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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셜리 Aug 29. 2022

예고 없이 받은 등기





아빠의 무례한 외모 지적에 화내며 내 감정을 똑바로 전달하고 나니 생각을 정확히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난 왜 그동안 어려워하고 겁냈을까 싶다가도 어쩌면 떨어져 살아온 시간이 늘 수록 내 부모가 후회라는 것을 하고 있을 수 있겠다고 싶었다. 서울살이 3년 차가 넘어가자 평생 들어보지 못한 다정하지만 굉장히 느끼해 부담스러운 애정표현을 조금씩 했다. ‘사랑한다.’, ‘딸’ 호칭까지 어릴 적, 같이 살 때 간절히 듣고 싶은 말들이었다. 다 큰 성인이 되고 떨어져 사니 이제야 이런 표현을 하는 내 부모에게 치가 떨렸다.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이미 떠난 버스를 잡으려는 멍청한 짓이야.” 생각했고, 혼잣말로 다짐하듯 이야기했다. 내 마음을 단호하게 전달 후 한동안은 아빠에게 연락 오지 않았다. 안 오는 게 당연하고 그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마음 불편하게 하는 일이 없으니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모든 평화가 깨진 건 5월 6일 금요일, 예고 없이 받은 등기 하나였다.


평화로운 금요일, 원래 같으면 다니고 있던 미용학원에 있어야 할 시간이지만 대체 휴무로 집에 있었다. 느릿느릿 10시 넘어서 천천히 일어나 멍하니 테이블 의자에 앉아 밥을 먹고 나른한 기분에 취해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싸늘한 기운이 나를 감싸 이상한 마음에 인터폰을 잠시 쳐다봤다. 오늘만큼은 우리 집 인터폰이 울릴 일이 없다. 배달을 시킨 것도 아니고, 택배가 오는 것도 아닌데 당연한 듯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고 딱 2초 후 인터폰의 불이 들어오더니 벨이 울렸다. 촉이라는 것은 신기하면서도 무섭다. 침대에 일어나 인터폰을 울리게 한 사람을 보고 누구냐고 물어보자 우체국에서 왔다고 답하셨다. 우체국…? 우체국은 더더욱 올 일이 없다. 내 핸드폰에 온다고 미리 알림이 온 것도 아니고 내 생각엔 받을 만한 일도 없었다. 그때부터 미치도록 불안하고 무서움이 엄습했다. 경계하듯 문을 조심히 열어 집배원이 건네주는 서류봉투를 받으니 보낸 이가 광진구청이었다. 내가 사는 구에서 보낸 것도 아니고 광진구청? 나는 2년 전 건대 근처에서 논 것 말고는 광진구 근처도 가지 않았는데 뜬금없이 광진구청에서 내게 무슨 등기를 보낼 일이 있나 머리를 쥐어 뜯어봐도 모르겠다. 등기를 받았다는 사인을 하고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와 침대에 출렁 앉아 열고 싶지 않지만 끌린 듯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꺼냈다. 종이 두 장이 있었는데 첫 장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내가 느꼈던 아찔함을 절대 잊을 수 없다. 손이 바들바들 떨리며 너무 놀라 종이를 떨구고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꼈다.


무연고자 OOO님의 사망으로 연고자를 찾습니다.


친아빠의 이름이 크게 적혀 무연고로 사망되어 연고자를 찾는다는 내용으로 아빠의 사망일자, 시간 그리고 담당자의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정신이 아찔하다는 말이 이때 쓰이는 것일까. 떨려 오는 손으로 다시 종이를 쥐고 뒷 장도 확인했다. ‘시신 처리 위임서’로 아빠의 시신을 내가 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면 내 인적사항을 적고 보내면 나는 아빠의 시신을 수습하거나 장례를 치러줄 수 없다. 포기할 것이냐 내가 받을 것이냐 선택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사시나무 떨리는 것처럼 떨리는데 구청 담당자의 직통 전화번호를 보고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울리는 동안 눈물로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요동치는 감정을 진정할 수 없었다.


