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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셜리 Aug 31. 2022

무연고자 장례




무연고 처리를 부탁한 등기를 보낸 후 매일 고통스러워했다. 하루 이틀 정도는 무너지는 마음을 잡고 괜찮다고 여겼다. 하지만 3일 차 핸드폰에 작은 진동 하나하나에 온 신경이 쏠려 모든 알림이 내가 기다리는 연락 같아서 빠르게 확인해보면, 평소 신경도 안 쓰던 앱의 알림이었다. 미세한 진동이 울렸다 느끼면 여지없이 핸드폰의 알림을 확인했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없었다. 신경이 곤두서 알림이 울린 것 같아 확인해보면 그 흔한 앱 알림도, 아무것도 없을 때가 많았다. 내가 보낸 시신 처리 위임서는 5월 10일에 담당자에게 전달이 됐다. 앞으로 5월 17일 화요일, 대략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남았다. 제발 그 안에 이복오빠가 서류 접수해 빠르게 절차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소식이 없고 나는 1분이 5년처럼 흘러갔다. 밤이 되면 한 없이 무너져 밤마다 어찌할 수 없는 답답하고 속상한 감정에 숨통이 조여 오는 것 같아 울어야 핬다. 왜 그리 좌절하고 슬퍼했을까 생각해보면 나의 무능력과 아빠의 죽음에 비참한 사연이 있어서 날 옭매였다. 원했던 일은 내가 직접 장례 의식을 치러 유골함을 받아 어디 납골당에 묻어 감사하다고 인사 한 번 하고 싶었다. 결국 고모의 간곡한 설득에 어쩔 수 없이 무연고 처리를 한 것이 내 마음에 무게가 느껴졌다. 밤이 되면 미안한 마음과 혹시나 장례 후 아빠의 유골이 다른 분들과 같이 아무 산에 뿌려지면 어떡하나 그 생각에 괴로워했다. 기나긴 날짜는 정해졌으나 기약 없는 부고 연락에 통곡해야 했다. 아프고, 아프며, 미치도록 울어도 속이 풀리지 않았다.


고모도, 나도 이복오빠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그쪽에서 어떻게 나올지 예상되지 않아 기약 없는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날 설득하는 전화 이후,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고모는 고모 나름대로 삶이 있고 나는 20년이 지나 만난 고모에게 아빠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 어려웠다. 최대한 빨리 무연고로 확정되어 장례가 이뤄지길 서원했지만, 예상보다 길어지는 시간들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아 심한 두통과 어지럼증에 일상생활이 불가능했다. 미용학원에 와도 핏기 없는 얼굴로 질려 식은땀을 흘리며 아파서 밖으로 나와 누워 있다 괜찮아지면 수업을 듣고 입맛도 없어서 깨작거렸다. 밤이 되면 생각보다 크게 밀려오는 후회가 날 휘감아 눈물을 흘리며 막연한 기다림에 점점 미쳐가고 있었다. 이렇게 아파하고 죽은 사람처럼 생기를 잃어가며 삶의 희망을 놓고 살 줄 알았다면 모든 부담을 내가 안고 나를 위해서라도 무연고 처리가 아닌 인계받고 장례를 치를 것을, 미치도록 후회하며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4일이 지나고 5일 차가 돼도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매일 시간 날 때마다 사망신고 처리가 됐나 확인했지만 서류상으로는 살아계시고 있었다. 그게 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아빠의 사망일자와 관련된 이야기도 날 힘들게 했는데 발견된 지 한 달이 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고 서류에선 살아 있지만 차가운 안치실에서 장례가 이루어질 때까지 나오지 못하는 현실을 생각하며 매일 밤을 자지러지게 슬퍼하며 괴로워했다. 날 더 미치게 만들었던 건 인계받으려 장례식에 전화해 통화했던 사람이 개인 번호로 밤 11시에 전화해 빨리 처리해달라고, 아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대체 이야기 전달은 하긴 했냐고 따지는 말투에 무너져 버렸다. 나도 이복 오빠, 그 아들이라는 사람은 대체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싶고 따지고 싶은 사람은 ‘나’였다.


친아빠가 아무리 미워도 이렇게 잔인하게 서류도 보내지 않고 가만히 방치하고 할 수 있냐고 멱살이라도 잡아 흔들고 싶었다.


