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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셜리 Aug 23. 2022

평생 연애와 결혼은 못하는 사람

부모가 준 성 트라우마




21살 이후 누군가와 만나고 사랑하는 감정을 나누는 일이 없었다. 만남 자체를 거부하거나 연애 생각이 말라 건어물녀로 지냈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 연애를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성 관련 트라우마가 있어 연애를 못 하고 있다는 것을 상담을 통해 알게 되었다. 사실 난 성 트라우마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게 내 연애와 전혀 상관없는 문제로 여겼다. 하지만, 상담을 하면서 이 문제가 엄마 아빠와의 관련성이 높아 내가 생각한 만큼 가벼운 상처가 아님을 깨달았다. 이 상담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비참함과 허무함 그리고 좌절을 느끼고 소리 없이 울어야 했다. 엄마처럼 살기 싫고 아빠 같은 남자 만나기 싫어 비혼을 선택했으나, 그것과 별개로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연애와 결혼이라는 선택지는 나에게 평생 없을 거야 라는 생각에 그랬던 것 같다.


초등학교 들어간 이후 내가 중학교 2학년까지는 온 가족이 거실에서 함께 잠들었는데 엄마만 자는 척하다 새벽만 되면 야한 영화를 틀어놓고 몇 시간이고 보다 날이 밝아지면 잠들었다. 자다가 깨 야한 영화 시청하는 엄마를 자주 봤는데 내가 일어나 화장실 가는 순간에도 엄마는 끝까지 야한 영화를 놓지 못했다. 이외에도 난 엄마 아빠의 성관계 전 전희를 직접 목격하거나 관계 중 나오는 살갗이 부딪히는 소리, 신음소리를 자주 들어야 했다. 처음엔 그런 모습을 보면 다음날 엄마에게 살짝 언질을 했었는데 나에게 심한 욕을 하며 분노하는 모습이 무서워 그 뒤론 알아도, 들어도 모르는 척해야 했다. 온 방의 문을 열어두고 내가 자는지 확인도 안 하면서 아빠에게 하자고 보채는 목소리가 어찌나 끈적거리는 느낌이 너무 싫었다. 평소엔 수시로 온갖 욕설을 내게 던지며 모멸감을 주던 엄마와 밤에 듣는 그 목소리는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나에게 하는 말투와 밤에 하는 목소리 차이가 날 혼란스럽게 했고 때론 아빠가 하기 싫다고 강하게 거부하자 차마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숨소리를 내다 몇십 분이 지나야 짧고 나지막한 소리까지 들리고 한참 후 엄마의 코골이를 들을 수 있었다.


엄마는 관계가 있는 날은 더더욱 예민하고 언성이 높았다. 나와 동생에게 빨리 자라고 소리를 질렀고, 자라는 소리만 2~3번 반복했다. 고작 9시 밖에 안 돼 잠이 오지 않아 억지로 눈을 감았는데 방 문 하나 사이로 넘어오는 소리에 괴로웠다. 고작 7살 된 동생 역시 소리에 놀라 계속 뒤척이며 자는 척만 하고 있었다. 안방 문은 활짝 열어두고 계속 흘려 들어오는 소리에 한동안 충격으로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 내 모습에 엄마가 아닌 아빠가 이율 알고 있다는 듯 나서서 어떻게든 대화를 해보려 시도하고 나를 타이르려 다가올 때마다 그 손길과 표정에 기겁했다.


초등학교 4학년으로 기억하는데 ‘Why’라는 책이 교육용 만화로 많이 쓰였다. 그 많은 챕터 중 성교육 관련 내용이 있는 책을 내게 사주며 몸을 지켜야 한다고 했던 엄마 아빠는 얼마 안 가서 책 내용을 보다 그림이 너무 야하다며 책을 다시 회수해 한동안 꽁꽁 숨겨놨다. 성교육을 초등학교 5학년 때 자세히는 아닌 가볍게 배웠지만 제대로 된 성교육 전 엄마와 아빠의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와 모습에 성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 밖에도 아빠에게 성적 페티시가 있다는 것을 초등학교 3학년에 알게 됐다. 유일하게 집에서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이 나와 아빠였다. 아빠가 사용할 때마다 고등학생 교복 또는 여고생 등의 단어를 검색해 사진을 본 흔적이 있었다. 컴퓨터 말고도 여러 방법으로 아빤 그런 단어를 검색해 사진을 보곤 했다. 엄마에게 살짝 이러한 내용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엄마의 반응이 “오~, 그래?” 말하며 좋은 정보를 얻었다는 듯한 말투와 변태스러운 표정으로 상상하는 듯한 모습을 숨기지 않으셨다. 어떤 날은 주방과 화장실이 붙어 있어 물 마시고 있는데 아빠가 샤워하고 나와 옷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나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둘 다 얼어붙어 빠르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다 황급히 내가 주방에 나와 문을 꽝 닫았을 때, 엄마는 놀란 날 보더니 배 잡고 엄청 크게 웃었으며 어땠냐는 굉장히 좋아하는 내색을 애처 감추며 이상한 질문을 했었다.


