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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셜리 Aug 12. 2022

성인이 되어버린 아이







자주 들었던 말 중 사람의 팔자는 ‘이름 따라간다’였다. 어떻게 사람 인생이 고작 이름 하나로 움직이겠냐 믿지 않는다고 단언했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개명이 된 후 어두웠던 내 삶이 환하게 빛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나는 여전히 가족으로부터 고통받았고 독립이라고 대전으로 첫 자취를 시도했지만, 독립자금 없이 시작한 자취의 꿈은 쉽게 무너져 현실 앞에서 쓴 맛을 느껴야 했다.


내가 가볍게 여겨 시작한 독립으로 엄마와 동생은 긴급생계비가 줄었다고 매일 전화로 타박과 함께 신청한 코스트코 회원 삼성카드 대금 달라는 독촉을 들어야 했고, 당장 구해지지 않는 알바와 낯선 환경으로 힘들어하는 와중에 엄마의 극심한 돈 독촉에 매일 눈물을 흘러야 했다. 결제일이 도래하지도 않았는데 돈 달라는 연락은 흡사 대부업체를 연상케 했다. 엄마 때문이라도 내가 언젠간 생활고에 고통받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가 나올 것 같아 매일 수시로 오는 독촉 전화, 독촉 문자를 받자 적당히 하라며 펑펑 울어야 했다. 그 당시 난 택배 물류를 뛰어서라도 대금을 직접 카드사에 입금했으나 어김없이 오는 연락에 지쳐 돈 없다, 결제일 되면 알아서 입금할 건데 왜 이리 사람을 말려 놓냐고 울분을 터트리자 엄마는 미안하다는 말도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이어가던 대전에서의 첫 자취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알바는 구해지지 않고 일이란 일은 다 잘 안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카드 콜센터에 입사해 보름도 안 되어 블랙리스트 고객을 홀로 응대하면서 터졌다. 모두가 주목하고 있으나 아무도 도와주지 않던 그 고객과의 연락 이후, 매일 회사 건물 위에서 투신하는 꿈을 꾸다 경련으로 일어나 공황상태에 빠지는 것으로 정신건강에 경보음이 울렸다. 게다가 청소년기부터 앓고 있던 극심한 우울은 주기적으로 고통스러워하다 말았는데 성인이 된 후 나를 괴롭혔다. 원래 갖고 있던 우울과 공황이 더해지니 점차 표정을 잃었고, 의욕조차 없었다. 일 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하면서 콜센터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무단 퇴사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 후론 공과금도 못 낼 만큼 생활이 많이 어려워지면서 나라에서 지원받을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알아봤지만, 엄마에게 집이 있어 모두 퇴짜 맞았다.


대학도 안 나온 고졸, 번번한 경력사항이나 자격증도 없어 어디 내세울 곳도 없어 자존감도 떨어지고 위축되었다. 내가 가진 우울과 불안, 공황장애만으로도 나는 어떤 곳에서도 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얼굴에 생기가 없고 잔뜩 그늘져 있는데 누가 뽑아주겠는가. 수시로 오는 공황발작으로 근무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나조차도 인지되는데 말이다. 하루에도 열댓 번씩 오는 발작으로 숨 쉬기도 어려웠다. 공황발작이 오는 횟수만큼 수시로 엄마는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으려 나에게 전화했지만 안 받고 부재중으로 남겨두는 일이 잦아졌다. 전화를 안 받으면 엄마는 전화받으라는 협박 문자를 콜백 할 때까지 해 이게 정말 사는 건가 싶을 때가 많았다.



하루는 잔뜩 토하고 발작으로 울다 괜찮아진 것 같아 엄마의 전화를 받았던 적이 있다. 통화내용은 매일 똑같았다. 아빠가 집 구해서 안 돌아온 이야기부터 자신의 언니 즉, 이모들이 어떻게 차별해 마음이 얼마나 상하고 화가 나서 미칠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항상 듣던 이야기, 항상 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두고 하는 말들을 듣다 듣다 스트레스로 전화받던 중 공황이 오면서 급하게 끊어버렸다. 숨을 아무리 고르게 내쉬려 해 봐도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과 헉헉 거리는 숨은 나를 더 혼미하게 만들어 대처가 어려웠다. 엄마는 자신이 말하는데 함부로 끊었다고 열받아 문자와 전화를 번갈아 하며 날뛰고 있자 계속 피하는 것이 어렵다는 판단에 조금씩 나아질 때쯤 최대한 숨기기로 하고 다시 전화연결을 했다. 기다렸다는 듯 벨이 울리기도 전에 받아 노발대발하며 난리 치는 소리 듣는 순간, 고르게 내쉬며 숨기던 공황이 막을 틈도 없이 크게 터져 나왔다.


