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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셜리 Aug 24. 2022

더 이상 못 참아! 아니 안 참아!





성인이 되고 서울로 집을 구해 살고 보니 참, 이제야 아쉬운 마음이 들었나 보다. 갑작스럽게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 시작한 아빠와 끝까지 개명 전 이름을 따뜻하게 부르는 엄마를 보니 가슴에서 천불이 났다. 연락을 잠시 멈추기로 한 일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끝이 났다. 내막은 엄마와 큰 이모가 교회에 전화해 병원비 때문에 가족관계를 버리고, 있지도 않는 학대 사실로 사람들을 매수해 내 편으로 만들었다고 호소하면서 나는 부모를 버린 패륜아가 되어 있었다. 교회에선 상의도 없이 기초수급을 신청한 것을 시작으로 모든 것을 문제 삼았다. 아빠는 내가 친자식도 아닌데 업어가며, 카드대출로 생활비를 주다 잠깐 멈춘 것이 죄라면 천벌 받을 짓으라는 식으로 나왔고, 엄마는 자신과 자신의 아들을 굶겨가며 빚내서 희생했지만, 나는 그런 엄마를 매도한 재활용도 안 되는 나쁜 인간으로 누구도 내 말을 듣거나 믿어주지도 않았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진실이 섞인 거짓말로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내가 진실을 이야기한다고 주장해도, 눈물로 호소해도 달라지는 것 없이 오히려 혼만 났다.


답답하고 가슴이 막막했다. 나는 학대로 인해 트라우마와 해리장애 그리고 수많은 신체화로 고생하고 폐쇄병동까지 입원하는 중에, 평소 좋아한 지인이 결혼해서 아주 잠깐 외출한 것뿐인데 모든 것이 쇼라고 여기는 교회 웃어른들. 아무리 이 일이 어떻게 거짓말이고 폐쇄병동에 입원까지 할 일이 있냐 따져 물어도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 답답해하며 극도의 스트레스로 괴로워하자 나에게 그럼 누구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니 삼자대면을 하자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하, 내가 아프고 힘든데 당장 내 부모 보는 것이 고통스러워 연락을 잠시 중단한 것인데 삼자대면이 말인가 싶었다. 만나기 싫다고 얘기하자 내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서 만나면 되지 않냐고 단순하게 생각하며 던지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싫으면 지금이라도 모든 거짓을 인정하고 반성하라는 말에 나는 억울했다. 내 말을 믿을 생각 아니 들을 생각도 하지 않는 모습에 이 모든 상황을 내 주치의 교수님에게 전화로 전달하니 단호하게 만나고 연락하는 그것은 안 되는 일이라고 말하시면서 정 말이 통하지 않으면 자신의 연락처를 교회 목사님에게 전달해달라고 해 결국 연락처를 넘겼다.  넘겨받은 연락처는 알겠다 해놓고 나에게 지금 당장 엄마에게 전화하라며 강압적인 말투로 나를 짓눌렀다. 억울하고 분한 심정과 억압하는 분위기에 눌려 결국 전화를 하게 됐다. 내 전화를 받은 엄마는 울면서 모든 것이 내 잘못이라는 말을 했고 30분간의 통화 내용은 ‘너 때문에’ 그 지긋지긋한 이야기를 또다시 들어야 했다. 평생을 엄마와 대화해보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 날도 역시 대화는커녕 수 없는 가스 라이팅에 결국 지쳐 과호흡이 오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구급차 타고 병원 가야 한다고 울며 애원했지만 ‘잠시만…’ 이 한 마디를 하고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혼자 1시간 동안 헐떡거리는 숨을 진정시키고 나서 복도로 나오니 잠시만, 하고 나간 주변인들이 반성할 것을 강요하던 교회 목사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어떤 단어로도 허용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받고 집에 돌아가 쌓아뒀던 정신과 약 30개 넘는 것을 죽기를 기도하며 입 안에 털어 먹었다.


30개 넘는 약을 털어먹을 당시 나는 내 의지로 먹은 것은 아니고 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말하자면 해리 상태와 제정신 사이 어디쯤 있었던 것 같다. 정말 큰 불행은 내가 그 약을 먹고 해롱거릴 뿐 죽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눈이 떠지는 것을 보니 너무나 불행하고 앞이 깜깜했다.