내 부모가 조심하지 않아서 생긴 성적 트라우마가 심했던 것은 단순한 진희, 작은 사고 또는 신음소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초등학생 때 꾼 꿈이 있었는데 내게 여동생이 생겨 내 손을 잡고 나와 동네를 돌아다니는 내용이었다. 태몽일까? 설마 했던 일이 다음날 정말 태몽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엄마가 생리를 안 한다면서 걱정스러운 몸짓으로 조심스럽게 핑크색 막대를 들고 아빠에게 심각한 목소리로 내 눈치를 보며 보여주고 속삭이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여도 짐작으로 저 핑크색 막대는 임테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쪼르르 달려가 엄마에게 동생 생긴 것이 맞냐고 따지듯 물었다. 꿈 이야기를 하며 분명 여자아이일 거라는 말도 덧붙이자 너 따위가 뭘 안다며 소리지르자 신나게 이야기가 끊기고 몸이 얼어붙었다. 기죽은 모습으로 방에 돌아왔지만 아무래도 이상해서 엄마가 화장실 어디에 툭 던져놓은 소릴 듣고 조심스럽게 가서 선반을 살짝 들추자 임테기가 나왔고, 아주 선명한 두 줄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태몽을 꿀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나에게 또 다른 동생이 생겼다는 사실이 좋았지만, 조금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해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며칠 지난 후 엄마 핸드백에 살짝 튀어나온 핑크색 노트가 산모수첩일 거라는 추측으로 내 눈과 온 신경을 거슬리게 해 살포시 꺼내보니 정말 산모수첩이었다.


산모수첩을 열어보니 16주 5일, 엄마가 정말로 임신을 한 것이다. 내가 그리도 원했던 여동생이 생긴다는 사실이 좋아 한동안 혼자 배시시 웃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두 달이 넘도록 엄마의 배가 부풀거나 어떤 증상을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는 의심이 생겼다. 의심은 곧 현실이 되어 설마가 사람 잡더라. 엄마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미역국을 갑자기 하루에도 여러 차례 좋은 소고기까지 사서 넣어 먹었다. 아빠 역시 굉장히 수상한 행동으로, 나와 동생은 못 먹게 막으면서 엄마를 위해 좋은 재료를 정성스럽게 공수해 매일 먹이는 모습에 나는 알 수 있었다.


엄마가 낙태를 했다.


엄마가 정말 원망스러웠지만, 이해라는 것이라도 아니 사실을 알고 싶었다. 그럼 내가 동생이 생긴다는 희망을 버리고, 정말 내 동생을 갖고도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고 싶어 엄마에게 이상행동을 증거로 들며 사실을 말해달라고 했을 때 엄마는 되려 화내며 미역국을 그냥 먹고 싶어서 먹었다고 변명을 했다. 엄마는 미역국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을 내가 아는데 먹고 싶어 먹는다는 말이 앞뒤가 안 맞았다. 애초에 아빠의 행동에도 모순이 가득했다. 엄마를 위해 그리 좋은 고급 재료를 공수할 사람이 절대 못 된다. 엄마가 먹어야 해서 우리 먹지 못하게 혼내는 것도, 그 어떤 것도 날 납득시키지 못했다. 나에게 아니라고 해놓고 바로 아빠에게 전화 걸어 웃으면서 했던 말이 26살 된 지금의 나에게도 충격이다.


“여보~, 쟤가 다 안대 ㅎㅎ 어떡할까? 그래도 아니라고 시치미 떼야겠지?”


웃으면서, 마치 재미있는, 서로만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하호호, 저렇게 잔인한 사람이  엄마라니…, 잊고 싶었다. 엄마가 낙태하지 않았다고, 사실은 내가 착각한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내가  산모수첩은 그냥 꿈같은 허상이라고 생각하려 눈을 감았다.  후에도  차례 비슷한 패턴을 보여줬다. 전보다  이상행동을 했고  가족이 엄마에게 찾아와 보살피며 위로의 말들을 해준 모습을 보곤 했다. 그렇게 못된 친할머니와 작은 엄마가  차려주면서 온갖 걱정을 하는 모습을 봤을 때도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가 또다시 낙태를 했다는 .