등기를 보낸 후 매일 밤 울다가 지쳐 잠들었다. 누구에도 이야기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이별의 아픔과 슬픔의 무게에 오전, 오후엔 극심한 두통과 어지럼증으로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다 약으로 버티거나 멍하니 바닥만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학원 진도를 놓쳐 아무것도 배우거나 할 수 없었다. 긴 시간을 연락만 기다리며 핸드폰이 울리면 미친 애처럼 날뛰다 실망을 반복해 건강에 적신호가 떴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태가 심각해 단순한 어지럼증을 넘어 벽 짚고 걷지 않으면 넘어질 것 같은 위험을 느꼈다. 수요일, 무연고 처리 확정까지 대략 일주일이 남은 날 결국 병원을 왔는데 나이에 비해 통증 정도가 심하고 빈혈 수치도 낮아 정확한 진료와 치료를 위해 5일 동안 입원하라는 의사의 명령이 떨어졌다. 평소라면 당연하게 입원하고 검사와 치료를 받았겠지…, 지금은 그럴 수 없다. 5일은 너무나 긴 시간이다. 당장 이복오빠가 서류를 접수해 언제 장례 연락이 올지 아무도 모른다. 입원 중에 연락을 받으면 갑작스럽게 퇴원할 수 없다. 많은 고민 끝에 결국 아파도 참으며 아빠의 장례를 기다리기로 해야 했다.


평생을 만나지도 못하고 4~5살 본 민증 속 얼굴 선을 알고 있다고 해도 정확히 친아빠의 얼굴인지도 모르는 내가, 응급이라고 생각해 5일이라는 입원 명령을 거절한 것에 대해 멍청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만큼 나는 제대로 된 장례식을 보고 아빠에게 쓴 편지를 건네는 것으로 작별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아빠가 날 버리고 떠난 것인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날 태어나게 해 준 아빠가 그리 외롭고 차갑게 돌아가셨는데 외면할 수 없었다. 건강이 중요하고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도, 정신건강이 더 좋지 않다면 나중에 이보다 크게 아플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안다. 매일을 하루가 10년같이 흘러가는 것처럼 느릿느릿 갔다. 모르는 전화만 오면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들고 달려 나와 전화를 받으면 실망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무연고자 확정까지 대략 3~4일 정도 남았을 땐 ‘아, 이복오빠는 서류를 나지 않겠구나.’ 확신이 들었다. 참 밉다, 얼굴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이렇게까지 잔인할 필요는 없다 느껴지는데 뭉개진 마음으로 원망한다. 위로해줘도 받을 여유가 없을 만큼 아빠의 정례만 머릿속에 가득 찼다.


무연고라는 특수성과 아빠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까지 무엇 하나 아픔의 무게를 이해해줄 사람이 없었다. 내가 살아온 삶이 너무 특별하다고, 남들과 다르다고 느꼈지만 친아빠의 사망까지 남들과 다를 필요가 없는데…, 신은 꼭 내게 그래야만 했을까? 이리도 모질게 나를 궁지로 내몰아야 했냐고 하늘에 외치고 싶었다. 끝까지 이복오빠가 서류를 줄 것이라고 작은 믿음을 가지고 느리게 흐르는 하루를 견디다 금요일 밤이 되었다. 이제는 마감 기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무연고자 확정으로 장례식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겠구나 그 마음이 들자 죽음과 이별, 긴 기다림이 이리도 허무해 정신이 흔들려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서류 접수 마감 날짜인 월요일이 지나 수요일쯤 구청 담당자에게 전화해 친아빠의 성함을 이야기하니 역시나 바로 ‘나’라는 것을 알아차고 이야기해주셨다.


-선생님, 오늘부로 무연고자 확정됐습니다. 국가에서 무연고로 장례 의식이 치러질 거고요~, 장례가 이루지는 동안 보실 수 있으세요. 차례가 되면 아마 선생님의 연락처로 연락이 갈 거예요, 꼭 연락받아주세요.