동공이 풀릴 대로 풀려 다시 입원해 있는 병동에 돌아와 간호사랑 눈 마주친 순간 약으로 자살 기도한 것을 들켜 반나절 동안 수액을 맞아야 했다. 교수님은 자살기도에 대해 들고 놀라 하셨는데 진짜냐는 말만 하시고 왜 그렇게 했는지에 대해 물어보지 않으셔서 조금 의아했다. 그리고 며칠 지나 상담할 곳을 찾는데 마땅한 곳이 없어 따로 교수님 연구실로 따라가서 모든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넘긴 교수님의 연락처로 통화한 사람은 교회 목사님이 아니라 엄마였다. 목사님은 받은 연락처를 바로 엄마에게 연락처를 넘겨, 엄마는 억울하다며 교수님에게 물고 늘어져 자신이 진짜 피해자라고 호소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연락처를 넘기는 건 목사님의 자유이긴 하나 적어도, 그래도 사람이면, 내가 그 목사님이었다면 내가 넘긴 병원 교수님의 연락처를 받고 한 번쯤은 상태에 대해 물어보려 전화라도 했을 텐데 말이다. 전혀 전화 온 적이 없고 엄마는 자신이 학대하지 않았다는 말만 반복하며 오히려 거짓으로 교수님을 속인 패륜아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어필했다는 사실이 어처구니없었다. 나를 담당해 치료하니 당연히 나를 믿고 있고 주치의 교수로 치료를 위해 힘써주셨다. 임상 실험하는 동안, 정기적인 내원과 입원해 치료받는 동안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학대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트라우마와 관련된 이야기와 몇 가지 심리검사를 통해 나타나는 모든 반응은 극도로 심한 트라우마 경험한 사람의 정상적인 증상이었으니 말이다.


교수님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 이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이게 중요하지 않다고? 무슨 의미인가 싶었는데 교수님이 아주 심각한 얼굴로 아무래도 엄마는 고칠 수 없는 심각한 성격장애에 속해 내가 알고 피하는 법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오랜 의사생활로 알 수 있다고 하시면서 작은 책 하나를 건네주셨다. 나르시시즘에 대한 심리학 책이었다. 지금 상황에선 모든 것이 나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말을 해주셨다. 내가 아무리 진실을 이야기하고 억울함을 표현해도 엄마는 매번 거짓말로 사람을 속일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아는 만큼 피하는 법 말고는 방도는 없다고 이야기하며 더욱 철저히 공부하고 나를 위해 피하고 도망치는 법을 배우라고 이야기하셨다.


이 일 이후 교수님이 주신 책을 수시로 읽으면서 연락을 끊어내지 못했다. 끊어내도 어떻게든 나를 찾아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는 엄마를 보니 20살, 취직을 빙자한 가출사건 때 내 통장 거래내역을 뽑아 내 위치를 알아낸 것처럼 또다시 발버둥 치다 상처만 받을 것이 뻔했기에 그냥 오는 연락과 만남은 피할 수 없었다. 그저 그냥 적절히 받다가, 바쁜 척, 아파서 못 받은 척하는 것 말고는 별 수 없었다. 교회에서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고 나는 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와 싫어하는 내색을 대놓고 들어내 상처받고 차별을 받아야 했다.


19년도 봄부터 가을까진 정말 자유롭고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어 치료하는데 불편함은 없었지만, 그 후에는 어쩔 수 없이 연락을 받고 만나고를 반복하며 매일 무너지는 삶을 살아야 했다. ‘나’는 속하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지내면서. 매일 울리는 엄마의 신세한탄은 2시간, 3시간 끝도 없었다. 전화기를 저 멀리 던져놔 20분이고 30분이고 맞장구치지 않아도 엄마는 혼자 잘도 이야기했다. 다 행복한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공허하고 무엇인가 잃어버린 사람 같다고 느꼈다. 약은 계속 늘어가고 공황발작이 심해지면서 매일 적게는 3번, 최소 1시간에서 3시간까지 이어지는 발작에 눈물도 흘릴 수 없었다. 매일 패턴처럼 오는 고통 말고도 우는 순간 나는 공황에 빠져야 했다. 코로나 사태가 심해지면서 응급실 가도 정신적인 부분이기에 늘 순번이 뒤로 물러났고 제대로 된 안정제 하나 맞지도 못했었다. 이게 사람 사는 것일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고 매일 자살충동과 싸우며 밥 한 번 제대로 먹지 못 하고 먹으면 다 게워냈는데 이상하게도 살이 쪘다. 살찐 내 모습에 엄마는 못생겼다, 뚱뚱하다고 손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태어나 매일 듣던 말이라 그 말에 상처받지 않는 내 모습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나도 내가 왜 살찌는지 모르나 엄마는 내 외모가, 내 몸뚱이가 못생기고 뚱뚱한, 그런 것만 중요한가 보다.


