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겨울베니스>
형규가들어설때 겨울베니스도함께 밀려든다
감기 기운이 있어 비상으로 가지고 간 쌍화탕을 한병 마시고 베니스행 비행기에 올랐다는 형규의 말에 지현은 눈물이 핑 돈다..홍콩을 거쳐, 런던에서 베니스행 비행기에 갈아탔을 그 여정을 지현은 형규와 함께 한 듯 하다. 감기니 몸살이니 하는 것들은 언제나 지현의 몫이었는데, 이상하게도 2년전 형규를 만난 후부터, 그 증세는 형규에게로 옮겨갔다 "내가 너랑 사랑을 하기 때문이야" 라며 웃을땐, 그가 능글맞기도 했지만, 세상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는 지현에게 형규는 얼마나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었든가.
"고맙습니다. 다 두분 덕분이예요" 방금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여자 탤런트가 내미는 동남아 여행권 두장. 데스크의 지시로 어쩔수 없이 떠난 스캔들 추척 기사였지만, 다행히 그 커플은 동반취재를 해준 형규와 지현 덕에 6개월후 결혼에 이르렀다. 여행권을 받아들면서 형규와 지현은 아마 같은 생각을 한 것 같다. 데스크에선 난데없는 해외취재에 영문을 몰라했지만, 둘은, 휴가를 떠나듯, 공항을 나가 태국에서의 첫밤을 함께 보냈다.
"베니스 공항에 도착해서 수상버스로 산마르코까지 왔어. 방금 호텔에 들어 짐을 풀었는데, 밖에 노을이 정말 일품이야. 너도 같이 왔더라면.."
런던에 칩거중인 가수 K씨를 취재하러 갔던 형규는, 그 길로 베니스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5년째 그림을 그리고 있는 대학선배를 만나러 간다며, 일정보다 1주일 늦게 돌아가니 그리 알라는 메일을 보내왔다. 저녁 노을이 아름다운 베니스..지현은 뭉클해진다.
"형규씨 정말 봤다니까...얜, 안 믿네...어제, 명동에서 봤어. 틀림없다니까"
친구 예진의 전화에 지현은 피식 웃음을 흘린다. "얘, 베니스에 있는 사람이 명동에 어떻게 있어. 니가 잘 못 봤지 . 아님, 딴 사람을 봤든가. 너, 형규씨 몇번 안 봤잖아"
하지만 예진은 조롱이라도 하듯, 정말로 전날, 형규를 명동에서 봤노라, 우기는 것이었다. "언제 점심이나 해 " 지현은 대수롭잖게 전화를 끊고 취재를 나갔다. 그러나, 먹거리 취재를 나갔던 안국동 한식집에서 내민 떡국 한 그릇이 얹혀버리자, 예진의 그 말은, 정말인 것처럼 지현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는 베니스에 있다. 그가 왜 여기를 걷고 있단 말인가.
채기가 있더니 몇 년만에 감기기운이 돌았다. 형규가 가까이 있다면, 나도 당신 때문에 감기들었어, 어리광이라도 부려볼텐데..이렇게도 애틋하게 타인이 타인을 부를수도 있는걸까.
"오늘 낮엔 리도섬이랑 무라노섬을 돌아봤어. 내일은 베로나를 구경시켜 준대. 그리고 니가 좋아하는 미술관도 있어. 구겐하임 미술관이라고.들어봤지? "
마치 약이라도 올리듯 형규는 베니스에서의 하루하루를 자세히 타이핑해보냈다. 그러면서 끝엔 어김없이 "니가 같이 왔어야 하는데"를 덧붙이는 것이었다 형규가 돌아오면,그의 부모님을 뵈러 가기로 약속을 했다. 2년의 교제동안 형규는 한번도 그녀를 배반한 적이 없었다. 형규 이전의 "그 남자"가 준 상처가 너무 컸으므로, 형규를 받아 들이는 것도 어려웠지만, 한번 마음을 열자, 그는 파도처럼 그녀에게로 몰려들었다.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 들려 할 때, 예진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내가 거짓말 한다고 생각하니? 나, 정말 형규씨 봤어..이 얘기, 너한테 안 하려고 했는데, 혼자가 아니었어"
어떤 여자와 함께였다고..지현은, 속이 울렁했다. "그 사람 베니스에 있다니까 ." 그 얘길 한 열번도 더 한 듯 하다. "너무 믿지 마. 형규씨라고 허구한 날 부처님일까." 예진은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콧소릴 내며 전화를 끊었다. 그의 오피스텔에 가볼까...하지만, 그건, 형규를 배반하는 일이다. 자기가 없는 동안, 필요하면 쓰라고 방 열쇠까지 주고 간 그가 아니었든가.