짧은 대답과 감사하다는 말로 전화가 끊겼다. 무연고자 확정됐다는 말을 듣고 담당자와 연락하면서 한 가지 느낀 것은 이제는 구청의 관활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무연고자 장례 의식을 해주는 곳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알아차리고 또다시 길고 긴 기다림이 시작됐다. 무연고자 확정 전에는 1분이 5년 같이 흘렀는데 이젠 하루가 3년처럼 흘러 지겹고 힘들다. 언제 어떤 번호로 내게 연락이 올지 나는 모른다. 막연한 기다림이 반복되면서 학원에서 같은 교육생분들이 내 건강을 걱정하기 시작했는데 내 사연은 모르고 갈수록 창백해지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어서 큰 병원에 예약하라고 애정이 담긴 잔소리를 하셨다. 처음보다 점차 나빠지는 건강상태에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예약을 했다. 내 머릿속에 가득 찬 꽉 막힌 듯 답답한 마음과 언제 장례 연락을 받을까 하는 생각이 가득 차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는 것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먹지 않아도 살이 빠지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무연고자 확정이 됐다는 말을 듣고도 3일이 지났지만 연락이 없다. 여전히 나는 작은 알림이나 진동에도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여러 차례 확인하고 실망하고 반복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미어져 자꾸만 가슴속에서 피가 쏟아지는 것 같아 손으로 막아보려 해도 새어 나와 눈을 질끈 감았다. 숨이 점차 차오르고 멍하니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힘든 건 ‘나’였다. 아무도 내 감정을 대신 느낄 수도, 공유할 수도 없다. 온전히 나만 아는 슬픔이자 괴로움이었다. 극도의 스트레스로 멘탈 잡기 힘들어서 6개월에 가까운 시간 동안 멈춘 상담을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해 바로 전화를 걸었다. 작년 은둔 청년 지원사업 신청하면서 상담 지원받아 알게 된 상담센터인데 나를 담당해주신 분이 있어 내 사정을 잘 알고 상담도 잘해주신 분이 계셔서 예약했는데 작년엔 내가 일이나 밖에 나가지 않아 시간이 여유로운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미용 학원 때문에 시간이 애매했다. 어쩔 수 없이 원하는 날짜를 토요일로 예약을 잡았다. 내가 상담 예약했다는 소식을 들은 작년이 담당하신 선생님이 다시 ‘나’를 맡아 상담하고 싶다 하셔서 평일만 가능해 시간 조율 끝에 원래 상담사 선생님으로 예약하게 됐다.


상담을 잡고 당일 날, 오랜만에 상담사 선생님과의 만남이라 어떻게 하면 내가 그동안 많이 좋아졌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 화장하기로 했다. 전 상담 때는 모두 잔뜩 우울해 모질이나 표정이 좋지 않았고 화장할 여유는 더더욱 없어 보여드린 적 없었다. 이번 올해 처음 만나는 나는 친아빠의 일로 우울하고 슬프지만, 꽤나 괜찮은 시간을 보냈다고 보여주고 싶었다. 오랜만에 뵌 선생님과 나는 이런저런 근황을 이야기하고 친아빠의 사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동안 받을 수 없던 위로를 받았고 현실적인 말을 듣고 나는 조금 슬픈 감정을 덜어낼 수 있었다. 모두가 내게 시간이 지나면 해결해줄 거라 막연하게 이야기했지만, 현재의 나는 해결해줄 시간이 흐르지 않았고 여전히 까마득한 기다림 속에서 갇혀 있었다. 전혀 위로되지 않는 말들로 위로받으니 기분 나빴다. 무연고자가 되어 국가가 치러주는 장례에 혼자라도 가겠다 이야기한 내게 아마 정신없이 보내고 많이 힘들고 괴로울 거라고, 보낸 후에도 미친 듯이 앓기만 할 수 있다고 정신 바짝 차리라고 이야기해주셨다. 막연하게 생각한 장례에 대해 현실적으로 이야기해주신 상담사 선생님께 너무나 감사했다. 그리고 얼어붙은 마음이 조금 녹았다. 이것도 하루 정도 가고 다시 기다림 속에 시간을 보냈는데 점점 심해지는 불안증으로 괜찮았던 공황발작과 우울로 정신을 잃었다. 쌓여가는 우울과 불안, 공황은 결국 토요일 밤, 완치되었던 해리 증상이 나타나면서 혼미해졌다. 나는 누워 있는데 저 멀리 ‘나’ 아닌 내가 주방에서 칼을 꺼내 쓱, 긁으며 자해를 하고 있었다. 내게 몇 번째 칼을 꺼내 손목을 그으면 더 깊고 아주 아프게 자해할 수 있다며 속삭여 놀라 자지러지게 울고 또 울며 안정제를 꺼내 먹어도 안정되지 않았다.