나는 매일 엄마에게 아프다는 말도 못 할 만큼 맞았을 때, 내복 차림으로 한 겨울에 쫓겨나는 창피함을 느끼며 학대받던 시절의 나를 보는 꿈을 꾼다. 때론 가고 싶은 대학을 가지 못해 고3 때로 돌아가 죽어라 공부하는 꿈을 꾸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눈을 떠 주변을 살펴봤다. 주변을 살피면 모든 것이 꿈과 다른데 현실과 꿈을 구별해내기가 정말 어려웠다. 아직도 어릴 때처럼 엄마에게, 아빠에게 수없는 폭언을 듣고 반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꿈을 꾸며 눈물로 깨 일어나 한껏 웅크려 그때는 지났다고 이제는 안전하다고 해도 나는 쉽게 현실 착지가 잘 안 됐다.


매일 그렇게 공황과 싸우고 자는 동안은 트라우마 재경험과 싸우다 지쳐 이러다 아차 하는 순간 내가 자살을 선택할 것 같아 두려워 다시 병원에 입원해야겠다는 결정이 섰다. 차분히 그 결정에 따라 움직였고 마음의 준비를 다 마친 후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들려오는 엄마의 여보세요 소리에 나는 울면서 숨을 껄떡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이런 딸 밖에 되지 못해서 미안해. 나는 이것밖에 안 돼. 엄마가 나 때문에 불행하고 나만 아니었다면 엄마는 그렇게 살지 않았을 텐데, 내가 정말 미안하고 나 같은 딸 때문에 고생하게 해서 미안해.”


엄마에 대한 분노와 이렇게 아픈 나에 대한 억울함을 역설적이게 표현한 말이자 엄마가 수시로 나에게 가스 라이팅 했던 말과 함께 다시 폐쇄병동에 입원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 말을 듣자 엄마는 자신이 더 미안하다며 울고 있었다. 미안해? 뭐가? 따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더 낮은 자세로 아니라고, 엄마가 뭘 잘못했냐며 내가 딸이 돼서 못 해준 게 더 많다고 이야기했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면 엄마는 나에게 감정적인 공감을 해줄 것이라고 착각했다. 항상 나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면 오히려 돌 맞았던 기억에서 나온 방어기제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엄마의 대답을 듣고 나는 철저히 우울했고 좌절했으며 엄마는 엄마로서 자격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한 번 더 알게 된 계기가 됐다.


- 그만 울어! 너 때문에 아빠가 속상해서 통화소리에 밖에 나가잖아!! 뚝 안 해? 뚝 해…, 내가 더 미안해, 엄마가 돼서 돈이 하나도 없고 너한테 경제적으로 지원 못해주니까…


20년이 넘도록 나는 엄마에게 감정적인 지지와 공감을 요구했고 필요로 하는 아이였지만, 엄마는 단 한 번을 해준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엄마에게 맞춰야 하는 사람, 엄마의 호두까기 인형으로 있길 바랬다. 좋은 부모는 돈이 많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경우에 다르지만 나는, 없는 형편에 어떻게든 지원해주는 부모도 역시 좋은 부모는 아니다. 그러니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 지원해준다고 해서, 내가 원하지도 않는 지원을 해주는 것은 엄마가 생각한 좋은 부모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돈, 정신적인 지지, 적절한 보호 등 어떤 것도 좋은 부모 기준에 엄마는 포함되지 않는다.


