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민은 한번에 약속을 정하는 법이 없다. 전화로 정하면 간단할 것을. 그는 늘 문자로 오래 걸려 약속을 잡는다. 그렇게 일단 약속을 정해도 번복하기가 일쑤다.
그를 본 지 6개월이 지났다. 은혜는 생각한다. 우리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가...
“어떻게 하다보니 점심, 저녁 약속이 먼저 잡혔네. 우리, 그 틈에 보면 안될까?”
3년사귄 연인을 틈새시간에 보는 사람도 있을까, 은헤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좋을대로 해요”
“그럼...대학로 거기서. 우리 만나는 거기..”
6개월전에 만난 곳을 기억이라도 한단 말인가 이 남자가.
동민과는 사연이 좀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갓 취직한 은헤는 1년 선배인 지훈과 첫사랑같은 연애를 했다.
“ 오래된 친군데 소개 시켜줄까?”
그말이 사단이 돼서 어느날 저녁 회사 근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지훈의 고교동창 동민을 소개받은 은혜.
“미인이시네요”
그게 동민의 첫마디였다.
“짜샤, 넘보지마 ”
하며 지훈은 히죽 웃었다.
그러나 동민은 어떻게 알았는지 그날밤, 귀가해서 잠자리에 드는 은혜의 휴대전화에 문자를 날렸다. 언제 또 볼수 있냐고.
은혜는 불쾌하기도 하고 지훈의 얼굴이 떠올라 즉시 문자를 삭제했다. 그걸 알기라도 한 듯 동민은 새벽녘 문자를 다시 보냈다. 연극 티켓이 있으니 주말에 같이 가자,라는 것이었다.
은혜는 단도리를 해야 할거 같아서 그에게 답장을 했다. 한번 보자고.
그렇게 해서 둘은 이전 지훈과 만났던 그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다시 만났고 다시 본 지훈은 지난번 추레했던 모습 대신 단정한 차림이었다.
“지훈이한테는 미안하지만” 하며 동민은 은혜의 손을 잡았다. 은혜는 당연 뿌리쳤지만 그는 “너도 날 원하잖아”하면서 은혜의 두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곤 다짜고짜 은혜의 입술을 빼앗았다.
은혜는 동민을 뿌리치고 레스토랑을 뛰쳐나와 아무 택시나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그날 이후로 은혜는 짧지만 강렬했던 동민의 키스가 떠올라 괴로웠지만 이미 마음은 지훈을 떠나고 있었다.
“니 둘이 나한테 어떻게 이래!” 하며 지훈은 나란히 앉은 동민과 은혜에게 물잔을 끼얹고 까페를 뛰쳐나갔다. 그의 등이 너무나 초라하다고 은혜는 느꼈다. 그러나 동민은 테이블의 냅킨을 집어 은혜의 젖은 머리카락부터 닦아주었다.
“우리 안되는 거잖아 이럼..”하고 은혜가 동민에게 낮게 말한다.
“이젠 돌이킬수 없어” 라며 동민은 대답한다.
그리고 그날밤, 은혜는 동민의 오피스텔에서 그의 품에 안겼다. 그렇게 3년....
그런데도 늘 만날 약속을 잡는게 은혜로선 고역이었다. 그의 문자 답장은 늘 오래 걸렸고 되돌아온 답문 또한 확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 남자는 나를 사랑하는가...
언젠가 동민에게 ‘날 사랑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러자 “유치하게”라며 그가 웃었다. 그러면서 “아니 좋아해 것두 아주 많이 ”라고 그는 대답했다. 그렇다. “사랑”이란 모호하고 통속적인 표현보단 “좋아한다”는 말이 더 진정성있다고 은헤는 생각했다. “그래 나도 이 사람 너무나 좋아한다” 라고 은혜는 둘이 삐걱거릴때마다 자신에게 되뇌이곤 했다.
총 3시간에 걸쳐 동민과 겨우 약속이 잡힌다. 이제 은혜가 할 것은 그에게 줄 새 와이셔츠를 사는 일이다. 동민은 무역회사 마케팅부에 있다. 그만큼 대하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그는 늘 대학생같은 차림이다. 청바지에 단출한 티셔츠. 회사에서 아무말도 없을까, 은혜는 늘 그게 맘에 걸린다.
와이셔츠를 사는 김에 넥타이도 두어개 사야지, 은혜는 맘 먹는다.
동민과 만나기로 한 그날 대학로는 여느때처럼 젊은 행인들로 붐빈다. “우리 만나는 거기”라고 동민은 얘기했다. 설마 기억도 못하면서 그런 표현을 했을 리가 없다고 은혜는 생각한다. 해서 “거기”로 향한다. 한손엔 동민에게 줄 셔츠와 넥타이가 들어있는 쇼팽백이 들려있다.
“거기”는 대학로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는 테이블 4,5개의 작은 까페였다. 내부 인테리어도 단출하고 고답적이다. 과연 장사가 될까, 싶지만 나름대로 단골이 있는 눈치였다.
은혜는 유리문을 밀고 들어간다. 그러자 “어서오세요”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부는 비어있고 남자는 커피를 내리고 있다.
“앉으세요”라며 남자가 한손으로 빈 테이블을 가리킨다.
은혜는 그 빈 테이블에 가서 앉는다.
“잠시만요” 하며 남자는 은혜에게 양해를 구한다. 그리고는 잠시후 남자는 주문을 받으러 온다.
“한 반년 되셨죠?” 라며 남자는 은혜를 알아보는 체를 한다.
“저는 그쪽 처음인데...”