이러면 안 돼, 이렇게 있다간 진짜 자해를 할 수도 있어!


저 멀리서 나를 유혹하는 미친 ‘나’를 보며 곧 자제력을 잃을 것 같아 머리를 잡아 뜯었다. 어쩌지, 어떻게 하지 계속 고민하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대책이 필요하다. 고민의 고민을 걸쳐 결국 늦은 밤 ‘바다’ 단어가 떠올라 그래! 가자! 마음먹고 평소 좋아하던 필름 카메라를 일회용 2개를 사고 밤을 새 새벽 첫 고속버스를 타고 속초로 떠났다. 바다를 좋아하지만, 제대로 바다 여행을 떠난 적은 없다. 생에 처음으로, 그것도 계획 없이 혼자 여행한다니 그만큼 나는 사고 치지 않고 잠시라도 안정을 찾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속초를 도착해 바다를 걸으며 필름 카메라로 여기저기 찍으면서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속초의 모든 관광 요소는 전부 걸어서 다녔다. 운동화를 신고 걸었음에도 뒤꿈치가 까질 정도로 속초의 곳곳을 걷고 또 걸어 잠시라도 기다림의 고통과 우울을 바다에 던지고 싶었다. 새로 꺼낸 양말이 구멍 나고 발이 아파도 걷고 나니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속초 저 구석에 있는 유명한 카페에 앉아 한참 동안 풍경을 보고 나서야 고속버스를 타고 집에 올 수 있었는데 버스 안에서 눈물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스쳐 지나가는 창문 밖을 보며 사색에 잠기다 핸드폰이 울렸다. 02로 시작된 번호라 화들짝 놀라 조심스럽게 받았는데 실망감에 눈물이 차올랐다. 며칠 전 문신과도 같았던 어릴 적 단발머리를 아빠에게 보여주고 싶어 비싼 커트 예약한 미용실에서 온 연락이었다. 코로나로 예약을 취소해야 할 것 같다며 온 전화, 일요일 밤 9시가 다 되어가는 늦은 시간에 장례 연락이 올 일은 없다. 머리는 알아도 마음은 그렇게 여겨지지 않나 보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간절한 내 마음을 재차 깨닫고 나니 미치도록 비참해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서 소리 없이 펑펑 울어야만 했다. 나는 연락을 무작정 기다리고, 울고 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 그리도 간절한 마음을 확인하고 나니 월요일이 되자마자 탈탈 털린 멘탈로 이성의 끈을 잡고 미친 듯이 검색하기 시작했다. 무연고자 장례에 대해, 아빠의 장례를 이루어지는 곳을 찾고 고객센터 연락처를 미친 듯이 뒤지고 또 뒤져 2018년도 뉴스로 번호를 알아낸 뒤 4년이나 지난 뉴스에 적힌 전화번호라 혹시나 하는 간절한 마음을 전화를 걸었다. 딸깍, 작은 소리와 함께 안내 멘트를 듣고 돌아가신 아빠의 성함과 관계를 이야기했다.


- 아, 잠시만요! OOO님, 곧 장례 안내에 대한 부고 문자 갈 거예요! 부고 연락 어떻게.. 원하시는 걸까요?


받기를 원한다고 대답한 후 간단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아직 순번이 오지 않아 대기 상태이며 앞의 무연고자분들의 장례가 이루어지고 날짜가 확정되면 문자로 부고에 대해 전달할 예정이고 자세한 내용은 부고 문자 참고 부탁한다고 말씀해주셨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빠의 순번이 아직 많이 남았냐고 묻자 무연고자가 많지 않아 곧 연락 줄 거라는 대답을 들으면서 전화 주신 번호로 연락 남기겠다고 해줘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하기 전엔 매일 ‘무연고자 장례’ 검색해 뉴스에 나오는 이름을 보며 아빠의 이름이 있길 기도했었다. 뒤지고 뒤져서 겨우 나온 전화번호로 전화해 들으니 숨통이 아주 작게 터지는 것 같았다. 3~4일 후 오전 10시가 넘어서 부고 문자를 받고 기다리던 연락에 다행이라는 안심이 들면서 소리 없이 울고 또 울었다. 3주가 넘는 시간 동안 이 연락 하나 때문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매일 기다리며 희망고문처럼 느끼고 마음 졸였던 모든 순간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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