전화받는 달칵 소리가 들리자 누구보다 차분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아빠의 성함을 말하고 사건의 경위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적힌 사망일자, 사망시간, 사망하게 된 정확한 원인 그리고 무연고 처리를 하게 된다면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지며 혹시라도 내가 시신 위임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알아야 할 정보에 대해 물었고, 답변을 침착하게 다 들었다. 방금까지 울며 떨던 나와 달리 동요 없는 목소리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내가 구청 담당자에게 들은 아빠의 사망은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이었다. 사망일자는 4월 16일 5시이나, 올해 3~4월까지 추워 그동안 시체의 냄새가 나지 않다가 4월 조금 넘어서 갑작스럽게 따뜻해지면서 악취가 나 옆집에서 집주인에게 냄새가 난다고 연락하면서 월세가 밀린 것도 확인할 겸 찾아갔지만, 문이 열리지 않자 경찰에 신고해 발견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적혀 있는 사망일자와 시간은 사망한 시점이 아닌 경찰에 발견돼 사망시점을 정확히 알 수 없을 만큼 부패돼 형태를 알 수 없어 임의로 정해졌다고 하셨다. 여기서 내가 가질 수 있는 의문이 있었다. 아빠가 발견된 건 4월 중순인데 어째서 나는 5월 6일이 돼서야 소식을 알 수 있었는지 물었다. 실제로 보낸 기간은 5월 2일 정도이며, 처음 경찰이 아빠의 여동생인 분에게 소식을 전했지만 고민하시다 결국 무연고 처리를 부탁해 남은 연고자를 찾다가 나와 엄마가 다른 이복오빠를 알게 됐고 등기를 보냈다고 답변을 주셨다. 갑자기 멍해져 아무런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3초간의 짧은 침묵 속에 운을 띄운 건 구청 담당자였다.


-혹시 괜찮으시면 여동생 분의 아들이 계시는데 한 번…, 연락해보시겠어요? 개인정보법 때문에 동의하시면 그쪽에게 선생님의 연락처 넘기겠습니다.


대체 왜 무연고 처리를 하셨는지 따지고 싶은 심정과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 때문에 좋다, 넘겨주시고 통화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내 대답을 들은 구청 담당자는 지금 바로 넘겨서 연락드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을 하고 전화가 끊겼다. 멍하니 허공을 보며 아빠의 사망에 대해 들었던 내용을 되새겼다. 허, 하, 하는 한탄 소리가 작게 터졌다. 구청 담당자와의 전화가 끊어진 지 딱 2분. 2분 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고 바로 여동생의 아들이라는 사람이라고 직감했다. 전화를 받지 어색한 숨소리가 들리다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나의 예전 이름을 부르며 자신을 아냐고 내게 묻는다. 그 말을 듣고 바로 알 수 있었다. 어릴 적 내가 쫓아다니며 좋아했던 그 오빠. 매일 나와 놀아주고 생일이 되면 부끄러워하며 내게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선물을 건넨 오빠. 어느 시점부터 다시 만나지 못했던 소중한 기억 속 한 사람임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반갑고 전화로 재회하는 것은 좋지만, 지금 나는 기쁘게 반길 힘이 없다. 작게 ‘아…, 어.., 응.’ 대답했다. 너무 작은 목소리라 못 들었을까 오빠는 말을 이어갔다.


-아마, 넌 기억 못 할 수 있어. 마지막으로 본 게 20년은 넘었거든. 네가 한 4살? 그때였으니까.


기억난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고 정확한 기억인지 내가 확신할 수 없어 큰 반응을 할 수 없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조심스럽게 아빠에 대한 내 생각을 물어봤다.


-들었지? 그.. 아빠, 이야기… 들었으니 통화가 된 거지, 그래.. 넌 어떻게 생각하니?


어떻게 생각하냐고? 지금 나는 어떤 생각을 하는 것이 너무나 사치스러웠다. 언젠간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아빠는 만날 수 없는 나와 다른 세상으로 떠났고, 이젠 희망조차 품을 수도 없다. 눈을 느리게 깜빡, 깜빡 감았다 뜨며 “아, 그…, 아직 생각이 좀 필요해.” 이야기했다. 단호한 목소리가 귓가로 퍼졌다.


