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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셜리 Aug 04. 2022

새 이름, 새로운 시작의 소리






고3이 되면서 서울대라는 말도 안 되는 목표로 공부했었다. 목표에 도달하면 너무 좋겠지만, 현실상 불가능했다. 불가능하다고 꿈꾸지 않는 것이 무척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꾸면 이룰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고 서울대는 당연히 못 간다는 것을 알면서 도전하며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나온다면 스스로에게 찬사를 보내줄 수 있는데 말이다. 불가능한 목표를 바라보는 내가 좋았다. 잘하지 못해도 최선을 다 할 테니까.


꿈꾸는 순간 동안 스스로를 응원하며 죽을 각오로 노력하고 공부했다. 그런 내 모습에 모든 선생님이 날 주목하며 예의 주시하셨다. 이런 학교에서 어떻게 서울대를 가냐고 네 주제를 모른다는 말로 날 비난하는 선생님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딱 한 명, 국어 선생님만 아무 말 없이 서울대 입시전형을 보고 입시전략을 세워주셨다. 뿐만 아니라 사설 모의고사 예상 문제집이 생길 때마다 건네 주시곤 하셨다. 내 담임 선생님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2 때 문학 담당하셨던 선생님과 문학 부장, 과거 관계임에도 나를 적극적으로 응원해주시고 도와주셨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공부인 만큼 나는 10배, 100배 더 노력하고 악착같이 공부했다. 모든 선생님에게 찾아가 질문했지만 모두가 귀찮아하면서 자리를 피하셨는데 유독 그 국어 선생님은 공부에 대해 물어보면 친절히 설명해주셨다.


EBS로 내신과 수능을 잡기 위해 미리 개념을 익히는 공부로 방학 때 이미 선행학습이 되어 있어 아는 만큼 수업시간에 열정적으로 대답하고 집중해 과목 선생님들에게 사랑받는 학생이 되면서 학급 전체 아이들의 비축을 샀다. 나를 비웃어도 나는 최선을 다해 무조건 광주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얼마나 간절했는지 필통 안에 날카로운 포크를 넣어 잠 올 때마다 허벅지를 사정없이 찔렀다. 다른 손에는 500ml 페트병에 6개의 믹스커피를 넣어 섞어 마셨다. 모두가 날 보고 독하다, 무섭다 할 정도로 시체처럼 학교 와서 죽지 않을 만큼 공부하다 집으로 돌아가 바로 책상에 앉아 부족한 과목과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온 힘을 쏟으며 공부했다. 내가 열심히 할수록 엄마의 콧대가 높아져 자랑하고 다니자 나와 같은 학교를 나온 언니와 내가 비교대상이 되었다. 큰 이모의 막내딸, 수아 언니가 날 미친 듯이 질투해 나와 같이 다니던 교회에 안 좋은 소문을 내 사람들에게 온갖 오해와 미움, 비난을 받았다. 수아 언니의 그런 행동을 말리는 이가 없었다. 이모도 그랬고, 이모부는 오히려 동참해 소문을 더 부풀렸다. 모두가 욕하고 괴롭게 해도 내 간절함을 멈출 이유가 되지 않았다. 누군가 나에게 진심으로 궁금해서 왜 그리 광주를 싫어하고 떠날 생각만 하냐는 말에 그저 웃을 뿐, 어떠한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할 시간에 영어 한 단어라도 더 외워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그만큼 간절했고, 내 간절함이 결과물로 나타나길 기대하며 온 신경이 공부와 대학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잘 다져왔던 내신 성적은 엄마 아빠의 이혼 소동으로 3학년에 곤두박질치면서 희망이 없었다. 출석은 질병으로 인정받아도 유급되기 직전의 상태로 어떤 시도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수능 준비는 엄마의 괴롭힘으로 6월 모고 이후 손 놔버린 후라 포기했던 대학과 공부를 다시 잡아도 전처럼 공부할 수 없어 하루하루가 즐겁지 않았다.