헉, 크…, 허, 으, 헉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저 숨을 컥, 컥 먹는 소리만 내자 엄마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조금 놀란 것인지 아주 작은 목소리로 “… 야” 한마디 던졌다.

장시간 동안 발작이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에 숨을 턱 턱거리며 나중에 전화하겠다는 말을 겨우 하고 끊어버렸다. 그 후에도 엄마와의 통화 중 엄마의 일부 음성을 듣고 어떤 자극을 받게 되면 여지없이 공황이 찾아와 적게는 10분, 최대 30분 이상의 공포스러운 발작에 빠져 괴로워했다. 내가 발작하는 소리에 놀라 엄마는 엉엉, 울기만 할 뿐이었다. 공황발작이 심해지고 생활이 더 어려워지면서 엄마의 작은 독촉에도 쉽게 신경질을 냈다. 누구보다 일하고 싶고 잘 정착해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는데 내가 보는, 놓인 상황을 대충 봐도 더 이상은 어려울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엄마는 뜬금없이 내 실비보험 대출을 받아 나에게 주었다. 내가 징징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다는 말과 함께. 징징거린 적은 없다. 엄마가 한 달이나 남은 결제일에 대부업체처럼 독촉하는 연락에 제발 그만하라고 지친다고 하면서 운 것 말곤 딱히 없다.


돈이 궁한 것은 맞고 생활이 힘든 것 역시 맞지만, 엄마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돈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싫다고 거절하는데도 자식이 돈 없어 우는데 그럼 어떡하냐고 울분을 터트리며 말하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엄마에게 돈을 받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이 돈을 받는다고 해서 상황이 좋아지는 게 아니라 결국 나에게 독이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엄마에게 진짜 바랬던 점은 돈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지지해주길 원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대놓고 말도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돈과 울부짖음 뿐이었다. 대출받아 모두 나에게 줘서 동생은 매일 굶고 있다는 말을 수 만 번은 들었다. 나 역시 며칠 굶고 지내다 딱 한 번 시켜먹으면 우리는 굶는데 너는 그래도 되냐며 일도 안 하면서 황제 같은 삶을 산다고 심한 면박을 줬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는 꼭 붙이는 말이 있었다.


너만 아니었으면…, 너만 아니면


원하지도 않는 돈을 받아 매일 구박을 받으며 지냈다. 평생 들어온 말인데도 전혀 면역이 되지 않고 앞뒤 사정 따위 생각할 시간도 없이 모든 일들이 다 내가 살고 있기에 일어난 일 같아 나만 없어지면 되는 문제인가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우울은 더 심해졌다. 그 뒤에도 나는 다신 보기 싫은 아빠를 엄마 때문에 만나야 했다. 집 나가 알아서 잘 사는 아빠를 다시 만나는 것에 대해 극도로 거부했지만, 엄마는 날 궁지로 몰아넣었다. 아빠를 꼬셔 대전으로 끌고 갑자기 찾아오더니 안 나타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난리 치자 완강하게 거부했음에도 엄마의 협박에 엉망이 되어 있는 몰골로 아빠를 다시 만났다. 우울증으로 마음은 엉망, 공황으로 정신은 혼미하니 꾸미고 할 정신도 없어 빳빳하고 윤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헝클어진 머릿결에 생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우중충한 얼굴로 다시 마주했을 때, 나는 또다시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내 꼬락서니를 보고 분노하며 밖으로 나가자 엄마는 따라나서라며 날 밀쳐 마주하게 됐는데 아빠가 내 앞에서 한 손으론 담배를 거칠게 뿜으며 입으론 온갖 욕설을 해 어린 시절 맨발로 집을 도망쳐왔던 트라우마가 생각나 가슴이 터져버리는 것 같아 무서워 눈물이 터졌다.


