 '저쪽으로 '라고 출구를 알려준 그분께 진정 감사드린다.


(85) The Babys - Every Time I Think Of You (Official Music Video)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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