불 꺼진 오피스텔 복도는 괴기하게 느껴졌다. 밖에서 볼 때, 형규의 방은 불이 꺼져 있었다. 그럼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이 지현을 8층까지, 그것도, 엘리베이터를 두고 걸어 올라오게 했단 말인가. 열쇠를 꽂는다. 열쇠는 정확히 돌아갔다. 그만이다. 더 이상은 배반이다. 집에 돌아가보니, 형규의 메일이 와있다. 마치 영원같아 이곳의 노을은. 이 아름다운 섬이 점점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
"겨울이면 관광객의 발길이 뜸한 베니스에 요즘 폭우가 계속되고 있어.."
감기 때문에 아침을 거르고 나온 지현은, 사내 식당에서 아침겸 점심을 먹고 있었다. 텔리비젼 여자 아나운서의 그 말은, 지현을 거세게 후려치고 갔다. 수도 로마의 소식은 이따금 텔리비젼을 통해 들을수 있어도, 베니스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것도, 베니스의 일기에 대한 소식은 ...형규가 그 영원같은 노을을 봤다는 바로 그 저녁에 베니스 일대에 폭우라니..잠깐 뿌리다 말았겠지, 하는데 , 아나운서의 멘트가 그런 지현의 바람을 모질게 배반한다. "밤새 폭우가 내려.." 내 남자 형규가 노을을 봤다고 했다. 베니스도 여러 섬으로 돼 있다. 형규는 산마르코 쪽에 있다. 다른 섬들에 내렸겠지. 서울에서도, 한강 다리 하나 건너 일기가 다를 때가 종종 있지 않은가. 그러나 결국, 지현은 먹은 걸 다 토해내고 만다.
"정말, 형규씨였어?"
이번엔 지현이 예진에게 전화를 했다.
"얜..내가 비싼 밥 먹고 너한테 농담하니?"
하지만 예진은 형규를 두세번밖에 보지 못했다. 대학동창인 예진은 대학졸업반일 때, 같은 과 선배와 결혼을 했고, 2년후엔 다시, 능력있는 이혼녀가 돼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형규를 소개시킨 건, 그와 관계가 깊어진 그 봄 이후였다. 그리곤 두세번. 어쩜, 한두번, 예진은 형규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렇게 형규를 똑똑히 기억한단 말인가.
지현은 그날 퇴근후, 누군가 자기에게 명령을 하면, 네, 네, 실행하는 로봇처럼, 택시에 올라 일산으로 가 달라고 했다. 아래서 올려다보는 그의 방은 오늘도 불이 꺼져 있다. 그는 없다. 그는 베니스에 있다. 하지만 지현은 어느새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다.
열쇠는 맞지 않았다. 며칠전, 딱 들어맞던 열쇠가 오늘은 맞지 않는다..귀를 문에 갖다댄다. 바흐가 들리는가. 바흐와 침묵. 이 둘이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비어있는가 이 방은..
"한달은 걸립니다"
오피스텔의 8층 계단을 다 내려와 두세 개를 남기고 지현은 발을 헛디뎠다. 그리곤, 발목 골절상을 입었다. 의사는 인대 손상이 심하다고 했다. "반 깁스를 한 2주일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붓기 빼면서 소염치료, 그리고 물리치룐 계속 받아야 하구요"
"너 다리가 이게 뭐야. " 인천공항에서 모범택시로 달려왔노라며 형규가 들어설 때, 겨울베니스가 함께 지현의 방으로 밀려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