고등학교 올라와 인 서울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여태까지 노력한 것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돼 절망에 빠져 지냈다. 만회하려 해도 만회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 모두가 수시 넣을 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손만 놓고 지낼 수 없어 자소서로 승부 보자 지푸라기 집는 심정으로 수시 넣었다. 내가 수시 아님 정시, 어떤 대학에 어떤 유형으로 넣는 것인지 선생님은 물론이며 학년 전체 아이들 모두가 집중하고 있었다. 선생님들은 열심히 하다 꼬부라진 아이, 아이들에겐 그렇게 잘난 척하면서 소리만 요란한 빈 수레로 관심이 집중되었다. 수시 접수 기간에 자소서로 모든 학생들이 패닉에 빠져 지내면서 모든 학년 국어 선생님을 찾아가 첨삭을 받았다. 나 역시 한글 파일만 하루에 6번을 날리고 죽어라 쓴 자소서를 첨삭받았다. 내 자소서를 보시곤 국어 선생님들이 단 번에 오케이 외치시며 첨삭받으러 올 필요 없다는 말을 하셨다. 첨삭받으러 온 애들에게 자신 말고 글 잘 쓰는 나에게 첨삭받으라고 해 또다시 미움을 샀으나, 아이들은 당장 미래가 달린 문제인지라 재수 없고 짜증 나지만 나에게 첨삭받았다. 죽을 각오로 열심히 해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았으나, 모든 대학에 떨어지면서 나는 모든 것을 잃은 기분에 빠졌다.


내 합격여부를 매일 물어보며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는 말투와 표정을 보며 더 크게 좌절했다. 나를 믿지 않았던 선생님들이 고작 그러려고 그렇게 유난 떨었냐는 말들을 들으며 나를 도와주시고 전적으로 믿어주신 국어 선생님에게 죄송한 마음에 피해 다녔다. 수능 역시 엉망으로 보고 우울함과 절망에 빠져 투명인간처럼 시간을 보냈다. 어떻게 살아야 할 지도 막막했다. 대학이 전부가 아니라지만, 나는 전부였다. 부모에게서 시작되는 고통과 불안 그리고 불행 모든 것들을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내 숨통이었다. 모든 것이 좌절되었을 때 다시 일어나 재수하기로 결심했다. 재수 성공해서 가깝지만 기숙사 있는 곳이라도 들어가자 결심으로 또다시 책을 폈는데 현역 때 공부한 열정, 다시 그 열정을 갖기 어려웠다. 도저히 그때처럼 다시 공부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도 그 근사치라도 노력하자 했었으나 결국 포기했다.


공부하는 내내 엄마가 빨래해라, 청소해라 온갖 명령을 하고 집안일하지 않으면 크게 혼냈다. 공부하는데 수시로 방문을 열어 감시하고, 문을 걸어 잠가도 다락방을 통해 서늘한 눈초리를 느껴야 했다. 방문 앞에 있으면서 전화 걸어 뭐하냐는 말 같지도 않은 말로 잠깐도 집중할 수 없었다. 인강을 듣는데 내 방문을 열고 키우던 강아지를 넣어 문을 때려잡고 이만저만 괴로운 것이 아니었다. 엄마는 이런 내 괴로움이 재미있는 것인지 내가 힘들어할 때마다 힘들어하는 만큼 더 크게 웃고 있었다. 독서실 가서 공부하면 눈에 안 보인다는 이유를 대며 괴롭혀 미칠 지경이었다. 3개월, 5개월 참다 참다 도저히 재수를 할 수 없어 포기하자 나에게 인생의 실패자, 낙오자라는 말을 서슴없이 해 심적 고통이 가중되었다. 괴로울수록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었다. 무기력이 심해져 세상이 흘러가는 것과 반대로 내 시간은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는 것으로 멈춰 있었다. 어떤 방법을 써도 엄마의 폭언에서 벗어날 수 없고 방해로 내 삶을 가로막았다. 어느 때처럼 우울하고 무기력함, 좌절감에 힘 없이 지내는데 엄마가 집안일하지 않는다면서 밥 축내는 아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어떤 말로도 날 움직이게 하지 못했다. 실패했다는 생각에, 내가 더 이상 이곳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그 사실이 몸이 무거워 침대에 딱 붙어 있었다. 본드로 붙인 것도 아닌데.