알았지만, 생각하기 싫어 나는 최대한 엄마를 믿고 싶은 마음에 함구하며 최대한 평생 몰랐던 사실로 남기고 싶었지만, 엄마는 그 작은 바람조차 처참히 밟았다.


중학교 3학년, 엄마가 아빠와 심하게 싸우고 괴로움에 한 잔도 마시지 못하는 술을 마신 후 비틀거리며 동네슈퍼 가는 길 내내 소리를 지르고 오열했다. 엄마가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고 비틀거려 혹시 다칠까 뒤를 쫓아갔다. 쫓아오는 날 보며 너 같은 년 때문에 내가 이렇게 엉망으로 살고 있다고 모든 탓을 돌렸다. 나만 아니면 이딴 결혼도 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로 날 거부하면서 심한 욕설을 해도 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엄마가 다칠까 그냥 그런 걱정만 하느라 그랬는데…, 슈퍼에서 왕창 사 온 술을 집에 돌아와 마시다 화장실 급하다며 가더니 변기 위에 앉아 펑펑 울더라. 새벽 4시까지 이어지는 울고 화내는 술주정을 하다 변기에 앉아했던 하소연을 듣는 순간, 나의 시간이 멈추고야 말았다.


“씨발, 너 같은 년. 개 같은 년, 너 같은 딸은 그냥 죽어서 내 앞에 없었어야 해. 너는 가고…, 넌 내 앞에 없어지고, 내 아이들 돌려놔. 내가 죽인 애가 몇인 줄 알아? 몇 명이~~ 게? 흐으윽, 흐.. 3명. 3명…,  매일 그 3명이 내 꿈에 나와. 나와서, 살려달래…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이런 엄마라서 내가 정말 미안해, 아가야.”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아빠가 뛰쳐나와 입 닥치라고 했지만 엄마는 계속 변기 위에 앉아 나를 보며 저주를 퍼붓고 울다 자신이 낙태한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며 사죄하는 모습에 혼란스러웠다. 이래도 내가 엄마의 딸이 맞을까? 나는 죽어줬으면 좋겠다 하면서 자신이 배 속에 있는, 자신이 버린 아이들에 원통하다고 하는 사람이 싫고 미웠다. 아빠의 큰소리에 엄마는 더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자신이 낙태한 아이들이 다 아빠가, 친할머니가 종용해서 지울 수밖에 없었고, 관계하기 위해 매일 먹던 피임약으로 한 아이는 기형아여서 지워야 했다는 말들. 모든 진실을 엄마에게 들었을 때, 나는 정말 허탈하고 삶이 벅찼다. 정말 단 한 숨도 못 자고 학교에서 멍하니 모든 수업시간을 허무하게 보냈다. 멍하니 앉아 엄마가 했던 말을 다시 되새기고 생각하고, 좌절하고, 괴로워하다 집 가기 전 아무 작은 결심을 했다.


모르는 척하자.

아무것도 듣지 못했고, 난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하나의 도피였다. 엄마가 낙태를 여러 차례 하고, 그 낙태라는 결정에 아빠와 친할머니가 있었다는 진실에서 도망쳐 엄마의 아픔만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못 먹는 술임을 알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음 술을 마셨을까. 엄마가 그리 구슬프게 운 것이 내 가슴이 미어진다. 그리 생각하는 것으로 나의 공허함과 슬픔을 직면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죽으라고 저주해도 자신이 죽인 아이들에게 사죄하는 엄마를 생각하기 싫었다. 애써 담담하게 굴자. 그 마음으로 어떤 것도 듣지 못했고 난 모른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집에 와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엄마가 숙취로 괴로울 테니까, 나라도 북엇국 끓여서 편하게 해 드리자. 그러나 아무리 냉장고를 뒤적여도 항상 있던 북어가 없어 엄마에게 북어 어디 있냐고 물어봤다. 북엇국 끓일려는데 없다고 말하자 엄마는 대답이 아닌 대뜸 욕을 하며 나를 증오한다는 말을 해 나는 무기력함에 씁쓸한 미소를 짓고 엄마 눈에 거슬리지 않게 뒷문으로 돌아 한동안 그렇게 방에 있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될 즈음에 자신이 언제 성관계를 했고, 딱 하루 빼고 철저하게 피임했는데 그때 아이가 생겼다는 말과 어떤 피임 방법을 하고 있는지 상세하게 자랑하는 투로 말하는 모습에 나는 소름이 돋았다. 성교육의 개념으로 한 말이 아니라 정말 대뜸 다가와 내게 말할 때 표정과 말투에 수치스러웠다. 내가 성추행당했을 때도 엄마 때문에 너무나 수치스럽고 혼란스러웠다. 몸이 약하고 성장통이 심해 자주 동네 근처 정형외과 병원을 갔었다. 어깨가 이상하게 아파 진료를 받았는데 의사가 내 옷 속에 손을 넣어 실수로 스친 척 내 가슴을 살짝 쥐었다 손을 뺐는데 굉장한 불쾌감이 들지만 아무렇지 않은 의사의 모습에 어떤 말도 못 했다. 내가 과하게 예민하게 행동하는 걸까 싶었지만, 집에 와서도 불쾌감이 없어지지 않자 엄마에게 의사가 내 가슴을 쥐듯 만졌다고 얘기했다. 내 말에 아무런 반응도 안 하고 내가 예민하게 생각해 거짓말한다며 그럴 일 없다고 하니 찜찜하지만, 넘어갔는데 3개월이 지났을 때 그때 그 병원과 의사가 뉴스에 나왔다. 물리치료라는 명목으로 환자들에게 약물을 투여해 생식기를 만지고 성폭행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엄마한테 그때 내가 성추행당했다고 하지 않았냐고 하면서 ‘봐, 뉴스에 나왔잖아!’ 그제야 엄마는 진짜네 라는 짧은 말을 하더니 어김없이 전화기를 들고 주변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말하고 다녔다.


