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셜리 Aug 20. 2022

살고 싶지 않지만, 살아내고 싶어




히키코모리로 지내온 시간 동안 나는 버스에서 여러 차례 고통사고가 난 후로 후유증에 시달리며 합의금으로 생활을 이어가다 취성패를 다시 하면서 직업훈련생계비라는 대출을 받아 어렵게 생활을 이어갔다. 대출을 받을 때 나는 너무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컸다. 기간이 길게 설정해두고 받긴 했지만, 훗날 갚을 때 내가 능력이 되긴 할까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대출받기 전 내 결정에 대해 의견이 듣고 싶어 아빠에게 솔직히 지금 상황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아빠는 어쩔 수 없지, 하는 수 없는 일이니 대출받아야겠지 라는 체념에 가까운 대답을 해줘 여차저차 고민이 됐지만 죽어도 다시 가족 품으로 돌아가기 싫어 결국 300만원을 받기로 했다. 대출을 받고 나니 아빠가 또 모르는 척하며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내가 돈 갚아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대출에 대해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런 이야기한 적이 없다고 크게 타박하며 손가락질해 나는 매우 황당했다. 분명 대출 실행 전까지도 나와 통화를 했고 기간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다 결국 모든 것은 내 결정이라는 말을 남겼던 아빠는 어쩔 수 없이 대출받아야 하는 상황이네라고 말했는데 엄마 앞에서 모르쇠로 일관해 내 대출이지만, 왠지 모르게 당했다는 생각이 크게 들었다.


대출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한동안 그렇게도 못살게 굴더니 나중엔 내 대출에 대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느낌까지 받았다. 남은 대출 잔액을 듣고 본인의 돈인 양 갚을게 라는 말을 자주해 이마를 수 차례 짚고 다녔다. 최대한 안 썼지만, 버는 것 없이 안 쓴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며칠이 지나서 깨달았다. 월세, 공과금 등 지속적인 고정지출이 있는데 현 상황으론 지출만 있을 뿐 수입이 없어 결국 그리도 싫었던 광주로 또 돌아가게 되었다. 착잡하고 되돌이표가 되는 이 상황들이 너무나 싫었다. 언제 나는 온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늘에 대고 원망하며 짐을 싸들고 광주로 돌아왔다. 서울에 있으면 그래도 가뭄에 콩이 날까 하는 정도로 버스 노선 따라, 지하철 따라 움직이기라도 했지만 광주에 오니 그마저도 잃어 정신과 예약 날짜 아니면 외출할 일이 없었다. 외출해도 갈 곳이 없고 만날 사람도 없어 매일이 지루하고 하루가 고통스러웠다.


나를 정말 고통스럽게 하면서 울부짖게 만든 것은 약에 대한 부작용이었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 중 일부는 환각을 경험하기도 하는데 내가 그랬다. 내가 웃는 모습을 발견하거나 인지할 때 또는, 내가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 바로 “너는 행복하면 안 돼.”, “너는 늘 불행하고 우울한 사람이야!!”, “너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존재니까 죽어버려.” 내면의 소리가 귓가에 울려 처음엔 내가 조현병인 줄 알았다. 실제로도 조울과 환각을 조절하는 약을 처방받아먹던 중 극도의 자살충동이라는 부작용을 앓게 되면서 나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려 자지러지게 울고 또 울다가 엄마에게 그냥 나 좀 죽여달라고 무릎 꿇고 빌어야 할 만큼 심각하게 앓았다. 이런 모습을 보며 내 부모는 답답해했다. 멀쩡한 얘가 괜히 약 먹어서 미친 거라고 생각하고 약을 안 먹으면 된다는 말만 반복했다. 내가 고통스러운 울음을 터트리며 정신병원에 넣어달라고 애원하자 한동안 약을 못 먹게 했는데 약으로 눌렀던 중증의 우울과 부작용이 더해져 상태가 매우 나빠졌다. 손목을 긋고 죽고 싶지만, 격하게 살아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은 발작을 일으켜 내 아픔이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님을 내 부모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며 충격을 먹은 듯 보였다. 손목을 긋고 싶은 마음과 자살충동이 밀려올 때마다 온전히 나만의 고통이었다. 오롯이 나만 고통스러워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행동으로 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 내 부모에겐 충격과 이해할 수 없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차를 태워 드라이브도 시켜보고 근교도 돌아다니며 정신을 딴 곳으로 돌리라고 훈수 두다 극단적인 발작과 오열을 보고 나서야 내 부모는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약 먹는 것에 대해 암묵적 허락을 해줬다.


