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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혜진 Mar 21. 2024

열 아홉의 축복

날카로운 첫 요가의 추억

당장 무엇을 완성하려는 마음이 날 힘들게 했고 다치게 했다. 오늘도 멈춰있는 것처럼 보이고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처럼 보여도, 나는 오늘도 살았고 호흡했고 수련했다. 매트 위에서 알아차렸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았고 천천히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길게 보고 포기하지 말자. 하루 아침에 완성되는 건 없다.
(2017년 7월 18일 수련일기 중)



수능이 끝난 직후, 고3 12월부터였다. 막연한 이끌림이었다. 요가원 가기엔 부담스럽고 마땅히 배울 곳도 몰라 당시 잠실 종합운동장에서 진행하는 '요가' 프로그램을 수강 신청했다. 한 달에 8만원, 1주일에 1회 50분, 2만 원 꼴이었다. 굳이 종합운동장을 찾은 까닭은 열 아홉 소녀에게 '종합운동장'야말로 서울 최대 스포츠 컴플렉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생애 첫 내돈내산 요가는 운명처럼 평생 함께하게 된다.


매주 토요일 오전 여덟 시, 종합운동장 마루 바닥에서 요가를 했다. 당시 함께 배우던 수강생 분들의 평균 연령은 추측컨대 75세쯤 됐던 것 같다. 한겨울에, 그것도 토요일 아침에 요가 수업을 신청한 열 아홉의 패기를 예찬한다. 버스도 타야 해서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을 텐데 왜인지 귀찮은 줄도 몰랐다. 그저 패딩 주머니 속 언 주먹 꽉 쥔 채 요가 가던 그 날 냄새가 지금도 생생하다. 벌써 십 삼년이 되었다.


첫 인상은 흡사 수련장이라기보다는 목욕탕 같았다. 여탕에 보면 항상 제 방인듯 편 자리 잡은 안주인 무리가 있기 마련인데 이곳도 그랬다. 꼭 십 년은 수련했을 것 같은 할머니들이 각자 자리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몸 푸는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굽고 마른 몸으로 접고 비틀었다. 여느 할머니 같이 앓는 소리도 없었다. 마루 바닥엔 난방도 들어오지 않았고, 듬성듬성 배치된 라디에이터만 윙윙댔다. 천장은 높고 공기 찼다. 포근한 요가원, 다정한 분위기를 기대했는데...삶은 내 맘 같지 않은 법이다.


사바아사나에서는 패딩을 단단히 껴입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서늘한 냉기 때문에 온몸이 뻣뻣이 얼었다. 길게 쉬진 않았던 것 같다. 3~4분 정도 쉬었을까. 긴장이 채 풀리지 않은 상태로 '나마스떼'와 함께 수업이 마무리됐다. 행여나 할머니들이 말을 걸까 싶어 매트를 정리하곤 서둘러 체육관을 빠져나왔다. 얼떨떨하고 강렬했다. 요가하기에 썩 좋은 환경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돌아오는 버스에서 어쩐지 이걸 계속해야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요가를 계속해야겠다고.


달 정도 다니니 스무 살, 봄이 되었다. 선생님의 등록 안내 문자에는 제가 대학생이 되어 당분간 꾸준히 요가하기는 어려울 같다고, 그동안 감사했다는 인사를 보냈다. 그 해 봄을 물들인 건 건축학개론과 벚꽃엔딩이었는데, 신입생의 오감을 자극하기에 모든 것이 완벽했다. 재수를 하네 마네 하던 게 무색하리만큼 완전한 대학생이 되었다. 취미가 뭐냐는 선배와 동기들의 질문에는 '요가'라고 답했다. 요가가 취미라고 얘기하면 반응들이 실로 재밌어서 사람들과 친해지기에도 좋았다. '요가하는 애'는 희소했고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 인식되는 게 꽤 마음에 들었다.


요가를 계속 해야겠다고 다짐하던 열 아홉 혜진은 본인이 어떤 소용돌이에 휘말린건지 미처 알지 못한 채 직관을 따르는 삶에 힘껏 뛰어들기로 한다.




최근 제주 수련을 갔을 때의 일이다. 저녁 수련 후 식사 자리에서 옆자리에 앉아 계신 선생님 왈, 나이가 어려보이시는데 어떻게 요가원까지 차린 거에요, 물으셨다. 나는 너무 일찍 요가를 알아버리는 실수를 범해서, 라고 대답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잘못 걸려도 제대로 잘못 걸린 것 같았거든. 한 서른 중후반쯤 만났으면 참 좋았을 텐데 어쩌다 열아홉에 만나서 이리 지독하게 얽힌 건지 때때로 원망스러운 날도 있었다. 차라리 요가를 몰랐다면 쉽고 빨랐을 것도, 요가를 아는 바람에 너무 멀리 돌아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수라뇨, 축복이죠."


선생님은 현재 군산에서 요가원을 운영하고 계시고, 마흔이 다 되어 요가를 알게 됐는데 더 일찍 요가를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싶다고 하셨다. 어린 나이에 요를 알게 된 사람들을 보면 꼭 선택 받은 사람들 같다고, 그건 축복이라며.


선택과 축복이라니. 한국에서 요가를 업으로(까지) 삼는 건 스스로 비주류를 자처하는 길이다보니 '축복'이란 말은, 이 일을 한 이래로 처음 듣는 표현이었다. 요가가 직업이 됐을 때 가족도 친구들도 의아해하며 취미로 계속 하면 될 걸 뭐하러 굳이 강사가 되려 하냐고 했으니까. 요가강사란 마치 없는 애인처럼 나는 그를 진실로 사랑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자랑스럽게 여기긴 힘든 어떤 것이다.


그러나 열 아홉에 요가를 만난 건 진짜 축복이었다. 낭만과 죽음의 시절이었던 이십대를 생각해보면 요가라는 치트키 없이는 사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것 같다. 그 때 요가를 안 덕분에 이후에 닥친 고통들을 지나갈 수 있었다. '나'에 매몰되어 있을 땐 몰랐는데 바깥에 서니 보인다. 삶이 아무리 괴롭고 무자비한 것 같아도 고통을 지나갈 힌트를 반드시 함께 쥐어준다. 모든 일은 일어나야 할 때에 알맞게 일어난다. 나의 요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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