그러다 엄마의 정도가 없는 막말과 무리한 집안일 요구에 폭발해 내면 깊이 숨겨놨던 분노 표출하면서 엄마와 기나긴 싸움으로 번졌다. 엄마는 단둘이 있을 때마다 ‘너 낳고 먹은 미역국이 아깝다.’, ‘너 같은 거 괜히 낳아서 내가 무슨 부귀를 누리겠다고….’, ‘너 낳고 약 먹어 죽려고 그랬는데 못한 게 후회된다’ 등의 뇌를 거치지 않는 말로 내 출생을 저주하고 나 때문에 인생이 망가졌다는 말 듣자 도저히 이대로 살 수 없겠다 싶었다. 매일같이 방법을 모색했고 결국 세종시로 취업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가출했다. 가출하는 순간까지도 엄마의 막말과 폭언, 정신적 학대가 이어졌다. 3시간이 넘도록 나를 낳은 것이 세상 한이라는 말들을 쏟아내고 집 나가 객사하라는 등의 말을 듣게 되니 내가 기숙사 있는 직장을 구한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생각됐다. 3시간의 언어폭력이 끝나니 엄마의 속이 시원했는지 거실에 대자로 누워 잠든 모습을 보자 기가 찼지만 신속하게 나갔다. 거실을 막고 있어 미리 싼 짐을 가지고 나갈 수 없어 창문을 통해 넘어가 짐을 챙기고 발걸음 소리도 안 나게 빠져나왔다. 이제부터 더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


짐을 다 옮기고 콜택시를 불러 버스터미널로 이동했다. 콜택시가 오는 동안 잡힐까 초초해 주변을 계속 살폈다. 내가 집에 없다는 것을 알면 맨발로 잡으러 올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당장이라도 걸리면 진짜 더 이상의 기회는 없었다. 무사히 버스 타고 세종으로 가는 길에 전화번호를 바꾸려 했으나, 만 18세로 생일이 지나지 않아 미성년자로 바꿀 수 없다는 답변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무사됐다.


만 18세, 미성년자…, 그게 문제였다.


가출에 가까운 취직으로 나는 물리적 해방을 얻었으나, 매일 울리는 전화벨과 돌아오라는 야단 가득한 여러 명의 수많은 문자까지 정신적으로는 해방되지 못했다. 자유지만, 온전한 자유가 아니었다. 게다가 내가 취직한 패밀리 레스토랑은 주방에서 일하는 남자들이 문제였다. 어찌나 여자를 밝히고 성희롱을 하는지 미칠 지경이었다. 매일 로테이션과 스케줄로 움직이는 변동적인 근무시간은 날 더 힘들게 했다. 주말도 없이 주 6일을 일하는 게 정말 쉽지 않았다. 겨우 근무를 마치고 쉬는 날, 어김없이 울리는 전화벨. 모르는 번호로 울린 전화는 뭔가 이상하게 꼭 받아야 할 것 같지만, 그런 불안이 들 수록받지 않아 부재중으로 남았고 한 통의 문자가 왔다. 내용은 이러했다. 형사이며 지금 엄마의 신고로 실종신고 처리되어 바로 연락 달라는 문자. 어이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없다.