-알다시피 우리는 그냥 무연고 처리했어. 너한텐 이모? 고모? 아무튼 네 아빠의 여동생이 우리 엄마인데, 다방면으로 방법을 찾아보고 알아봐도 방법이 없더라고.


진짜 알아볼 만큼 알아보고, 찾아봐도 진짜 어떤 것도 방법이 없었을까? 알아봤다는 기준이 나와 맞을까? 내가 알아봐서 방법이 나타난다면 그때도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뱉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알아본 후 방법을 찾아내면 그때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oo아 그래, 지금도 광주에서 살아?

-아니, 나 광주 아니고 서울에서 지내

-아, 진짜? 서울 어디?! 언제부터 서울에서 지냈어?!


화들짝 놀라며 반가운 듯 한 번에 여러 가지를 물어보는 모습에 얼떨떨했다.


-아! 한 5년 정도 됐어. 지금 그, oo역 근처에서.

-고모도(엄마를 지칭) 같이 서울에?

-아, 아니. 나만, 엄마는 여전히 광주에 있고.

-아하~ 그렇구나. 나중에 한 번 만나자! 언제 시간 되니?

-난 상관없어…

-그럼 그 내일 시간 되니? 낼 근처 카페에서 만나서 이야기하자. 아빠 그것도 서류 가지고 내가 그쪽으로 갈게.


알겠다는 대답하고 짧은 인사 후 전화를 끊었다. 아빠, 서류? 그게 다 뭘까 싶었다. 착잡하고 마음에 먹구름이 가득 낀 느낌이었다. 시신을 위임하면 유골을 봉안할 수도 있지만 산골 되는 사례가 많아 그건 정말 원하지 않았다. 내 마음이 가는 곳은 아빠의 시신을 어떻게든 내가 받아 제대로 된 장례는 못 해도 그냥 어디 수목장이나 잠깐이라도 모시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시신 처리 위임서만큼은 절대 쓰고 넘기고 싶지 않았다. 나를 낳아준 친아빠를 그리 허무하게 무연고자 처리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나는 돈이 없다. 여전히 기초수급으로 생계비까지 지원받으며 겨우 지내는 형편이다. 돈이 없으면 손가락을 움직여서라도 방법을 찾겠다고 온라인을 미친 듯이 뒤져 ‘나눔과 나눔’이라는 장례 지원 서비스를 알아보고 또 다른 방법이 없나 모든 게시물을 읽고 내가 원하는 정보가 나올 때까지 처절한 마음으로 뒤졌다. 만약을 대비해 어쩔 수 없이 무연고자 처리를 한다면 장례 절차에 내가 참여할 수 있는지 모든 것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래도 부족한 것 같아 구청 담당자에게 다시 연락해 물어봤다. 담당자는 당연히 내가 무연고 처리를 할 것이라 여겼을까 계속 무연고로 진행된다면 어떻게 될지 아까보다 더 자세히 알려줬다. 친아빠가 그렇게 사망했다면 누군가와 연을 맺거나 종교가 있지 않을 것 같았다. 회사를 다니는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됐다. 회사를 다니거나 지속적으로 일하는 곳이 있었다면 무단결근으로 아빠의 사망을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까. 혹시 회사가 아니라 친아빠는 수급자였을까 하는 생각에 수급 여부도 물어봤지만 대상자는 아니라는 답변을 들었다. 차라리 수급자였다면 수시로 오는 안부전화나, 수급자가 사망 시 장례 비용을 지원받을 수 있을 텐데 어떤 것도 해당되지 않고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듣고 있으면 들을수록 가혹하고 좌절감만 들었다. 내가 결정하고 하는 것이 한계처럼 느껴져 눈을 질끈 감고 지금 나에게 존재하는 아빠에게 카톡을 남겼다. 무례한 카톡에 화내며 차단한 것도 풀고.


-바빠? 할 말이 있는데 시간 되면 연락 줘요.


1시 넘어 전화벨이 울렸다. 아빠는 ‘할 말이 있다며, 뭐야?’ 내 눈치를 살피며 애써 밝게 말하는 것이 느껴졌다. 말을 계속 더듬거리며 어쩔 줄 몰라하다 숨을 몰아 마신 후 본론을 이야기했다.