소리 없이 울자 아빠는 어이없어하며 위협적으로 다가와 나를 툭툭 쳤고 나는 더 화들짝 놀라며 이만 집으로 가겠다는 말만 하고 돌아오는 밤 길에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엄마가 아무 준비도 안 된 나와 아빠를 만나게 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래도 버티고자 하는 의지는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아빠가 화가 났다며 또다시 너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 너만 아니었으면 동생이랑 자신이 그렇게 눈치 보지 않았을 거라는 말을 수시로 했다. 아빠를 만나고 며칠은 그나마 편의점이라도 나가던 내 발길이 끊겨 이불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안 했다. 아빠를 만난 날을 생각하면 공포감에 밀려왔고 예고도 없이 오는 장마처럼 눈물만 계속 흘려야 했다.

엄마는 정말 괴로워하는 나를 알면서도 며칠을 구슬려 아빠에게 300만원을 받으라고 종용했다. 정말로 내가 아빠에게 300만원 이야기 꺼낼 때까지 괴롭혀 결국 받아냈다. 받고 나니 엄마의 태도는 180도 달라져 비난하는 목소리로 나에게 죄책감을 심어줬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빠 역시 300만원을 카드 대출로 받아 나에게 준 것이었다. 그러고 나니 힘들게 막노동하는 아빠를 아프다는 핑계로 300만원 뜯어낸 아주 질 나쁜 아이처럼 대하면서 외가족에게 말하고 다녔다.


그 후에도 나는 엄마 아빠에게 돈 뜯은 아이로 남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엄마 아빠는 없는 형편에, 굶어가며 큰 딸에게 헌신한 착한 부모로 남아 주홍글씨처럼 모두가 전후사정도 모르면서 나를 향해 비난의 손가락질을 했다. 엄마가 대출해서 준 돈, 안 쓴 건 아니다. 엄마의 강요로 받은 아빠의 300만 원 한 푼도 안 쓴 건 절대 아니다. 인정할 부분은 인정한다. 일부 급한 곳에 쓰긴 했지만, 그 돈 모두 원해서 아프다는 명목으로 달라고 한 것이 아니다. 내가 바란 것은 돈이 아닌 감정적인 인정과 지지였을 뿐이고 내가 원하지 않는 만남에 대해 존중받아야 했다. 존중과 인정, 그리고 그런 긍정적인 반응이 없이 모든 일이 일어나니 결국 나는 넘어지고 말았다. 동네 정신과의원으로 다니던 것이 상태가 심각해져 대학병원으로 옮겼고 수시로 119에 전화해 응급실로 실려가 5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나오지 못하는 날이 허다했다.


그렇게 21살, 작은 일탈과 같던 첫 독립 시도는 보험대출과 300만원을 뺏은 딸년으로 남아 또다시 광주로 돌아오게 되었다. 광주에 돌아오니 당연히 정신과 치료는 멈춰야 했다. 내 부모는 내 정신적 고통이 정신력이 약해서 혹은 그냥 나약하니까 생긴 것이라고 단정 지었고 별 일 아닌 해프닝 정도로 치부했다. 엄마는 나와 아빠를 강제로 만나게 함으로써 아빠는 월세를 구해 살았던 것을 처분해 또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엄마는 뒤에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수많은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 들 때도 있다.