엄마가 집 나라고, 나가서 살던지 죽던지 그건 니 팔자라면서 그림자도 비치지 말라고 3시간 동안 나에게 온갖 욕을 하고 모욕을 주면서 내 출생을 저주한 사람이 경찰서에 울면서 실종 신고했다는 말을 듣자 황당해 허, 아, 이런 감탄사만 반복했다. 형사라는 사람과 전화 통화하면서 나는 수치스러운 말들을 들으며 지내다 취업해서 나온 것이지 가출이 아니고 아동학대 피해자로 오히려 엄마를 신고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내 말을 듣자 굉장히 당황해하더니 말을 더듬으며 알겠으니 근처 경찰서에 가서 직접 취소하라는 말을 남기고 형사가 전화를 끊었다. 뭐 이런 거지 같은 세상이 있나 싶었는데 더 황당한 일은 엄마 아빠는 내가 어디서, 어떤 밥을 먹고 어떤 곳에서 무엇을 사는지 일일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 몰래 부모라는 자격으로 은행에 가서 거래내역을 다 뽑아 위치와 거래내용을 다 확인했다는 것이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딱 하나, 만 18세 청소년이라서. 나이는 스무 살이어도 만 나이가 청소년이라 조회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당시엔 몰랐는데 반 강제적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가 자랑스럽게 그리고 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가소롭다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며 말해서 알게 됐다. 또다시 이 그지 같은 굴레에 들어오자 또다시 무력감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들이 가진 수단을 이길 방법이 도저히 없었다. 또다시 실패했다는 생각과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렇게 남은 시간을 방에서, 가만히 누워 천장만 보는 것으로 허비했다. 다행인 것은 가출(?) 사건으로 더 이상 엄마가 신체적으로 때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럼 뭐하나 정신적인 고통은 더 커져 돌파구가 없는데.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가득하니까 ‘어떤 시도해도 소용없을 거야’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해 기력이 없었다. 스물, 허무하게 보내다 10월 어느 날, 창문으로 넘어오는 작은 햇살을 보며 사색에 잠겼다. 저리 햇빛을 가렸는데도 뚫고 들어오는 햇살을 보자 울음을 터졌다.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지만, 진심으로 날 소중히 여기지 않지만, 적어도 저 햇살은 그 온갖 방해에도 뚫고 나를 비추는구나 싶어 한 번만 더 힘 내보자 결심하게 되었다. 결심과 동시에 핸드폰으로 여러 검색을 하면서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알아봤다. 제도를 여러 가지 알아보다 취성패 알고 신청해 GTQ 수업을 듣기로 했다. 조금씩 알아가고 하면서 개명도 같이 알아봤다. 개명을 어쩌다 결심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어떤 큰 변화가 필요했고, 그 변화가 나에게 큰 의미가 되어주길 바람이 컸다는 것 말곤 떠오르는 것이 없다.


두 달의 시간 동안 개명에 대해 미친 듯이 알아봤다. 변호사로 통한 개명신청 말고 직접 하는 법과 개명할 이름과 절차 등 철저하게 알아본 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진행시켰다. 개명 전 이름도 순우리말이라 개명할 이름도 우리말이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여러 가지 찾다


소담스럽게 예쁜 사람 뜻을 가진 예쁜 이름을 발견했다


이 뜻을 보자 이거다! 강한 마음이 들었다. 살아온 시간 동안 나는 그 누구에도 소중한 사람인 적이 없다. 학창 시절, 내 부모 그리고 나조차도 예쁘다 칭찬한 적 없고 소중하다 여긴 적 없어 앞으로 살아갈 시간들은 소중하게, 예쁘게 살고 싶었다. 스스로에게도 그런 사람이면서 내가 타인을 대하는 자세도 그러하길 원했다. 이름이 정해지고 나니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하고 개명 사유에 엄마가 지어준 이름의 뜻은 없고 가볍게 지어져 비참했던 학창 시절 속 왕따, 엄마에게 이름이 아닌 ‘~년’으로 불리다 엄마가 화나면, 날 때리기 전 불렀던 이름이었다는 내용과 개명될 이름으로 이름처럼 살아가고 싶다는 등 자세히 적어, 이러함으로 개명을 신청한다는 신청서와 사유서를 제출했다. 개명을 위한 서류 준비하면서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나에게도 친아빠가 있고 현재 나와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뗀 서류였는데 날 낳아준 아빠 성함, 나이가 나오고 살아있다는 것을 서류라도 보니 무엇인가 희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친아빠가 세상에 없을까 봐 무서웠던 적이 많다. 어린이집 다니던 시절 아빠 없다는 이유로 괴롭힘 당할 때 아빠 존재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엄마는 아빠가 하늘에 있다는 말을 했다. 서울 사는 동안 서랍장 한 칸에 옷들과 파란색 남자 속옷들이 있고, 내가 아빠에 대해 물어보면 아빠의 민증을 꺼내 아빠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는데 아직까지도 그 민증의 얼굴 라인, 턱선 등 얼굴 선을 기억하긴 한다.


