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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쵸로롱 Oct 12. 2024

우엥, 나 왜 ADHD?

가을은 누워서 휴대폰 속 화면을 통해 도파민을 채우기 참 좋은 계절이다. 알고리즘의 파도는 나를 전혀 관심 없는 드라마의 스토리를 줄줄 읊게 했고, 최애 연예인을 2주에 한 번 갈아타게도 하며, 갑자기 글루타치온이 나에게 얼마나 좋은지 설명하기도 한다. 나는 파도를 타지 못하는 서퍼라서, 바다에 흠뻑 빠졌다가 죄책감이라는 튜브를 타고 너덜너덜 겨우 나오곤 한다. 오늘은 그 알고리즘이 나에게 “ADHD가 궁금하지 않아? “라며 나를 덮쳤다. ADHD 따위가 나의 도파민을 채워줄리가 없다. ADHD는 나에게 그저 정신없이 구는 아이들을 보며 사용하는 단어일 뿐이었다. 나의 욕구를 채우려면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리플리 증후군 같은 매운 소재를 가져왔어야지. (나는 이미 그것이 알고 싶다를 시청하며 한동안 두려움에 떨었다.) 피드에 뜬 ADHD 콘텐츠들을 대충 훑다가 오랫동안 구독해 온 의학 유튜브 채널의 의사 선생님께서 작성한 ADHD 콘텐츠를 발견했다. 의외로 놓치기 쉬운 ADHD 증상들이라고 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교수님의 옷차림이나 머리스타일 때문에 강의에 집중이 안 된다든가, 친구들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지루해진다든가 하는 내용이었다.


마침 퇴사를 하고 새 출발을 위해 토익 학원을 다니던 나는 매 수업마다 선생님이 왜 허공을 보며 수업하는지, 귀걸이를 한쪽만 하셨네, 반바지를 입으셨네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강의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매일 카톡을 나누는 친구의 최애 아이돌 소속사 이슈나 업무적 고민 상담에도 금방 질려버린다는 점들도 떠올랐다. 나잖아..! 나 ADHD인가..? 댓글에는 많은 ADHD인들이 자신의 다양한 증상을 공유하고 있었고, 그 내용들은 낯설지 않았다. 지각, 생각의 연속, 원인 모를 멍들 등 내가 평소에 겪는 어려움과 비슷했다. 대혐오 시대에 살아가는 만큼, 요즘 ‘패션 ADHD’라는 비아냥거림을 종종 접했다. 이게 ADHD면, 전 국민이 ADHD라는 비웃음에 따라 내가 너무 호들갑 떠는 중이라는 가능성을 49%로 잡아봤다. ADHD 자가진단에서는 모든 항목에 해당됐지만, 병원에 가기 전에는 확신하지 않기로 했다. 전문의는 아니지만 이상형도 2주마다 갈아치우는 나는 매사에 과몰입했다가 쉽게 질려하는 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난 상식적으로 봤을 때, ADHD일 리가 없다. 51%도 과한 수치다. 누구나 게으른 삶을 원하지 않는가? 피곤하지만 그래도 해내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 아닌가? 많은 룸메이트를 경험해 봤지만, 내 절친한 여성 친구들 중 바닥에 누워서 생활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과 나는 꽤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조금 머쓱하지만 나도 고등학교 때 전교 3등을 해보고, 전교 부회장도 맡아봤으며, 서울에 있는 대학을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번아웃이 와서 퇴사를 했지만 회사에선 성과평가 A를 받았다. 나를 지지해 주는 친구들도 있고, 나름 침착한 편이며,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성격이다. 이렇게나 사회적 기능을 원활하게 수행하고 있는 내가 ADHD라니 믿기 어려웠다. 내 무기력은 단지 가난하고 방임에 가까운 어린 시절의 후유증일 뿐이라고 생각해왔다. 이 기적 같은 서사 때문에 난 매번 훌륭히 자란 멋진 사람이 아닌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얼렁뚱땅 덤벙 촐싹촐싹 휴먼으로 평가절하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내 말랑한 두부 멘탈은 제발 ADHD이길 빌었다. 나는 너무 게을렀기 때문이다. 보통 게으른 게 아니라 눈물이 날 정도로 끝내주게 생산성이 없다. 그날도 겨우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는데, 전날 먹은 것들이 여전히 내 식탁을 빛내고 있었다. 부지런해지고 싶은 나는 야무지게 악의 무리를 처단하고, 깔끔한 식탁을 만들어냈다. 그 성과를 축하하기 위해 소파에 누워 스마트폰을 잠시 만진다는 게, 어느새 오후 12시를 향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커피를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장고에 먹을 것은 있었지만, 다른 걸 먹고 싶었다. 그러나 퇴사 후 미래를 대비해 긴축 재정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집에 있는 걸로 뭘 만들어 먹고, 언제 치우면 3시가 될 텐데, 그때 커피를 마시면 불면에 뒤척일 나 자신이 걱정됐다. 그럼 음식과 커피를 같이 사올까 했는데, 다이어트에 도움 안 되는 저렴한 음식이라는 또 다른 의견이 결정을 방해했다. 밥을 먹고 커피를 한잔 하려면 적어도 다섯 가지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최대의 효율성을 찾아야 했다. 결국, 나의 뇌는 시원한 바람, 푸른 하늘을 보며 누워 있는 나를 액체 괴물처럼 만들었고,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그러다 보니 5시가 되고, 커피는 포기해야 했다. 강렬한 배고픔에 대충 점심 겸 저녁을 먹었다. 하루종일 소파에 누워있던 주제에 불만족스러운 식사까지 한 나는 탄수화물, 지방, 나트륨, 알코올로 버무려진 야식 지옥 형벌을 받았다.


단순한 일상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좌절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렇게 살다가 취직은 언제 하고, 내 행복은 언제 찾지? 제발 내가 그저 그냥 게으른 인간이 아니길 바랐다. 갓생, 미라클 모닝, 파이어족도 하고 싶었고, 의지박약 인간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번아웃으로 이미 항불안제를 처방받은 경험이 있는 나는 어렵지 않게 병원으로 향했다. “선생님 저 ADHD인 것 같아요. 근데 그냥 게으른 사람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혹시나 해서 왔어요..!” 내 변명 같은 주절거림이 무안했다. 몇 장의 ADHD 검사지와 의사 선생님과의 대화 끝에 나는 ADHD를 진단받았다. 정신과는 이름만 무섭지 진료는 내 기대보다는 비교적 쿨하다.


ADHD 너 누구니..? 왜 서른 살이 되어서야, 갑자기 나타나니?


설마설마했지만, 진단을 받고 나니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평생을 모르고 살다가 이제야 그 존재가 드러났다. 내가 힘들었던 건 왜 알코올 중독인 아빠 때문도, 가난한 집안 때문도 아니고 바로 너 때문이었던 걸까? 내 인생에 무임승차하던 ADHD를 마주한 순간, 내가 알던 나는 사라진 듯한 기분이었다. 갑자기 프랑스인이 된 기분이랄까. 이제까지 가짜인 나로 살아온 것 같았다.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ADHD 약 콘서타 18mg을 삼켰다. 밥을 먹었고, 커피를 사왔다. 각성 효과 때문에 절반만 마셨지만, 그날 나는 잠들기 전까지 한 번도 눕지 않았다. 인생 처음으로 내 뇌는 평온함을 느꼈다. 나는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함을 체감했다. 눈치 없던 ADHD야, 그래.. 잘 지내보자..



*ADHD의 진단은 전문가를 통해 받으시길 바랍니다. 약물 효과 역시 개개인마다 편차가 있으니, 전문가의 처방에 따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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