쓴 실패 같긴 해도 한 번 맛본 독립의 자유를 알게 된 이상 여기서 포기하기엔 너무 이르다는 생각에 특수한 학과가 있는 학교를 알아보다 서울에 한 전문학교 수시를 넣어 합격하면서 고시텔 월세와 생활비를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서울로 상경했다. 그러나 내 부모가 원하는 것은 이름 있는 대학이지 전문학교가 아니었다. 직업훈련처럼 이루어진 전문학교라는 것을 알게 되자 나에게 학교 그만둘 것을 강요했고, 나 역시 대학에 대한 욕심이 큰 아이였기에 군말 없이 자퇴서를 냈다. 자퇴서를 내자 서울에 있는 내가 못마땅한지 월세 내기 10일 전에 생활비를 끊어버리겠다는 문자 하나 남겨두고 정말 생활비를 끊어버렸다. 잠깐의 기회나 대책도 안 주고 대뜸 생활비를 끊어 조금이라도 더 버텨보고 싶은 마음에 매일같이 알바 면접을 3~5곳을 시간 쪼개가며 봐야 했다. 갑작스러운 통보와 내 앞에 놓인 불확실한 미래로 나는 불안도가 극심해지면서 당장이라도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알 수 없는 공포감에 휩싸여 매일 밤을 눈물로 보냈다. 상경할 당시 신촌에 있는 한 고시텔에 월세로 들어갔지만, 감당이 안 돼 결국 회기역 근처 고시원으로 옮기면서 덥고 위험한 공간에 지내니 삶이 퍽퍽하다 못해 말라버려 매일 암흑같이 느껴졌다. 그렇게 힘들게 지내지 말고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면 되지 않나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도 여기 있을 명분이 없다고 괜히 안 되는 일 잡고 늘어지지 말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 사람도 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말도 안 되는 상황보다 가족이 더 무서운 아이였다.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가족과 함께 지내며 보내온 불행한 기억만 떠올라 다시 돌아가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내가 버텨서 가족이라는 상처와 멀어지고 벌어진 부위를 봉합할 생각만 했다.


그래도 정말 운이 좋다면 좋았던 것은 교회 목사님 소개로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 회사에 입사하게 되면서 회기역 고시원에서 벗어나, 곧 결혼하시는 교회 어떤 분의 계약기간이 남은 집으로 들어가 잠시나마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사회생활하면서 느낀 것은 나는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을 억지로 맞춰놓은 것처럼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나도 참 바보 같고 어렸다. 낙하산으로 생각해 함부로 “저는 사장님의 지인으로 들어온 낙하산이에요~.” 이야기해 회사 모든 사람들에게 눈초리를 받았고, 실질적 회사의 큰 책임자였던 이사님은 사장님이 추천해 교회에서 온 아무것도 모르는 얘로 못마땅해하셨다. 인사를 해도 안 받아주셨는데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매번 창고로 불려 다녀야 했다. 원래는 세공을 배우기로 하고 입사했지만 택배 포장만 주구장창했다.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또 창고에서 혼나 택배 박스를 혼자 60개씩 옮기며 발로 뛰어다녔다. 이미 찍혀버린 탓에 더 열심히 해도 나는 정직원이 되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좌절감에 빠져 매일 퇴근길에 소리 없이 울었다. 매일 내 앞에서 내 욕을 하고 은근한 따돌림에도 버티면서 더 열심히 하면 조금이라도 달라질까 싶었지만, 일을 안 알려주고 하라고 했다가 실수가 나오면 한숨만 푹푹 쉬고 짜증만 내더니 나중에 일을 아예 안 줘 책상에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나니 현타가 와 지쳐 결국 내 입으로 그만두겠다는 말을 했다. 그만둔다는 말을 하니 표정이 밝아지신 상사분을 보고 허무함과 자괴감에 허덕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언가 하고 싶어도 그때 그 회사 안에서 있었던 일과 그 상사의 표정이 너무 또렷하게 기억 나서.


 직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또 그만뒀냐, 실패자, 사회 부적응자라는 말을 엄마는 매 번하면서 애같이 왜 그러냐며 나의 결핍된 사회성이 문제라고 매일 내 탓만 했다. 사실 결핍된 사회성은 가족에게서 부족한 사랑과 관심으로 시작돼 무관심을 비롯돼 배운 것인데 엄마의 그런 타박을 매일 듣고 나니 정말 나는 그런 사람 같아 보여 희망이 느껴지지 않자 3년이 넘도록 나는 히키코모리가 되어버렸다.


아무것도 몰라서 실수한 말 때문에 사고는 쳤지만,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힘들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꿋꿋하게 버티다 무너진 모습을 지켜보던 친구는 정말 안타까워했다. 일할 엄두도 못 내는 내 마음을 다독여주며 잠시 쉬어가자고 이야기해줘 나에게 위로가 되었지만, 사람은 긍정적인 반응보다 부정적인 감정이나 반응에 더 기억하게 되고 예민하다. 뭐든 내 문제라고 하는 엄마 말에 나는 정말 쓸모가 없는 사람으로 생각이 돼 모든 의욕을 다 상실해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밥도 안 먹고, 물도 안 마시니 화장실 갈 일은 더더욱 없어 가만히 천장만 보다 하루가 끝났다.