-구청에서 등기가 왔는데 내용을 보니까 친아빠가 사망하셨… 대. 그래서 무연고 처리할지 알려달라고 해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뭐 대수라는 듯 아빠는 짧게 대답했다.


-해.

-어? 뭘…?

-무연고 처리하라고.

-아…, 어, 으응…


무심하게 말하는 아빠가 미웠다. 내 친아빠는 지금 나의 아빠로 있는 사람에겐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을 알지만, 머리는 알아도 마음이 미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침대에 뛰어 들어가 얼굴을 베개에 숨겼다. 터져 나올 듯한 울음을 막고 싶었고, 내 마음은 어떻게든 친아빠의 시신을 위임받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방법이 없어 무연고 처리했다는 그 오빠의 말이 맞았다. 느리게 한숨을 흘려보내다 다시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내가 좀 생각을 해봤는데 그냥 네가 시신 위임받아서 장례식은 못 해도 화장으로 진행해. 아빠가 도와줄게.

-어?!

-나랑 상관없는 사람인데 넌 아니잖아. 그리고 네가 항상 독한 척은 다 하고 그래도 마음은 엄청 여려. 그렇게 무연고 처리하고 엄청 괴로워할 거야. 내가 원래 있던 3천에서 빚이 늘긴 했지만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안치된 곳이 있을 테니 거기랑 구청에 전화해서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아봐. 그리고 이 일은 엄마에게 평생 비밀로 가지고 가. 알게 되면 아휴, 상상만으로도 피곤하다.


알겠다고 다행이라는 마음이 섞여 나온 목소리는 아까와 달리 밝았다. 처음으로 아빠가 아빠 같았다. 매번 어른으로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어른으로 보였다. 내 마음이 뭉개지는 것을 알아줘서 고맙고 나를 위해 어떻게든 해주겠다는 아빠의 말이 너무나 고마웠다. 평생을 날 힘들게 했지만 이번은 천년의 빚을 아빠에게 진 것만 같았다. 허락이 떨어져 기쁜 마음으로 안치되어 있다는 장례식에 전화해 안치된 친아빠의 시신과 절차에 대해 알아봤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인지 물어보고 화장에 대해 자세히 물어봤다. 관계가 어떻게 되냐는 질문에 왠지 모르게 딸이라고 말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말하는 어투나 전화받고 내 친아빠 시신에 대해 말할 때 불성실하면서 빨리 처리 좀 해달라고 하는 태도가 처치 곤란한 물건쯤으로 느껴졌다. 사촌이라고 말하고 연고자에게 절차를 자세히 전달하기 위해 전화했다고 거짓말했다. 모든 절차를 듣고 알겠다며 잘 전달하겠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시 아빠에게 전화해 들었던 내용을 전달하면서 아빠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모든 것들이 순차적으로 잘 이루어지는 느낌에 다행이라 여겼다. 처음 등기를 받고 놀라 이 일에 대해 울면서 털어놨던 친한 동생에게 잘 마무리될 것 같다는 카톡을 남기자 위임받으면 유품도 정리하면서 핸드폰도 볼 수 있겠네!라는 카톡을 받았다. 그 카톡을 보자 착 가라앉았던 마음이 두둥실 떠올랐다. 아빠의 핸드폰을 본다면 사진첩도 볼 수 있는 일이지 않을까? 그 생각은 아빠가 살아온 순간들, 아빠가 좋아하는 것들을 볼 수 있다는 작은 설렘 같았다. 원래 있던 약속을 잘 마무리하고 장례식으로 바로 가려했던 걸음을 멈췄다. 약속 때문에 입었던 옷이라 장례식에는 적절하지 않은 원피스였다. 알아보러 간다고 해도 장례식 안에는 여러 장례를 치르고 있는 유가족들이 있을 테니 옷을 갈아입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사놓고 입지 못한 검은색 셔츠와 바지를 꺼내고 검은색 구두를 꺼내 거울을 봤다. 처음 만나는 아빠에게 최대한 예쁘고 단정하게 보이고 싶어 억지로 웃어 보았다.


