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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콤불닭순한맛 Aug 08. 2022

무비토크 #9. 그린 나이트

모험, 아일랜드/캐나다/미국/영국, 2021 개봉, 감독: 데이빗 로워리


영화 그린 나이트는 영국 5-6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을 모티브로 하지만 사실 그 이야기를 잘 모르더라도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다.

오히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아서왕이 아니라 그의 조카 가웨인인데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 인상 깊은 연기력을 보여준 데브 파탈이 연기했다. 뭔가 선함과 악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듯한 깊은 눈을 가진 그의 이국적이면서도 동양적인 마스크는 동화적인 이 영화와 묘하게 어우러진다.



가웨인은 왕의 조카지만 쾌락을 좇는 변변치 못한 인물로 등장한다.

크리스마스이브, 아서왕은 원탁의 기사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놓고 멋진 영웅담을 하나 들려달라고 이야기한다. 그 와중에 신적인 존재 그린 나이트가 등장하고, 그는 부와 명예를 줄 테니 자신에게 어떤 행위를 가해도 무관하지만 정확히 1년 후 녹색 예배당에 찾아와 그 행동을 똑같이 돌려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다. 가웨인은 그린 나이트와의 약속을 담보로 한 대결을 펼치게 되고 결국 그린 나이트의 머리를 베어버리며 누구도 되돌릴 수 없는 운명의 시간은 그렇게 시작된다.



전체적인 스토리가 굉장히 판타지스럽고 잔혹 동화 같은 분위기지만 배경은 오히려 애니메이션이나 그래픽의 효과가 화려하고 스펙터클 하지 않는(마블 영화처럼) 중세의 느낌이라 개인적으로 그 부조화가 오히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가 그린 나이트를 만나러 가는 모든 여정 중 겪게 되는 일들은

우리가 흔히 영화나 책에서 보았던 주인공의 길고 긴 험난한 여정을 거치며 못된 악인이나 괴물들을 물리치고 결국엔 온갖 고생 끝에 무언가를 성취하게 된다는 식의 스토리라인과는 정 반대로 흘러간다는 점이 재미있다.

가웨인은 그린 나이트를 만나러 가는 도중 심하다 싶을 정도로 계속 실패하고, 배신당하고, 시련이 닥치고, 수수께끼와 같은 비밀들과 유혹들로 두려움과 혼란 속에 사로잡힌다.  


주고받는 형식으로 흘러가는  영화를 받치는 굵직한 사건들 속에서 가웨인은 도덕적으로 실패한 인간, 용맹함을 증명하지 못한 인간, 온갖 유혹에 휘둘리는 나약한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린 나이트를 만나게 되어 목을 내놓는 순간, 그는 자신을 여러 가지 위해로부터 보호해준다는 마법의 녹색 허리띠를 비로소 포기하고 죽음에 이르는 공포에 자신 스스로를 밀어 넣음으로써 자신이 선택한 운명 앞에 놓인 진정한 길을 선택하게 된다.


이는 목숨에 대한 집착, 인간의 유한함을 회피하기 위한 주술적 도구에 집착하는 나약함에서 탈피하여

결국 인간은 죽음에 이를 운명임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려는 의지와 두려움을 넘어선 도전을 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것이랄까.


무릎을 꿇고 앉아 그린 나이트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가웨인의 모습이 역설적이게도 승리자처럼 보였고

위대해 보였다. 그 장면이 한동안 잊히질 않는다.



그리고  영화에는 다양한 복선과 무언가를 암시하는 장치들이 많은데 그것들에 주목해서 영화 전반을 감상하는 것도 좋은 포인트가   같다.

하나는 이 현명하고 귀여운 여우!

여우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곰곰 생각해보며 영화를 따라가는 것도 좋은 포인트가 될 것 같다.


작년에 보았던 영화지만 리뷰를 위해 오랜만에 다시 보았는데도 여전히 여운이 길고 눈이 호강하여 만족스럽다. 그린 나이트와 비슷한 결의 여운을 주는 또 다른 영화를 기대하는 즐거움도 빼놓지 말고 즐겨야겠다.


동화적이면서 철학적인 주제를 함축하는 영화를 보고 싶은 분들께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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