“아니, 잘 가는 우리 동네 정형외과에서 성폭행해 뉴스에 나온 의사가 있는데 우리 집 애한테도 성추행하고 그랬대~”


내 성추행 피해가 즐거운 일인 양 하하호호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엄마를 보면서 나는 어떤 마음도 들지 않았다. 엄마 주변에 있는, 나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부 전화해 이야기하는 엄마 모습을 믿고 싶지 않았다. 밤에 씻고 나와 스킨로션을 바르는 날 보며 아빠와 같이 조롱하는 어투로 ‘밤 일 나가니?’ 했던 엄마와 동네방네 내 고통을 말하는 엄마는 같은 사람이라는 아니, 내 엄마라는 사실이 싫었다.



보호받아야 할 시기에, 나와 가장 가까운 엄마가 보여준 성관계와 낙태 그리고 성추행 대한 반응까지,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알거나 배우지 못하고 여지없이 노출되었다. 내가 24살부터 엄마 아빠에게 결혼에 대한 강요를 받았을 때, 마음 깊이 결혼을 해 이 부모라는 사람들에게 벗어나 자유롭고 싶었다 욕구가 강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연애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이 가득 차 26살 마지막까지 연락할 때까지만 해도 좋은 남잘 만나 결혼하라는 재촉에 단칼에 거절하며 하는 말이 있었다. 아빠에겐 “난 남자 만날 마음이 없다.”했고, 엄마에겐 “아빠 같은 사람 만나기 싫어서 결혼 안 한다.” 이야기했다. 가끔 친한 언니가 결혼에 대해 이야기해줄 때마다 마음 한편에 불쾌감이 있다. 미디어에서 성관계에 대한 의견을 이야기하는 내용을 보면 그게 내 이야기가 되는 것이 싫다. 듣고 상상하는 과정에서 이상한 행위가 아님에도 불쾌함을 느껴지고 나쁜 짓인 것만 같고 괜히 나에게서 안 좋은 냄새가 날 것 같았다.


내가 누군가 만나는 것도 싫고. 내가 누군가와 자연스러운 관계를 맺는 상상조차 하기 싫다. 그렇기에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결혼이라는 것들이 현실로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그건 내가 어린 시기에 노출된 상황에서 들었던 그 소리와 분위기가 싫고 엄마가 한 것처럼 그런 반응을 하게 될 내가 너무 싫어 아무도 만나지 않겠지. 누군가 소개해주겠다며 이상형이 무엇이냐 물어본 적이 있다.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고 나는 사실 안 하는 게 아니라 두려워서, 거부감에 싫었던 나를 느끼며 만남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아무 말 없이 억지로 웃으며 기회를 발로 차고 철벽을 쳤다. 나는 늘 비혼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정말 어떤 특별한 사람을 만나면 다르지 않을까 라는 여지를 둔다고 말해왔으나, 상담을 통해 성 트라우마와 그 깊은 내면의 나를 마주한 순간부터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타의적으로 연애, 썸 단계조차 어렵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이러한 생각이 언젠간 깨지길 바라지만, 사실상 어려운 부분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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