“아빤 좋겠네! 이렇게 새 옷, 새 구두까지 꺼내 예쁘게 입고 만나러 온 사람이 하나뿐인 딸내미라서.”


애써 그렇게 마음을 위로하고 나가기 위해 현관문의 고리를 잡는 순간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렸다. 문고리에 올린 손을 빼고 전화기를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짧은 내 인사에 아까처럼 예전 이름을 부르며 반가워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을 고모라고 설명해주셨다. 아, 그 아빠의 여동생…, 그분이구나. 고모가 이렇게 전화통화가 된 것에 대해 한탄을 하셨다. 인사를 다정히 주고받을 수 있는 상황이 못 돼 바로 본론을 말하셨다. 아빠의 장례는 어떤 것도 관여하지 말고 그냥 보내드리고 위임받을 생각을 멈춰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셨다. 하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까 약속 때문에 밖에 나왔을 때 아빠가 목포에 있는 한 추모관 장소를 알아놨다고 말까지 했는데, 모든 것이 다 됐는데 왜! 어째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날 말리는 건가. 나는 찢어지는 마음을 뒤로하고 차분히 이미 다 알아봤고 아빠가 도와주기로 했다고 그냥 내가 진행할 수 있게 해 달라 부탁했지만 더 단호한 목소리로 나를 막았다. 이렇게 끝낼 수 없어서 억지를 부렸지만, 고모라고 하는 분은 말려도 되지 않자 네 아빠가 원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셨다.


-너와 함께 산 아빠에겐 정말 감사하다고 전달해줘. 네 마음이 다칠까 봐 그러신 것 같은데 그래도 아닌 건 아냐. 고모 말 제발 들어. 고인의 성격이 남에게 피해 가는 것도 싫어하고 남에게 신세 지는 것도 질색하는 사람이야. 지금 아빠 친구들이 오겠다고 난리 난 거 내가 말리고 있어. 네 마음은 너무 잘 알지만 그런 성격의 아빠가 네가 그러는 건 진짜 원하는 일은 아닐 거야. 아휴, 그 성격 때문에 일이 이렇게 커진 거야! 7년 전인가 아빠 친구한테 내 연락처 전해달라고 했는데 여태 전화 안 해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다가 이렇게 알게 됐어…


친아빠 성격이 그렇다는데 더 이상 내가 어떻게 하겠다 고집부릴 수 없었다. 앞을 바라보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좌절에 빠진 한 여자아이가 보였다. 눈이 붉게 올라와 아빠의 유품도, 장례도 암 것도 해줄 수 없어 무력감에 빠져 마지막 희망의 끈을 잃어버려 괴로워하는 모습.


마지막으로 고모에게 물었다. 무연고자 장례가 진행되면 옆에서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도 안 되냐고. 고모는 그 어떤 것도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셨다. 그것 본다고 마음이 편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평생 괴로울 것이라며 나는 말렸다. 고모 역시 가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를 끝까지 설득하고 설득하다 고모는 생각할 시간을 갖고 충분히 생각해 결정해달라는 말과 젊은 날의 실수였는지 모르지만 엄마와 아빠 사이에 대해 이야기하시다 말고 절대 엄마에게 아빠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역시 엄마가 알게 되는 순간은 오지 않길 원한다. 평생을  귓가에 증오와 혐오하는 말들을 얘기하고 언급도  된다. 죽음을 알았을  할지, 잔인하게  됐다며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서류 하나로 광분하는 모습만 봐도 죽을 때까지 안고  비밀이다. 신었던 구두를 벗고 입었던 옷을 눈물로 벗어던졌다. 때마침 친한 동생에게 카톡이 왔고 나는 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며 울면서 모든 것을 멈춰야 한다는 답을 했는데 곧바로 전화가 울렸다. 눈물을 그칠 틈도 없이 울면서 받았다. 친한 동생이 이게 무슨 일이냐며 아까는 지금 계시는 아버지께서 해주시기로 해서 장례식장 가려고 했던  아니냐 물어보자 나는  크게 울며 꺽꺽 소리 내며 나가기 직전 울린 전화와 고모의 설득  모든 사정을 이야기했다. 숨을 거칠게 쉬며 울기만 하는  달랬다. 고모의 말이  맞을  있다고 살아온 시간 동안 나보다 고모와  시간이 있으니 이것 또한 진지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면 되는 일이니 이제 울지 말라고 계속 달랬다. 나와 함께  시간보다 고모와  시간이 많아 나는 아무것도 몰라도 고모는 단절하고 살았어도 나보단   안다. 이게 객관적인 사실이니 받아들여야 한다. 전화를 끊는 순간까지 울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니 웃으면 끊는다고  난처했다. 억지로 웃자 이따가 웃는 사진 보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끊었다.