엄마와의 연락이 이렇게 괴로워도,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아도 나는 엄마와의 연결고리를 끊어낼 수 없었다. 언제 어디서 나를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괴롭혀 다시 자신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 엄마가 무섭고 또 교회에서 받았던 상처를 다시 받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을 엄마는 참 잘 이용했었다. 내 두려움을 귀신처럼 알아차리고 내가 무서워하는 것들을 하며 나를 휘두르고 아프게 했다.


엄마는 내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공격하려는 태도를 생각해 모든 것을 끊어내야 한다고 상담사가 조언을 해줘도 나는 어쩔 줄 몰라라 했다.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나는 엄마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었다. 한 번도 해준 적 없지만, 언젠간 한 번쯤은 엄마의 역할을 최소한이라도 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여전히 마음 작은 공간에 엄마라는 사람에 대한 사랑과 애정 그리고 안쓰러움이 있었고 미워하면서 수없이 상처와 무시, 공격을 받아도, 매일 그렇게 엄마가 엄마로서 역할을 하나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최소한 이 정도는 해주면 안 돼..?’ 하는 아이같이 있었다.


그러나 기대하는 만큼 실망감은 점차 쌓여가는 분노와 불만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엄마가 나를 짓누르려 했던 것처럼 어느 날부터 내가 엄마를 짓누르고 조정하려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그게 엄마와의 큰 충돌로 이어졌다. 내 곯을 때로 곯은 마음과 분노에 찬 감정을 알아차린 엄마가 나와의 신경전을 이기려 애썼고 나 역시 지지 않으려 더 큰 목소리로 작은 일에도 흠집을 잡으려 했다. 쌓아온 분노가 삐딱한 태도로  엄마의 심리를 불편하게 했다.


내가 시간 내서 광주에 내려갔을  서로를 향한 분노가 결국 터졌다. 아빠가 갑자기 엄마 앞에서 동생에게 용돈을 주고 나서 자신의 위치과 지휘를 존중받지 않고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엄마는 못마땅한 마음을 내게  그렇게 눈을 흘기냐며 따지면서 어릴 때처럼 나를 괴롭혔다. 트라우마에 눌려 놀란  울면서 지금 서울로 가겠다고 난리 치자 아빠가 진정하라며 나를 데리고  근교까지 드라이브를 시켜줬다. 드라이브하는 내내 아빠는 내가 서울에 자지 말아야  이유를 대며 설득을 했지만 통하지 않자  약점인 동생을 들먹였다.


“네가 가버리고 나면 엄마가 마음 불편하고 미안해서 기분이 안 좋잖아, 나도 그렇고… 네가 가버리면 엄마가 기분 안 좋다고 또 동생을 또 얼마나 들들 볶겠어? 그럼 동생은 또 얼마나 상처가 되겠냐고…”


평소 아빠에게도 내가 가족에 속하지 않는 것 같다고 느낀 적이 있다. 근데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더더 절실히 느꼈다. 당연히 동생 이야기는 나에게 통하는 약점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사용해도 통하는 약점이었다. 막 태어난 갓난아이 때부터 내 손으로 똥 기저귀 갈아주고 밥 먹이고 했다. 내 모든 시간을 동생에게 헌신한 만큼 나는 동생에게 모성애처럼 어떤 특별한 감정이 있었다. 그렇기에 엄마가 내 불만 가득한 소리에 집을 나가 동생이 슬퍼하는 모습에 내가 동생에게 상처 주는 행동을 한 것은 아닐까 자책에 빠지고 괴로워했다. 동생이 학교폭력 당한다는 말에 대전에 살던 내가 나서서 모든 가해자 가족에게 따지고 해결사로 나서는 동안 엄마는 울며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해결되어가니 뒤에서 모든 일을 자신이 한 것처럼 꾸몄다. 그래도 난 아무런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저 동생이 행복하면 그것으로 됐다고 여겼고 동생 일이면 버선발이라도 뛰는 내 모습을 이용하는 엄마 아빠의 뻔뻔한 행동을 보니 이 가족에게 나는 가족이 아니다.