내가 아파서 약 먹는 것까지 허락이 필요한 것인지 이해는 할 수 없지만, 암묵적 허락 이후 약 먹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왈가불가하지 않아 나는 스트레스받을 일이 적어지면서 상태가 호전됐고 완전한 독립을 위해 전세임대주택을 알아본 후 LH를 통해 서울 한 전셋집을 구해 또다시 광주를 벗어날 수 있었다.


LH로 전세를 구하면서 나는 또다시 친아빠의 서류를 떤 적이 있다. 호적이 새아빠의 자식으로 되어 있지 않고 친아빠로 되어 있어 서류를 이중으로 뽑아 제출해야 했는데 그중 한 서류가 친아빠의 등본이었다. 별다른 생각은 없었는데 엄마는 친아빠의 등본을 보자마자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하며 광분하기 시작했다. 내가 받아온 등본엔 아빠는 거주지 불명자로 찍혀 있었고 마지막으로 있던 주소가 외할머니 집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걸리는 곳으로 나와 있어 “어떻게 시간이 지나도 이 정도로밖에 못 사냐”, “지가 뭔데 내 엄마 근처에 살아?”라는 말을 내 왼쪽 귀에 대고 시도 때도 없이 이야기해 귀를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저주가 섞인 이야기를 매일 한쪽 귀에만 듣는다는 건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엄마 말로는 같이 동거하던 시절에도 그렇게 돈이 없었다고 하면서 혹시라도 찾아갈 생각하지 말라고 그 인간이 너한테 돈 빌릴 거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나를 가지고 있을 때도 보증금을 모두 들고 날라 생활이 많이 어려웠다면서 아빠로서, 가장으로서 정말 무능력하다고 이야기해줬지만, 나는 오히려 이 이야기들이 이상하게 믿어지지 않았다. 딱히 믿고 싶은 마음은 없고 제발 이런 이야기는 내 귓가에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마음뿐이었다. 나를 위해 해준 이야기보단 내가 모르는 꺼림칙한 일이 있고 그저 감정 푸는 목적에 더 중점이 된 느낌을 받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무사히 서류심사가 끝나고 집을 구하면서 부담감이 확 줄었다. 내 집은 아니지만 내가 지낼 곳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도 좋을 수 없다. 고시원, 고시텔을 전전하며 살다가 내가 눕고 뒹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었다. 무사히 이사를 마치고 필요한 가구를 사기 위해 부모님과 동생이랑 같이 이케아를 간 날, 가구는 못 사고 아빠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화가 나 먼저 차로 가버려 싸늘한 분위기로 새로 구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내 잘못도 아닌 일에 자책하는 모습을 마주하게 됐다.


“아, 내가 살아 있어서 내 부모가 고통받는 거야. 내가 죽으면 우리 엄마 아빠, 내 동생은 행복할 수 있어. 그러니 내가 죽어버려야 해.”


