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와 지각, 그거 어떻게 안하는 건데?!
시간 약속은 어른이라면 기본 소양이다. 이 사회 시스템은 어쩌면 지각하지 않는 성인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지각하면 생활기록부에 기록되고, 벌점이 부과되며, 벌로 청소를 하고, 반성문까지 쓰게 된다. 남의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들, 지각은 문제아, 불성실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나는 슈퍼 울트라 핵 폐기물 미세 플라스틱 쓰레기다. 보통 늦는다. 절친한 친구의 결혼식에도 늦어서 신부대기실에서 사진도 못 찍고, 대학 동기를 홍대 길바닥에서 한 시간 기다리게 하기도 했다.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진지한 조언 “너 이제 이러면 안 되는 나이인 거 알지?” 그리고 착한 친구들의 극심한 인내를 담은 용서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 사회적으로 고립되었을 것이다.
지각하고 싶지 않다. 정말 진심이다. 약속 시간 1시간 전에 일어나도 6시간 전에 일어나도 늦는다. 지각하는 일과를 소상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일찍 일어나면 그 부지런함을 핑계 삼아 보람찬 일을 한다. 청소를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한다. 여기까지는 갓생이다. 그리고 이제 그 일에 정신을 팔린다. 내 정신은 단 돈 500원! 싸다 싸! 미뤄왔던 빨래를 돌리고, 선반 아래 먼지까지 닦는 대청소에 심혈을 기울인다. 상쾌함에 취해 외출 준비를 대충 하기로 한다. 아, 이렇게 살림도 잘하는 나는 씻고 머리 말리고 화장까지 단 30분이면 다 하지!
그러다 빨래 너는 일정을 고려하지 못해 외출 준비 30분은 다급한 외출 준비 23분이 된다. 겨우 씻고 나온 나는 5분 안에 출발하지 않으면 무조건 지각이라는 비극적인 현실에 놓인다. “오, 뭐 됐네.. 하나님.. 저는 이렇게 일찍 일어났는데 왜 지각을 할까요? “그저 부지런한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말이다. 머리도 대충 말리고 화장품을 부랴부랴 챙겨 출발 예정 시간 20분이 지나서야 현관을 나선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건지 내가 너무 밉지만, 이 수치스러운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 (글을 쓰는 지금, 이성적으로 말도 안 되는 스케줄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일단 지각을 하면 닥치고 사과해야 한다. 아니, 지각이 예상된다면 상황을 보고하고 도착 시간을 공유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손절당한다. 레퍼토리는 똑같다.
‘미안해ㅠㅠ 안 그러려고 했는데, 핑계지만 빨래가 너무 늦게 됐네. 혹시 근처 카페에 가 있을래? 커피 살게ㅠㅠ 죽여줘..’
카톡을 열심히 보내며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급하게 화장을 한다. 지각, 그거 어떻게 안 하는 건데..? 나의 심성 고운 친구들에게 이번 달 친구비 납부와 대역사죄로 수습을 해본다. 가끔 그 외의 약속에서는 정말 자책스러워 돌아버린다. 지각은 잘못이다. 잘 지키지 못하지만, 그 중요성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들어왔기에 잘 안다.
ADHD를 가진 나는 시간이 다르게 느껴진다. 급박한 시간 내에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지금 당장이 아니면 먼 미래로 느껴진다. 그 약속이 심적으로 부담이 된다면 더욱 고통스럽다. ADHD를 인지하기 전에 정말 이 지각하는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만의 노력을 했다. 친한 사람들에게는 내가 늦으니 제발 약속 시간 30분 뒤에 와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보통은 농담처럼 넘기는 경우가 많아 효과는 별로였다. 그리고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어렵고, 이미지도 이상해진다. ‘나 지각할 것 같으니까 너도 30분 늦게 와’라고 말할 만큼 안 친한 사람이 더 많다.
제일 좋았던 방법은 알람 라벨링이다. 씻으러 들어가야 하는 시간, 나가기 30분 전, 나가야 하는 시간(이 시간도 진짜 나가야 하는 시간 10분 전) 알람을 맞췄다. 그리고 최종 목표는 약속 시간보다 30분 전에 근처 카페에 도착하여 책을 읽는 것으로 한다. 이 방법의 팁은 알람을 설정한 전날의 나를 믿고 약속을 준비하는 현재의 나를 믿는 것이다. 이렇게 최선을 다해 알람을 맞춰놔도 약속을 준비하는 나는 “뭐 이리 일찍 알람을 맞춰놨어?“라며 착각하기도 한다. 과거의 침착한 나를 믿고 외출 준비를 하다 보면 책은 못 읽을지라도 제시간에 약속 장소에 도착한다. 펼치지도 않을 책 때문에 어깨는 무겁지만,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지각하는 게 ADHD의 증상 중 하나여서 다행이다. 내가 그저 이유 없이 게으르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듯했다.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미안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문제를 인지하는 것이 해결의 시작이다. 나는 절대 이 특성에 질 생각이 없다. 실패해도 다시 도전해야지. 매번 지각해도, 지각하지 않으려 노력한 사람은 될 수 있다. 약을 복용하고 나서는 이 감각에 조금 도움이 되는 듯하다. 무엇보다 잡생각이 사라지니 의사 결정이 빨라짐을 체감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각하지 않게 하는 약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 결국 성공해서 약속 시간 지키기 자격증 따위를 취득했으면 좋겠다.
P.S. 학생 때는 지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같은 학교를 다녔던 동생의 도움이 컸다. 문제는 동생과 등교 시간이 달라지면서였다. 어느 날 지각을 했고, 주임 선생님께서 큰 문제로 보셨다. 지각 한 번 하고 심각성을 느낀 선생님들께서 기숙사 장학생으로 추천해 주셨기 때문이다. 단순히 지각을 해서가 아니라, 지각 면담을 하다 가정사 얘기까지 나오게 됐고, 스토리가 성적은 괜찮은데 돈이 없어 기숙사를 들어가지 못하는 불쌍한 학생이 되었다. 동문들은 시골의 작은 학교라고 싫어하지만, 배운 게 너무 많은 나는 사랑하는 모교 스승님들과 볼빵빵 내 동생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
* ADHD의 진단은 전문가를 통해 받으시길 바랍니다. 약물 효과 역시 개개인마다 편차가 있으니, 전문가의 처방에 따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