생각해보면 내가 꿈에서 투신하는 장면을 보고 놀라 깨 경련으로 공황이 오는 것 외에 엄마가 내지르는 소리에 놀라 공황이 오는 날이 더 많았었다. 투신하는 꿈속 내 행동의 이유조차도 삶이 힘들다, 그 삶 속에 엄마가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아이였다. 처음 모든 부분이 어렵고 수시로 찾아오는 우울의 늪이 괴로워 내 발로 정신건강 의원을 찾아 검사와 진료를 본 적이 있다. 그때 나온 검사 결과는 정말 충격 그 자체였다. 보통 사람들의 평균치에서 적게는 3배 정도 높았고, 불안 수치 역시 기준치에서 4~5배는 높아 화병이라는 진단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진단을 듣고 엄마에게 전화로 나는 지금 이 상태래~라고 이야기했을 때 엄마는 내게 그 의사는 돌팔이라고, 네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할 거면 전화 끊으라는 말만 듣고 전화가 끊어졌다. 그때 나는 엄마에게 위로 혹은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렇게도 듣고 싶었던 아이였는데 엄마는 평생을 그러지 않으셨다. 내가 하교 후 친구와 노는 것도 싫어하셨고 아니, 경멸하는 수준으로 나를 괴롭혔다. 집에서 내가 말을 한다는 자체를 싫어해 목소리가 들리면 질색팔색 하셨다. 그러나 내 시간은 온전히 자신 또는 자신의 아들에게 쓰기를 강요했다.  나는 엄마가 어디서 다쳐오거나 하면 찢어질 듯 마음이 아프고 내가 엄마를 보호하지 못한 것 같아 죄책감에 힘들어했다. 엄마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였지만, 엄마는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엄마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 또는 그 이하로 생각될 때가 정말 많았다. 내가 밥을 먹는 것도 싫어하고 자신과 닮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질색하고 그런 막말을 하지 말라는 말들을 내 귓가에 울릴 때마다 나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정말 속상하고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내 행동, 내가 온 힘을 다해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 하는 간절함 그리고 내 감정마저도 인정하거나 어떤 것도 하지 않으셨다. 그게 쌓여 성인이 되니 내 품에 주어 담을 수 없을 만큼 양이 많이 결국 엄마의 작은 화내는 소리, 미세한 음성에도 놀라 공황발작이 왔었던 것이다. 히키코모리로 보낸 시간 역시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 들은 말 하나에서 시작됐다. 내 우울과 슬픔보다 어떤 결과에만 집중되어 들은 이야기에 나는 심해 늪에 빠져 지냈다. 심해 늪 빠져 지내온 시간 동안 만들어진 밥 잘 안 먹는 버릇, 화장실 참는 습관, 멍하니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비난하는 나쁜 습관들이 뿌리 박혀 여전히 고치기 어렵다.


가정법을 써 만약 엄마가 내가 정신적으로 아프다는 말을 들었을 때 빈 말이라도 힘들었구나..라고 작은 공감 한 마디 던져줬다면 나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또다시 가정법을 써 내가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 그냥 “그랬어?” 혹은 “수고했다.” 짧은 말이라도 해줬다면 나는 3년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다르게 보내려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런 가정법은 가장 잔혹한 생각에 불가하다. 이루어지지 않으니 만약에 라는 단어를 들고 이루어지길 바랬던 부분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니까. 그럼에도 멈추지 못할 때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만약이라는 것은 최소한, 아니 적어도 이 정도쯤은…? 이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가족에게 상처가 많은 아이가 시간이 지나 어쩔 수 없이 성인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성인이 되기 전에 곪은 상처가 터진다면 불행 중 가장 다행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리고 나 외에 많은 어른 아이가 아직도 아프거나, 터진 상처를 봉합할 줄 모른다. 내가 사회의 어떤 한 명이 되는 것도 어려울 때마다 나는 왜 그럴까 하며 자책할 때도 있고 좌절하다 넘어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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