내면 속 모습을 마주한 순간 나는 너무나 끔찍하고 무서웠다. 모든 일이 내 탓으로만 생각되고 나만 이 세상에 없어지면 모두가 행복할 거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 무서웠고 두려웠다. 깊이 숨겨둔 마음의 진심은 혼자였다. 내가 가족과 행복한 기억을 가지지 못한 것도, 여행을 가다 아빠의 갑작스러운 성질로 모든 계획이 틀어진 것조차도 모두 내가 살아 있기에, 나만 아니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불행의 시작이 나, 자신이라고 여기는 마음이 깊게 박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아려왔다. 직접 보고 느끼니 3일은 매일 눈만 뜨면 울기만 했다. 무릎을 꿇고 하늘에 나를 데려가 달라고 사정도 했다. 나만 아니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으니 제발 그렇게 해달라고 하는 모습까지 유체 이탈한 것처럼 타인을 바라보듯 보고서야 문득 정신이 들었다.


이게 진짜 내가 살아 있어서 모두가 불행한 건지 아님 내 존재를 불행으로 느끼게 하는 가족의 태도인지 확실히 알고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그 생각이 불현듯 떠올라 눈물을 닦고 차분히 생각했다. 나는 지금 누구보다 불행한 것은 맞지만, 내 존재로 누군가 불행을 느낀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다 결론이 나왔다. 그럼 나는 어째서 내 존재로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며 좌절한 걸까 재차 생각에 잠겼다.


한 가지 나온 결론은 내가 아닌 가족의 태도를 보고 그렇게 여긴 내 생각에서 시작된 것.


결론이 나왔으니 나는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어떻게 해야 내가 그런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을 수 있고 그 생각 때문에 자살충동을 막을 수 있나 며칠 동안 수 차례 고민하고 고민한 후 나온 답은 잠시라도 연락을 멈추는 것이었다. 얼마나 갈지 상상할 수 없지만, 극단적 사고를 부르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멈추려면 연락을 차단하고 나에게 온전히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바로 엄마, 아빠의 전화번호를 차단했다. 당연히 동생 번호도 차단하는 것이 맞지만 동생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동생은 적어도 나한테 그런 생각을 주지 않아서였을까? 잘 모르겠지만, 그 아이에겐 더 잘해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결론을 내고 결정내기까지가 어려웠을 뿐 모든 일들은 순차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조현병으로 처방받던 약을 중단했던 것부터 다시 잡기 위해 맞는 여러 정신과 병원을 다녀 맞는 선생님, 나에게 적합한 치료를 찾아 상담을 하다 우연히 지인의 찬스로 트라우마 관련 임상실험에 참여하게 되면서 매주 한 번씩 1시간 동안 임상병리사와 상담을 했다. 상담을 하면서 극심한 트라우마를 앓고 있다는 것과 해리장애로 진행 중인 것을 발견해 치료까지 이어졌다. 나의 주 증상은 이인증으로 시작돼 인격이 분리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병명을 정확히 찾고 나니 모든 것이 말이 되기 시작했다. 그전부터 ‘지만 내가 아닌 존재가 계속 나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과 환각 모두 해리 증상에 일치했고 실제로 해리장애는 조현병으로 쉽게 오인될  있다는 논문도 있었다. 나는 조현병이 아닌 해리장애를 앓고 있었다. 임상병리사와 트라우마 인지, 공황발작 인지치료를  때마다 나는 극도의 불안을 몸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불안하거나 기억에 대한 굉장한 불쾌감이   어깨가 올라간다거나, 몸이 극도로 경직되거나, 표정에서 심한 떨림이 보였다고 했다. 나는 느끼지 못한 반응과 내가 모르는 곳을 하나하나 섬세히 보시고 체크해  담당 교수님에게 전달했고 모든 내용을 종합한 교수님은 나에게 당장 약물치료와 인지 치료를 함께  것을 권유하셨다. 말이 권유였지 나에게 선택권은 딱히 없었다. 나도 사실 누구보다 지금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다른 거절도 하지 않았다.