하, 한숨이 터졌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생각만 들었고, 날 낳아준 아빠가 그런 성격이라는데 내가 더 이상 고집부릴 명분은 없다. 하는 수 없이 아빠에게 전화해 모든 내용을 전달하면서 정말 감사해한다고 전했다. 그러자 한 사진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가 태어날 때 찍은 발 사진에 엄마의 이름과 날 낳아준 아빠의 이름이 적힌 사진을 엄마가 간직한 것에 대해 불만을 털어놨다.


-아무리 네가 태어난 사진이지만, 그건 간직하면 안 되지. 재혼했는데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는 행동이야. 너한테 이런 얘기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됐다. 고모이라는 분이 하신 이야기 잘 생각해보고 결정해. 너무 속상해하지는 말고.


여기서 무슨 고민을 하고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마음이 한참 동안 무너졌고 복잡한 머리를 부여잡고 테이블에 앉았다. 위에 올려진 시신 처리 위임서를 천천히 쓰고 울었다. 미안한 마음만 가득했다. 내가 돈이 없는 것도, 날 낳아준 아빠의 시신을 인계받지 못한 것도, 고모가 말려 장례가 진행될 때 볼 수 없는 것도 나에게 큰 고통이자 슬픔이었다. 절대 이 일을 잊을 수 없는 한이 될 것 같았다. 너무 울어 눈을 박박 문질렀지만 강력한 화장이 지워지지 않아 무엇 하나 맘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아 더 울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 아무리 문대도 안 화장이 안 지워진다는 말과 억지로 웃는 표정을 찍어 친한 동생에게 보냈다. 한참을 허공을 보며 있었을까 시간이 지나 해가 지고 밤이 되었을 때 또다시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자마자 아빠는 결정했냐고 물었다.


-결정할게 따로 있나…? 고인의 성격이 그렇다는데 내가 더 억지로 강행한다고 될 문제가 아닌 것 같아. 나랑 산 세월보다 고모랑 산 세월이 더 길잖아.

-그렇지….

-그럼 어쩔 수 없이 고모의 말 들어야지.

-그래, 그것도 방법이지. 잘 생각했어.


잘 생각했다는 말이 왜 이렇게 기분 나쁠까? 내가 슬픔에 빠져 삐딱한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빠가 ‘잘 생각했어.’ 이 말에 자신이 부담해야 했던 추모의 집에 유골함 안치 비용이 안 들어서 다행이라고 들리는 것 같았다. 애써 그 불편함을 감추며 나는 결과가 어찌 됐던 나를 위해 해 준 것에 대해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엄마의 전 애인이자 나를 낳아준 사람의 시신을 화장시키고 자리까지 알아봐서 해줄 생각을 했다는 건 고마운 일은 맞으니 고맙다고 하는 것이 당연한 말이다.


참, 마음이 복잡하고 아팠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내가 나가려 문고리를 잡고 내리려 했던 그 순간, 고모의 전화가 울렸고 나는 결국 인계받지 못했다. 하늘 아니, 아빠가 원해서 우연처럼 만든 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고모가 그렇게도 말렸던 이유는 오랜 시간 단절하며 살면서 고인이 된 아빠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빚이 얼마나 있는지 지금 당장 확인이 어렵고 월세는 또 얼마나 밀렸으며, 많은 시간 동안 방치된 시신의 냄새는 특수 청소부를 불려야 하는데 그 비용 역시 감당하기 어렵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안치된 시간 동안에 대한 계산도 만만치 않는 문제다. 고인이 된 아빠의 성격도 성격이지만 고모는 그 모든 것을 내가 감당하고 부담하며 살아가길 원하지 않았다. 태어나 얼마 안 돼 이별해 평생을 만나지 않고 살다가 죽어서 자식에게 그런 부담과 고통을 안고 산다는 것이 어른으로서 용납되지 않았을 것이다.



