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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휘 Apr 12. 2024

소녀가 동경했던 소녀

동경 : 빨간 머리 앤

하지만 앤은 발 앞에 놓인 길이 아무리 좁다 해도 그 길을 따라 잔잔한 행복의 꽃이 피어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길에는 언제나 모퉁이가 있었다.


나의 국민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첫 번째로 생각나는 것은 일요일 아침 만화영화 보던 그 시간이었다.

어떤 날은 엄마가 크림수프를 만들어 주기도 했는데 그 당시 엄마는 크림 수프 만드는 법을 어디서 배웠을까? 밀가루로 루를 만들어 우유를 붓고 끓여 얼마나 고소하고 달콤했던지. 당시 크림 수프를 만드는 엄마는 우리 엄마밖에 없었다. 친구들은 자주 엄마의 크림수프를 먹으러 우리 집에 드나들곤 했었는데....

아무튼 크림수프를 핥듯이 먹어치우면서도 눈길은 만화영화에서 떨어지지 않곤 했던 주말 아침이었다.


로봇 태권 V, 플란다스의 개. 등등 여러 만화를 대부분 좋아했지만 가장 좋아했던 건 바로 앤이었다.

어린 마음에 앤의 처지가 그토록 서글플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티브이 속 앤은 언제나 명량했고, 활발했고 초긍정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너무 이해되지 않았다. 그냥 만화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생생한 초록지붕집. 그 집을 얼마나 동경했던가.

우리나라에는 없는 집, 그때 나는 크면 꼭 저런 시골마을에서 초록지붕집을 짓고 살겠다고 다짐했다.

(아직 못 이룬 꿈 ㅜ)

초록 지붕의 집 2층 다락방에서 앤은 유리자 Jar 속에 초콜릿과 캔디를 담아두고 하나씩 하나씩 아껴가며 꺼내먹었다. 초콜릿도 당시엔 난생처음 보는 예쁜 하트모양, 네모모양 세모모양에 화이트초코로 구불구불한 선이 만들어진 그런 초콜릿들 말이다.

지금은 너무도 익숙한 그 초콜릿이 당시의 나에겐 저세상 초콜릿과 마찬가지였다.

햇살이 쨍하게 내리쬐고 앤의 땋은 붉은 머리는 넝쿨처럼 바람에 흔들렸다.

그 바람을 맞으며 유리 jar에서 초콜릿을 하나 꺼내어 입에 넣고 눈을 감고 오물오물 음미하는 그 광경이란.

나는 당장 앤의 유리 jar와 비슷한 거라도 유리병을 하나 구해야만 했다.

요즘처럼 잼병도 예쁘지 않았던 시절, 우유가 병으로 나오던 시절이라 나는 당장 우유병을 하나 차지했다.

기억으로는 우유병은 다 마시면 우유회사에서 다시  가져간 듯했는데 엄마에게 졸라서 하나만 남겨주라고 애원을 했던.

그렇게 나에게도 앤처럼 예쁜 유리병이 생겼고 나는 거기에 사탕들을 넣기 시작했다.

당시의 사랑방이라는 사탕은 색깔도 여러 가지 맛도 여러 가지 참 맛있기도 했는데 그 사탕이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양 나도 앤처럼 아주 특별한 날에만 하나씩 하나씩 꺼내먹었다.(지금 사랑방 사탕은 그때의 그 맛이 아니더라)

그때의 그 모습들이 여전히 가끔 생각나서 지금은 넘쳐나는 예쁜 유리 jar에 앤이 먹었던 초콜릿과 비슷한 것들을 쟁여 넣어두고 아들에게 하나씩 주곤 했다.

'너는 엄마의 앤을 절대 모를 거야. 그때 그 만화는 다시 보기도 안된단다.'

아이에게 내가 느꼈던 앤을 보여주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 유튜브엔 있으려나.



앤을 보면서 늘 궁금했던 것은 '어떻게 하면 저렇게 좋은 생각만 하지?'였다.

'쟤는 분명 나보다 언니일 거야, 그러지 않고선 불가능해'라며 그러지 못하는 나를 애써 다독였다.

그 앤을 어른이 되어 두 번 세 번 만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앤의 긍정마인드는 선택이라는 것을. 앤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그러니 나도 그때 그냥 선택하면 됐다는 것을 말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앤의 긍정이 이해되지 않은 채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한 동안은 긍정보다 부정을 선택하며 살아왔다.

이제 나는 책을 읽는 어른으로서, 앤을 자주 만났고 우린 친구가 되었으며, 앤은 나에게 긍정을 선택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길에는 언제나 모퉁이가 있다.

툴툴대며 돌아도 만나지는 모퉁이에서 나는 긍정을 선택함으로 다음 모퉁이까지 가는 길이 호기심 천국이 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저 모퉁이를 돌아가면 무엇이 나올까? 궁금하기도 하고, 이 모퉁이만 돌면 다 온걸 거야. 희망하기도 한다.

"어떤 일이든 기대하는 데 그 즐거움의 반이 있는걸요. 혹시 일이 잘못된다 해도 기대하는 동안의 기쁨은 누구도 뺏을 수 없는 거예요. 전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쪽이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앤이 나에게 알려주는 긍정을 선택하는 방법이다.

바로 기대하는 것,

오늘의 나보다 더 나은 내일의 나를 기대하는 것, 봄이 오면 꽃이 필 거야 기대하는 것, 여름이면 올해의 바다는 또 얼마나 시원할까 기대하고 가을이 되면 선선해질 날씨를 기대하고, 겨울이면 펑펑 함박눈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


어린 소녀의 소녀에 대한 동경은 어른이 되어서야 현실로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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