인지치료를 하면서 나는 수 없이 내면과 마주해야 할 때가 많았다. 몰랐다면 아프다 정도로 넘어갈 수 있었으나, 이미 표면 위로 올려놓은 내 해리장애는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숨겨져 있던 것들을 나타나면서 나는 매일 괴로움에 빠져 살았다. 마주할 때마다 나는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고 무서워하면서 따로 식이조절을 하거나 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온전히 스트레스로 2개월 만에 15kg가 빠졌다. 매주 한 번씩 임상 선생님과 만날 때마다 살이 빠져 와 걱정하셨다. 그만큼 병원 외에 혼자 있는 모든 시간에 공황과 해리 증상을 앓으며 나는 두려움에 우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21살까진 감정표현을 못하는 아이였다. 웃는 것도 어렵고, 우는 건 더더욱 못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이었는데 공황과 중증의 우울증을 앓고 해리까지 경험하고 나니 매일 죽기 싫어 우는 것으로 온 에너지를 소비해 3개월 만에 25kg 가까이 빠져 건강 상의 문제도 가지고 다녔다.


모든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것만 같고, ‘나’ 맞지만 내가 아닌 아이가 매일같이 나에게 자해하는 법과 자살할 수 있는 강력한 방법을 시범을 보여줘 이불을 얼굴에 처박고


제발, 제발 그만하라고!!!


울다 지쳐 잠이 들어야 겨우 하루를 넘길 수 있었다. 남들처럼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여력도 없었다. 당장 내 앞에 놓인 1분, 1초도 어떻게 될지 몰라 무서웠다. 남들처럼 다음 날 또는 며칠 후 약속을 잡고 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미래를 꿈꾸고 싶어도 꾸지 못한 것은, 눈만 잠깐 감았다 뜨면 나는 죽어 있을 것 같아 무서웠다. 친구는 잠깐이라도 전화를 받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했을 정도로 나는 그때 굉장히 상황이 좋지 않았다. 매일 밤 걸려 오는 친구의 전화를 받으면 나는 그저 잠들기 전까지 울며 살고 싶다는 말만 반복했다. 친구는 그런 내 전화를 매일 받아주고 걸어줬다. 그리고 아무런 말 없이 묵묵히 듣다가 눈물을 그치면 ‘그래도 정말 살아줘서 고마워.’ 작은 칭찬으로 전화를 끝내고 카톡으로 매일 내 아픔을 받아줬다.


오늘도 어김없이 저 멀리 주방에서 칼을 꺼내 손목의 올리는 저 아이, 내가 아니지만, 나만 보이는 저 아이는 나였다. 참 어려운 일이다. 내가 아닌데, ‘나’라고 보이는 아이를 보며 제발 그만해달라고 애원해도 소용은 없었다. 칼을 들고 손목에 올려 씩 웃는 모습이 나에게 해보라는 유혹으로 느껴졌다. 눈을 감아도 선명히 보이는 저 아이가 미치도록 밉고 너무나 싫었다. 제발 이제는 내 곁을 떠나 주길 빌었지만 매일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죽고 싶게 만들었다. 친구의 전화가 울렸지만, 오늘만큼은 도저히 받을 수 없어 거절을 누르고 펑펑 울며 카톡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미안해, 너무 힘들어서 전화 못 받을 것 같아. 나, 정말 미치도록 죽고 싶어.


-알아, 그렇게 생각하는 거 너무 당연해.., 너 정말 열심히 살아와서 아픈 거야.


-모두가 나에게 죽으라고 하는 것만 같아서 정말 미치도록 죽고 싶은데…, 진짜 죽고 싶은데


-응


-그래서 더 죽을힘을 다 해서 살아내고 싶어, 나 살기 싫은데 정말 살아내고 싶어..


-그럼 우리 살자, 살다가 하루 넘어지면 넘어져 있다가 또 하루 살아내 보는 거야, 알겠지?



나는 매일 죽고 싶고 삶을 미치도록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넘쳤지만, 그럴수록 친구와의 약속을 생각하며 이겨내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저 깊숙한 서랍 한 곳에 숨겨 놓고 꺼내보는 것으로 내게 힘이 되었다


이전 15화 성인이 되어버린 아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