착잡한 마음이지만 그렇게 생각해야 했고 그게 인정해야 할 부분이었다. 복잡한 마음이 나를 힘들게 하는데 또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내 목소리에 아빠가 술에 취해 대뜸 한 말이 있다.


-너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내 딸이야!

-어? 뭐?

-내 딸이라고, 너는 내 딸!

-취했다, 집에 들어가서 잠이나 자.

-안 취했는데? 나 멀쩡한데?

-응, 그래~ 나 아빠 딸이야. 됐지? 취했네, 집에나 가.


아빠의 딸이라고 대충 대답해줬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어릴 땐 그렇게도 사랑받고 엄마 아빠의 자식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는 누군가의 어떤 사람이 아니라 그냥 ‘나’다. 꼭 누군가의 사람이라면 적어도 취해서 이런 전화하며 내 마음이 쑤셔대는 아빠는 해당되지 않는다. 아빠는 나를 자신의 딸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아빠의 딸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4월 어느 날, 나에게 내 약점을 들먹이며 집에 있게 한 날과 내 외모와 내 자신감을 운운할 때 다짐했다. 그래서인지 나와 아빠 사이에 모를 거리감이 만들어졌다. 내가 정한 적당한 거리와 서로에게 할 말이 없어 딱히 연락할 이유조차 없어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시신 처리 위임서 등기를 보내게 된다면 전화 한 번 달라는 담당자의 말이 있었다. 월요일이 되자마자 구청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떤 말도 하지 않았는데 바로 ‘나’라는 것을 알아차리시고 적혀 있는 주소로 보내달라고 하셨다. 알겠다는 대답과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은 후, 집 근처 우체국으로 가 작성한 시신 처리 위임서에 작은 포스트잇을 한 장 붙였다.


태어나 한 번도 만나지 못해 한평생 만나고 싶었던 아빠였습니다. 비록 돌아가셨으나 이렇게 아빠의 소식을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인계받으려 많은 방면으로 알아봤는데 어쩔 수 없이 저는 무연고 처리를 하지만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하고 잘 부탁드립니다.


빠른 등기로 접수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날이 창 쨍쨍하니 좋았다. 내 마음은 먹구름이 가득 껴 당장이라도 폭우가 쏟아질까 싶은데 날씨가 참 야속했다. 나와 고모는 무연고 처리 서류를 넘겼고 남은 사람은 이복오빠였다. 기간은 일주일 조금 넘게 주어졌고 이복오빠가 빠른 시일 내에 서류를 보낸다면 무연고자 사망이 확정되면서 장례가 이루어질 수 있다. 장례 지켜보는 것조차 고모는 말렸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안 보고 후회하는 것보다 보고 후회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느꼈다.


나도 성인이다. 후회하고, 말고, 선택의 책임은 내가 진다. 고모가 반대해도 아빠가 가는 마지막 길을 아무도 안 와도 괜찮으니 내가 곁에 있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장례가 이루어진다는 연락만 오매불망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등기를 보내고 모르는 번호로 전화만 오면 머릿속이 백지상태가 되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냥 내가 사는 동네의 동사무소 복지과에서 안부확인 차 온 전화에도 혹시 아빠의 무연고 처리가 확정된 것을 안 것인가 하며 가던 길도 멈추고 근처 동사무소를 찾기 위해 길 안내 앱을 켜 헐레벌떡 뛰어가 가족관계 확인을 했지만 아빠는 여전히 살아계시고 있다고 서류에선 그렇게 나와 있었다. 어찌나 날 미치게 만드는지 정신이 팔려 마스크도 안 쓰고 버스를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와 늦은 밤이 돼서야 알아차렸다. 등기를 보낸 후부터 내 마음과 정신이 오로지 아빠의 장례에 팔려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언제 올지 모를 연락만 기다리는 이 상황이 비참해 흐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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