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침일찍 갈 곳이있어 마음부터 부산스럽다. 차가 없이 러시아워에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부담이..
예전 엄마가 치매로 지방 요양시설에 계실때 일주에 한번씩 간적이 있다. 근 2년을 그랬으니 꽤 오래 그런 셈인데, 고속버스로 꽤 걸리는 거리라 아침일찍 나가야 할때가 많았다.
어느날은 뒤늦게 일어나 허겁지겁 아침을 먹고 붐비는 버스에 올랐다 .멀미를 느껴 도중에 내려 다 게워냈다.. 그러고는 터미널까지 택시를 이용했다. 거기서 고속에 올라 잘 가긴 했는데 내려서 터미널을 빠져나오다 꽈당 넘어져 무릎이 박살나고...
그 일진이 하도 유별나 아직도 기억한다. 1월 26일.
해서 엄마가 계신 요양병원에서 간단히 드레싱을 했다.
"엄마 나 여기여기 아퍼"
"조심하지 그랬니..."
그렇게 2년여를 시설에 계시다 엄마는 세번째 페렴이 왔을때 돌아가셨다. 원내감염으로 추정되지만 우린 조용히 엄마를 보내드리기로 하고 병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엄마는 마지막 한달을 온몸에 호스를 끼고 거의 의식없이 계시다 가셨다.
지금이야 치매에 대한 인식이나 케어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는 자식이 있는데 시설에 넣는다고 비난하는 주위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친척중에,또 친구중에도 . 해서 그때 다 절연한 기억이 있다. 니들이 당해봐라. 그게 집에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이를 갈기도.
엄마는 악성치매여서 정신분열 수준의 행동을 하셨다. 자다가 한밤에 깨어나 장롱문을 여닫으며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러대고 '문밖에 나쁜 놈들이 와있다'며 문을 못 열게 하셨고 TV에 나오는 여자 연예인이 "나를 째려본다. 나쁜 년"하면서 TV채널을 돌려버렸다. 그거까진 좋았는데 어느날은 물로 뒷베란다를 채우려고 하셨다.왜?하고 묻자,무조건 이래야 한다,고 하셨다. 그걸 뜯어 말리느라 나는 엄마와 몸싸움까지 해야했고...
그래도 시설에 들어가시기전까지 대소변은 잘 가리셔서 내가 그 부분 뒷수습을 해야 할 일은 없었다. 시설에 가는 날도 엄마는 캐나다에 가시는 줄 알고 가셨다. 그곳에 아끼는 조카가 가있기 때문에 늘 가보고 싶어하던 곳이었고 엄마는 그 조카를 아들로 여길만큼 이뻐하셨다. 해서, 캐나다에 가는 거라며 엄마를 시설 차에 태우던 순간의 그 서럽던 마음은 아직까지 생생하다.
그렇게 시설에 입소한 엄마는 환복하라고 하자 거부하셨고 비행기는 언제 뜨냐고 계속 물어댔다. 언니와 나는 일단 자고 내일 얘기하자고 병원을 나왔고 그 다음날 언니로부터 아침 일찍 전화가 왔다. 엄마가 저녁밥이 담긴 식판을 뒤엎고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피워 퇴원하라고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고 한다. 그렇게 엄마는 병원 이곳저곳에서 거부를 당하고 한때는 정신과 폐쇄병동에까지 입원해야 했다. 요양시설이란 데가 대부분 '순한 치매'만 받는다는걸 난 그때 알았다..
폐쇄병동에 계실때 엄마와 나눈 재회가 떠오른다. 환자복을 입고 면회실로 들어서던 엄마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난 울음을 터뜨렸고 엄마와 서로 부둥켜 안고울었다. 엄마는 거의 짐승의 울음을 울어댔다...
어릴때 집안일을 봐주던 언니와 저녁이면 버스 정류장에 엄마 마중을 나가곤 했다. 버스가 맞은 편에 서면 난 저녁의 어스름속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다리를 보고 엄마를 알아맞혔다. 엄마다! 하고는 좋아서 팔짝팔짝 뛰면 일봐주는 언니는 나를 안고 엄마가 길을 건너오길 기다리곤 했다.
그렇게 엄마를 만나면 나는 폴짝 엄마에게로 옮겨가 , 집 골목 입구의 과자점에서 과자를 사달라고 졸랐든가...
비록 치매로 서럽게 가시긴 했지만, 엄마는 그래도 친수를 누리셨다. 물론 나와 약속한 100세를 채우진 못했지만.
내 까페에 오늘 누군가 "달에 엄마가 있어서 바라본다"는 구절을 쓴걸 보고 잠깐 그때 기억이 났다. 엄마는 별이 되었을듯 하다. 그 별이 내집과 옆동 사이에 밤이면 유난히 반짝이는 그 별이었음 하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