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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슬픔

by 박순영

문득 고흐의 <구두>그림이 떠올라 찾아봤다. 삶의 애환이 그대로 묻어나는게 신발이다. 그러다보니 과연 글쓰기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가 얼마나될까,하는 궁금함이 밀려왔다.


고흐의 이야기야 널리 회자돼서 부언할 필요도 없지만 그 뒤에 동생 테오가 있었기에 고흐의 예술이 꽃필수 있었다는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림밖에 모르는 고흐와 달리 테오는 현실에 밝았고 그런 테오의 재정적 지원이 계속되는 한 고흐는 궁핍속에서도 자신만의 세계를 지탱시킬수 있었다. 그러나 테오의 사업이 기울고 지원이 어려워지면서 고흐는 침체의 늪에 빠지고 정신병은 더욱 심해져 결국 죽음에 이른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말이 많지만, 내가 읽은 어느 책엔 결코 자살일 이유가 없다는 식으로 쓰여있다. 동네 불량배들이 쏜 총에 맞아 갔다는 이야긴데...그건 예술사학자들이 판단할 것이라 본다.



아무튼, 문학이든 예술에 관심을 갖는다는 자체가 축재蓄財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일인것만은 사실인듯 하다. 그래서 예전 서양에서는 스폰제도가 성행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비록 돈을 제공하지만 예술가들의 창작열까지 간섭하고 명령하진 않았던 걸로 안다.


해서 잠깐 상상해봤다. 내가 뭘 하든 돈을 좀 벌게 되면 유망한 예술가 후원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물론 망상에 지나지 않지만 생각은 해볼수 있지 않은가. 캐나다는 예술인을 우대하는 제도가 있어서 그만큼 비자도 쉽게 나오는걸로 안다.


우리야 경제발전외에 돌아본거 없이 달려와서 이리도 문학이니 예술에 척박한 환경이 되었지만 우리 다음 세대쯤 가면 캐나다처럼, 우리도 예술인들에게 특혜를 준다든가 우대하는 환경이 조성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까진 아무래도 pride 하나로 버틸밖에.


다른 많은것중에 그래도 예술 언저리를 배회하게 된걸 조금은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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