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의 멈춤이 주는 깊은 쉼
새벽 4시 반.
아무 이유도 없이 눈이 떠졌다.
몸이 먼저 보낸 알림이었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서늘한 기운.
체온계에 찍힌 숫자, 38.6도.
놀란 마음에 해열제를 삼켰다.
다시 누웠지만, 잠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증상이었는데
오늘만큼은 달랐다.
이 하루가 평범하지 않을 거라는 예고 같았다.
출근 준비를 하던 중, 아내가 조심스레 말했다.
“아프면 휴가 써.”
짧게 “괜찮아”라고 대답하며
열기 가득한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사원 시절 선배들이 떠올랐다.
“아프면 출근해서 아파라.”
군대식 문화가 짙게 배어 있던 첫 직장의 공기.
그때 몸에 밴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었던 걸까.
어쩌면 지금도 그 ‘참는 방식’을 충실히 따르며 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그 한 시간은 경유지가 많은 항공편처럼 길고 고단했다.
사람들 사이엔 빈틈 하나 없었다.
어깨와 어깨가 맞닿은 출근길.
평소엔 무심히 지나치던 풍경이
오늘은 묘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마치 길을 잃은 강아지처럼
지하철 구석에 몸을 기대며 작은 쉼터를 찾았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에 갔다.
목은 부어 있었고, 인후염에 고열, 몸살까지 겹쳤다는 진단.
약을 복용했지만 증상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오후 반차를 내고 조용히 퇴근하기로 했다.
말 없는 몸이 그 어떤 말보다 단호하게 나를 설득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쉬어야 해.”
점심 시간대의 지하철은 오전과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사람들은 여유롭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표정엔 느긋함이 배어 있었다.
나도 조심스럽게 빈자리에 앉았다.
퍼져오는 약기운에 몸을 맡겼다.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
그 감각을 거스를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잠깐이라 생각했지만
눈을 떠보니 어느덧 40분이 흘러 있었다.
창밖엔 익숙한 터널과 조명이 스쳐 지나갔지만
내 마음은 그 순간 어딘가에 멈춰 있었다.
문득 떠오른 생각.
잘 잤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온전한 만족감이었다.
그동안 수면은 있었지만 쉼은 없었다.
자고 나도 풀리지 않던 피로,
반복되는 고민 속에 머무르던 마음.
결국 몸이 망가지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쉬는 법을 배웠다.
마음보다 먼저 무너진 몸이
오늘 나를 대신해 말을 건넨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무언가를 짊어지고 산다.
책임이든, 불안이든, 혹은 말하지 못한 감정이든.
하지만 그 짐을 잠시 내려놓는 용기 또한
삶의 한 방식이 아닐까.
억지로 끌고 가는 것만이 성실함은 아니다.
어쩌면 ‘쉼’이라는 선택이야말로
삶이 우리에게 허락한 가장 다정한 자유일지 모른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 자유에
조용히 기대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