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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돋움 Jul 06. 2023

노안이 찾아왔습니다.

오랜만에 혼자 맞은 저녁이라 나는 가장 맛있으면서도, 손이 덜 가고, 간편하게 한 끼 해결이 가능한 라면을 끓이기 위해 찬장을 열었다. 

찬장 속엔 왼손이나 오른손 아무 손이나 비벼달라는 놈, 볶아서 먹되 불나는 닭맛이 난다는 놈, 매운데 진국이라는 놈, 옛날부터 무난하게 터를 잡아온 양이 세 마리인 놈이 있길래, 무난한 놈으로 낙점한 뒤 물을 끓였다.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면 면과 수프를 넣고, 적당히 꼬독한 면발이 되면 불을 끈다. 그리곤 오른손은 냄비의 긴손잡이를 왼손은 냉장고에서 방금 꺼낸 김치 통을 집어 식탁에 내려두고 흡족한 마음으로 가부좌를 튼다. 

결혼 전엔 나를 위해 정성스러운 밥상을 차렸던 적도 있었다. 요리할 메뉴를 정하고,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이쁜 그릇을 찾아 담고, 천천히 식사를 하며 그 시간을 즐겼다. 물론 지금의 내가 요리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더 열심히, 자주, 사력을 다해 요리를 하고 있다. 내가 아닌 가족을 위해서...

지금은 나를 위해선 요리하지 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를 배려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더 큰 배려가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탱탱한 면발이 붇기 전에 후루룩 흡입해야 하는 게 라면에 대한 예의.

젓가락을 양껏 벌려 면발을 집어 올린 후 눈을 감고 후~ 분다. 시장기가 한 창 돌 때 라면 냄새만큼 매혹적인 냄새가 또 있을까? 뜨거운 김이 한 풀꺾인 라면을 입안에 욱여넣기 바로 전! 시선이 머문 코끝 언저리 너머 희뿌옇게 번진 물체가 눈앞에 떡하니 버티고 섰다. 나는 이 순간. 실험실 연구원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한 결과가 필요했다. 정확한 물체의 형태가 포착될 때까지. 1cm씩. 코끝에서 떨어 뜨려 본다. 5번을 움직여도 여전히 번져있고, 흐릿하다. 점점 더 조금씩 코끝에서 물체를 떼어내 본다. 15cm쯤 떨어졌을 때 젓가락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탱탱한 라면 면발이 짠! 정확하게 나타났다.

 

라면맛이 갑자기 똑 떨어진다. 면발을 집어 올린 젓가락을 라면그릇에 다시 쑤셔 박았다.


최근 들어 노안이 많이 진행되는 것 같다. 노안은 마흔이 넘으면 급속히 진행된다는데... 이제 나도 온몸 여기저기서 나이 듦을 표현하는 증상들이 허락도 없이 불쑥 뿔쑥 찾아와 불청객을 맞이하는 나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치과치료에도 때우는 정도가 아니라 임플란트를 고민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과한 운동을 하고 난 후엔 여지없이 관절 여기저기 파스를 붙여줘야 하며, 아무리 운동을 해도 근육량이 좀처럼 늘지를 않는다.  

대체 나이 들면 좋아지는 게 뭘까? 무엇이든 다 장단점은 있을 텐데. 


예전엔 나이 들면 연륜이 쌓여 마음이 한없이 넓어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주위의 어르신들을 보면 평생 동안 지켜 온 가치관에 경험의 확신까지 더해진 데다, 이 나이가 되면 이 정도 대우는 받아야 한다는 근거 없는 고집과 아집까지 더해져 대화조차 쉽지 않은 분들도 주위에서 쉽게 보게 된다. 나 또한 후배나 어린 동생들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연륜이나 경험이 조금이라도 묻어나는 대화는 바로 꼰대로 직결되는 걸 잘 알기에 못 본 척, 못 들은 척, 지나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 나아가, 나이가 들면 발전을 바라긴커녕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착실하게 올라오는 새치를 감추기 위해 염색약을 홈쇼핑으로 꾸러미체 쟁여놔야 하고, 깊이의 끝을 모르게 패이는 주름을 막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피부가 과식할 만큼의 에센스, 로션을 푹 퍼올린 피부에게 간절히 호소하며 쳐댄다. '제발 좀 펴지라고!' 

젊었을 때 당연했던 것들은 유지라는 어렵고 고달픈 목표아래 고고한 척 물 위를 노니는 백조의 발놀림처럼 처절해진다. 하긴, 유지되기만 해도 다행이다. 이제 서서히 그 기능이 퇴행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 뛸 수 없는 관절을 마주하게 될 것이고, 성인병을 치료하기 위한 약을 한 움큼 집어 꾸역꾸역 삼키고 나서야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될 것이며, 결국은, 내 손으로 숟가락과 젓가락을 들 수 없는 시기에 까지 이르겠지...


라면 먹으려 면발한번 들어 올린 것뿐인데, 흐릿해진 라면 면발에 침울했다가, 그래도 아직까진 내가 픈 젓가락 숟가락이 나를 먹여 살려 주고 있는 것에 조금 안도한다. 


나는 이제 아름답게 나이 드는 법에 대해 고심해야 할 시기가 된 것 같다. 어떻게 해야 점점 하향곡선으로 흘러가는 나의 신체리듬을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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