“그땐 서빙 알바를 따로 두고 있었어요. 저는 커피만 내리고...그래서 아마”
“아 예...”
우린 아직도 이렇게 주문받는다며 메뉴판을 펼쳐보인다.
메뉴들을 살펴보며 은혜는 의아해한다. 어떻게 6개월만에 온 손님을 기억할수 있을까...그럼 동민도 기억한단 말인가...
그렇게 까페라떼 한잔을 다 비울때까지 동민은 나타나지 않는다. 연거푸 은혜는 시계를 들여다본다. 아, 틀어진건가, 하며 은혜는 다시 동민에게 문자를 보낸다. 기다리고 있다고. 그러나 여느때처럼 동민의 답은 늦어질뿐이다.
그때 “한잔 더 하시겠어요?”라며 남자가 은혜의 빈잔을 리필해준다.
“고맙습니다” 하다 그제서야 그의 왼쪽 가슴에 달려있는 작은 명찰을 보게 된다. “한정우”.한정우, 라고 은혜는 별 의미없이 되뇌인다. 그렇게 시간은 또다시 흐르고 동민에게선 그 어떤 연락도 온다. 은혜는 포기하고 일어선다.
“가시게요?”라며 정우가 카운터에서 책을 보다 말을 건넨다.
“잘 마셨습니다”하고 은혜가 계산하는데, “비와요”하며 정우가 밖을 가리킨다.
비가 오는것도 몰랐다 은혜는. 줄곧 유리벽 너머 밖을 보면서 창이 젖는걸 보면서도 그가 ‘비’라는걸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리필 감사했어요” 하고 은혜는 죄지은 사람처럼 까페를 뛰어나간다.
정우가 뭐라고 한것같지만 은혜는, 바람맞은 자신이 한심하고 수치스러워 그대로 내달린다. 방향도 정하지 않고.
“우산요”하며 정우가 그녀의 한팔을 잡는다.
은혜가 돌아보자, 정작 정우는 그대로 비를 맞고 있다.
“그쪽이나 쓰세요”하며 은혜는 외면한다
“써요. 감기 들어요”라며 정우가 자동우산을 펴서 은혜에게 씌워준다.
은혜는 마지못해 그 우산을 받아 들고 정우를 응시한다. 그가 희미하게 웃고 있다.
“어떡해요 다 젖는데” 은혜가 걱정한다.
“됐어요 난” 하고 정우는 뒤돌아 까페를 향해 달린다. 은혜는 그에게 여간 미안한게 아니다.
그렇게 한시간 쯤 배회를 하다보니 비는 그치고 은혜는 한손에 쥔 정우의 우산을 바라본다. 어떻게 하나 이걸....하다 그의 까페로 향한다.
“어서 오” 하다 정우가 “아”하고 낮게 탄식하는 소릴 듣는다 은혜는.
“고마웠어요 ”은혜는 우산을 돌려준다.
“또 올지 몰라요. 그냥”
“그럼 사서 쓰죠 뭐” 하고 은혜가 돌아서는데, 불쑥 정우가 말을 한다.
“내 여자였는데..”
대학 2학년때 만난 그녀와 정우는 자타공인 캠퍼스 커플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그녀를 형인 정민에게 소개시키고 모든게 뒤틀렸다. 당시 의대 레지던트였던 형 정민은 매몰차게 그녀, 해인‘을 동생에게서 빼앗았다.
그말에 ,자기가 배반한 지훈이 떠올라 은혜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형은 의료봉사활동을 다녀오다 차사고로 죽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인은 혼자가 되었고 그리 된 그녀를 정우는 잊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가끔 그녀가 다니는 출판사 근처로 찾아가곤한다고 한다.
우린 어딘가 닮아있다,는 생각을 은혜는 한다.
“단념이 안돼요” 하며 정우가 식은 커피를 홀짝인다.
“맘이 많이 아팠겠어요” 하며 은혜가 거든다.
그때 은혜옆에 놓인 쇼핑백에 정우는 눈이 간다. “선물이예요?”단박에 그는 알아차친다. 동민에게 줄 선물을... 은혜는 다시한번 전화를 보지만 동민에게선 아무 답이 없다.
“그만 가야겠어요. 오늘 감사했구요” 은혜는 일어난다.
그런 그녀의 한팔을 정우가 잡는다.
둘 사이에 긴장이 흐르고, 잠시만요, 하며 정우가 기다리라는 눈빛을 보낸다. 그리곤 서둘러 폐점 준비를 한다. 그러나 은혜는 까페를 먼저 나온다.
막상 까페를 나온 은혜는 어디로 가야 하나, 정하지 못한다. 그때 뒤에서 정우가 말한다.
“나 따라 갈래요?”
은혜가 대답도 하기 전에 정우가 그녀의 한손을 다시 잡는다. 은혜는 그 손을 뿌리치지만 그는 다시 잡는다.
“어딜요...어딜?”
그러나 정우는 아무 대답도 없이 그녀를 더 후미진 곳으로 이끈다. 나는, 우리는 어디로 가는걸까....하며 은혜는 이끌려간다. 그리곤 정우가 발을 멈춘다. 은혜의 눈에 모텔이 들어온다. 은혜는 당황한다. 그런 은혜를 보며 정우는 아무말이 없다....“난 좀” 하며 은혜가 잡힌 손을 빼는데, 문자 알림이 온다.
은혜는 동민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한다 . 까페에 갔는데 문이 닫혀있다며 지금 어딨냐고.
그걸 확인한 순간, 이번엔 은혜가 정우의 손을 힘주어 잡는다. 그러자 정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이끌고 모텔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