트라우마에 눌려 죽고 싶어 하며 자지러지게 울고 고통스러워하는 나는 보이지 않는지 끝까지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하니 말이 통하지 않자 동생이 당할 고통과 수모만 이야기하며 내 마음을 고쳐 먹으라 강요하는 말들과 행동을 보니 아빠도 역시 나를 딸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내 느낌과 감정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상담을 하면서 재차 느꼈다. 동생을 들먹이며 나를 잡아둔 이야기에 대해 상담사에게 내가 느낀 감정, 생각을 모두 배제하고 이야기했는데 상담사는 이야기를 모두 듣고 “아빠도 가족이 아니네요?”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들은 씁쓸하고 그동안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마주한 것 같아 허탈하면서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튼 결국 난 원래 돌아가기로 한 날에 서울로 돌아와 마음이 후비는 엄마의 문자 하나로 펑펑 울어야 했다. 아빠는 나를 공격하는 엄마의 포악한 모습부터 서울에서까지 문자 하나로 나를 괴롭히는 행동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고 내게 엄마 번호는 차단하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기다렸다는 듯 차단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엄마는 수시로 내게 자신의 일을 대신해달라고 하루에도 30통은 넘게 한다. 또 속상한 감정, 아빠가 자신에게 하는 못된 짓들을 내게 풀면서 위로해주길 원한다. 내가 일하는 것도 멈추고 전화를 받아야 하고 5분 대기조로 있어야 한다. 내가 속상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1분도 버티지 못하고 바로 끊어버리면서.


고작 엄마의 연락을 차단했을 뿐인데 내 마음이 편해지고 자유로워졌다고 느꼈다. 엄마의 심한 히스테리로 아빠는 공동명의였던 집을 엄마의 명의로 바꿔줬다. 명의 변경하면서 내게 카톡을 하나 남겼는데 이상하게도 굉장히 불쾌한 감정이 들었다.


“오늘 집을 엄마 명의로 옮겼다. 너도 우리 가족이니까 알아 돼서 카톡 남긴다.”


뭐? 가족? 언제부터 내가 가족이었나? 가족이긴 했나? 그 생각이 가득했다. 가족이기에 그렇게 내 약점을 가지고 내가 아파하는데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참으라고 하나? 점차 원초적인 생각이 들면서 강한 부정으로 확신이 들었다.


나는 이 사람들의 가족이 아니야!


이 생각이 정점을 찍었을 때 나는 결국 폭발하고야 말았다. 카톡 멀티 프로필을 사용하면서 가족이라고 해당되는 사람들을 따로 프로필을 지정해뒀는데 아빠, 엄마, 동생 이렇게 세명이다. 그러나 아빠는 무슨 변덕인지 자주 카톡을 탈퇴했다 가입해 가족만 따로 지정해준 프로필에서 벗어나면서 원래 프로필을 보고 내게 외모 지적하는 카톡을 해 나를 화나게 했다.


-딸! 너는 진짜 예쁜 얼굴인데 사진 너무 보정하니까 어색해, 보정 그런 거 왜 했어ㅋㅋ 이상하잖아 너는 예쁜 얼굴이니까 얼굴에 자신감을 가져! 자신감을 갖어도 충분히 그래도 되는 얼굴이야!!


그 카톡을 간략하게 쓰면 이 정도지만 실제로 받았던 내용은 무례함의 끝을 달렸다. 얼굴 안 본 지 2달이 넘었을 때 찍은 사진이고 운동을 시작하면서 살도 많이 빠져 보정이라고 한 건 따로 없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내게 자신감을 운운하는 아빠의 카톡을 보자마자 분노가 치밀었다. 그냥 넘어가려 했지만 매번 자신감 운운하며 외모 지적만 해대는 태도에 넘어갈 수 없었다.


- 보정을 하면 다 자신감이 없는 거야? 왜 멋대로 생각하지? 내가 보정을 하든 말든 내 마음이고 설령 보정을 했더라도 그건 내가 원해서 한 내 자유야. 아빠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내 자유를 침해할 권리는 없는 것 같은데? 함부로 내 자신감을 운운하고 그래? 아빠가 그렇게 카톡을 보내니까 아빠가 한 말처럼 그런 사람이 된 거라고 생각은 안 해봤지? 함부로 자신감 어쩌고 하면서 얼굴 평가하고 지적질하지 마. 덕분에 기분 제대로 상했고 불쾌했으니 답장은 안 해도 돼.



더 이상 못 참아! 아니 나는 이제 안 참아!!!! 부글부글 끓는 분노에 카톡을 보내고 한동안 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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