그러나 그 사진이 진짜 친아빠의 사진인지 커서 생각해보면 얼굴이 선명하지 않아 확신할 수 없었던 부분이 있다. 엄마가 재혼한 후에도 내 성씨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혼란스럽고 민증 속 사진에 나온 얼굴 라인, 턱 선 등 다른 것 같으면서도 비슷해 지금의 아빠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남의 민증도 늘 소지하고 다니는 엄마 특성 때문에 내 기억이 맞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물어본다고 사실대로 이야기해주지 않을 것 같아 물어보지도 않았다.


 개명이라는 시도로 알게 된 나의 친아빠는 나와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있다니 위안이 되면서 다행이었다. 서류 속 아빠의 이름을 조심히 쓸어보며 언젠간, 언제 한 번은 꼭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작은 희망이 내 가슴을 울렸다.


개명 신청은 온전히 나만 아는 사실이었다. 개명 서류가 넘어가고 판결이 나기 보름 전, 엄마에게 폭탄 던지듯 아무렇지 않게 개명한 사실을 말했다. 그때 엄마의 표정을 다시 상기시켜보면 정말 통쾌하다. 개명이 된 후, 엄마는 청개구리처럼 개명 전 이름을 불렀다. 개명이 된 후에서야 나를 ‘~년’이 아닌 매 순간 이름을 불러줬다. 개명 전의 이름.


처음엔 청개구리처럼 행동하는 엄마가 짜증 났다. 21살, 내가 직접 시도한 첫 변화로 나에게 의미 있는 행동, 의미 있는 이름인데 내 의지와 내 존재에 대해 무시하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오히려 좋았다. 나의 새 삶을 불어줄 이름. 새로운 시작을 엉망이 되지 않는 것 같아서.


 엄마와 아빠가 개명된 이름을 거부해도 나는 이미 ‘소예’다. 개명된 이름의 뜻도 물어보지 않으면서 이름이 별로다, 거지 같다, 이딴 걸 이름으로 지어서 개명했냐 등 비난하며 개명 전 이름으로 불러봤자 서류에는 이제 없는 사람이다. 엄마가 개명 전 이름을 꼬박꼬박 부르면서 말도 안 되는 불만을 내놓을 때마다 나는 단호하게 “소예!”외쳤다. 개명 전 이름으로 부르면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는 말로 엄마에게 작은 타격감을 줘 엄마의 맹목적인 공격에 크게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개명 후 처음으로 ‘이름’라는 단어가 좋았다. 개명 전 나는 내 이름이 싫었다. 꼬리표처럼 다니는 수식어들로 ‘이름’ 단어조차 짜증 났다. 개명 전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야 했다면 난 매 순간 절망에 빠져 지내야 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내 이름에 대해 아는 척을 한다면 나는 왕따, 찐따였던 얘 밖에 되지 않아 모든 이들의 눈초리와 은근한 괴롭힘이 늘 존재할 것이다. 엄마처럼 부정적인 상황에서 부른다면 억양으로 인해 오는 과거 속 공포와 불안감에서 ‘나’라는 가치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힘들어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난 내 힘으로 삶의 운명을 바꾸고자 개명을 했다. 이름에 대해 누군가 뜻을 물어보고 혹여나, 이름의 뜻처럼 내가 날 대하지 않았을 때 주변인들이 모두 이름처럼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따끔한 충고를 들을 때마다 나는 마음을 다잡게 된다.


개명이라는 시도는 모두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가장 큰 변화이자 특별한 사건으로 남아있다. 내 시도를 인정해준 이들은 모두 ‘소예’라 부르지만, 여전히 날 억압하고 뒤흔들고 싶어 하는 가족들은 절대 ‘소예’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개명했다는 사실이 엄청난 도약이라 생각해본 적 없다. 바꾸자 마음먹었을 당시의 상태나 생각을 모두 잊고 지내면서 그냥 조금 특별한 기분 때문에 한 갑작스러운 행동으로 생각했는데 훗날 상담을 진행하면서 상담사에게 그 당시의 내 마음을 말로 표현해주셨다. 또, 받아주는 사람들과 아닌 사람의 심리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그 설명을 들으니 내 부모, 친인척이 왜 예전 이름을 고집하는지 알게 됐고 이름 이야기만 나오면 아주 특별히, 가장 잘한 일이라며 항상 칭찬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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