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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셜리 Sep 07. 2022

30초, 짧은 만남 속 영원한 이별

아빠의 짧은 장례식




부고 문자를 받고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아빠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되냐 였다. 걱정과 다르게 다행히 아빠의 시신을 화장돼 추모의 집에 5년 동안 보관된다는 것을 알고 응어리진 마음이 녹아내렸다. 학원 옥상에 올라와 바람을 맞으며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는 눈물로 하늘을 바라보며 어딘가 있을 아빠에게 애써 담담한 척하며 “우리 곧 만나요.” 속닥속닥. 한결 편해진 얼굴로 학원 교육생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핸드폰을 확인했는데 미처 받지 못한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 아빠의 무연고 소식을 들으면서 연락하게 된 사촌오빠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부재중 떠 있길래 전화했어.

-어, 그, 잘 지내지?

-나야 뭐, 그럭저럭

-그래, 그.. 너도 문자 받았니?


문자, 오전 10시 넘어서 온 아빠의 부고 문자를 말하고 있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잔뜩 날이 서 경계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받았어.


잠시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고 침묵이 흘렀다. 짧은 침묵에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켜야 했다. 반대해도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갈 생각인데 반대하는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돌아올 말이 다 알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장례식 갈 생각이야?


오빠의 목소리에서 짜증과 불평이 느껴졌다. 내가 가지 않기를 바라는 목소리처럼 느껴졌는데 잠시 고민하다 오빠에게 짤막한 소리로 간다고 대답했다. 많은 고민을 했지만, 거짓말하며 가는 것은 정말 아닌 것 같아 솔직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가지 말라고 말릴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의외였다.


-그래, 안 그래도 고모도 갈 생각이신 것 같아. 이 전화 끊고 바로 고모가 전화할 거야. 전화 잘 받아주고 나중에 보자

-어? 으응.


등기받고 연락했을 땐 고모라는 사람은 너무나 단호하게 지켜보는 것조차 안 된다며 날 뜯어말렸다. 3주라는 시간이 흘러 깊은 슬픔과 좌절, 후회로 친아빠의 장례를 보고 나와 다른 세상으로 보내주기로 결심하면서 매일 기다린 연락이었다. 상담사가 엄청 힘들 거라는 말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장례식을 혼자 다 감당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참 후에 울리는 고모의 전화를 보고 옥상을 빠르게 올라와 받았다. 고모는 나에게 갈 생각이냐고 물어보시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그래, 같이 가자.’ 대답해주셨다. 사실 가기로 마음먹었지만, 오전에 장례가 진행되는 서울시립승화원까지 가는데 보통 험한 길이 아니었다. 무서워서 면허도 못 딴 쫄보가 대중교통을 이용해 가려니 환승만 최소 4번을 해야 했고, 다녀온 후에 예약한 정신과 정기적인 내원은 어려워 보였다.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지만, 이미 결정했고 보고 이별하는 것이 나에게 있어 가장 최선이라고 판단했기에 어떻게든 가려고 했는데 고모가 같이 가자는 말에 한시름 놓게 됐다. 나와 마찬가지로 고모도 원래는 보고 싶지 않았고, 갈 이유도 없다고 여기셨다고 하셨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오지 않는 연락에 조바심이 나면서 일이 끝나면 바로 구청에 연락해보려 핸드폰을 꺼냈는데 늦게 부고 문자를 확인하시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해주셨다. 매일 내 생각하시면서 언제 한 번은 밥이라도 먹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셨는데 삶이 바빠 연락할 생각만 하다 이제야 연락했다고 미안하다는 말을 해주셨다. 그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하면서 고모는 조심스럽게 엄마에 대해 물어보셨다.


-엄마는 알고 계시니…?


무슨 의미일까 한참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엄마가 알기를 원하시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 묻는 것일까. 생각해봐도 의미심장한 질문에 엄마와 연락 안 한 지 2달이 넘었다고 대답했다. 고모는 화들짝 놀라시면서 이유를 물어보셨는데 솔직하게 고모에게 엄마가 날 많이 때려 사이가 좋지 않다고 답했다. 내 답을 들은 고모는 허, 작은 한탄 소리를 하더니 처음 연락했을 때 엄마와 친아빠 사이에 있던 일들을 말하다가 말았던 이야기를 해주셨다.


-너네 엄마는 대체 왜 그런다니, 네 엄마 때문에 아빠랑 헤어진 거야. 사람을 정도껏 피 말려놔야지, 일하는 사람을 새벽 내내 잠도 못 자고 하면서 네 엄마는 그렇게 낮에 자고 새벽에 아빠만 보면 들들 볶았어.

-…아, 그랬어요? 뭔지 알 것 같아요..

-그래, 아휴, 말도 마! 네 아빠한테만 그랬겠니! 나한테도 어찌나 사람 미치게 하던지 너 있는데도 질려서 내가 연락 끊고 살았어!!!


고모의 말이 거짓말로 느껴지지 않는다. 평생을 보고 자란 엄마의 모습을 그대로 고모가 똑같이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인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와 새아빠를 들들 볶기도 하고 잠도 재우지 않았다. 남녀 사이는 내가 그 당사자가 아니라지만 엄마가 나에게, 새아빠에게 해왔던 것처럼 했다면 고모의 말처럼 엄마 때문에 난 아빠 없는 아이로 손가락질받았다는 사실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계속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고모는 한숨을 쉬더니 하시던 말을 끊고 아빠 장례식에 대해 물어보셨다.


-너도 장례식 갈 거면 오빠 차로 다 같이 움직이자. 안 그래도 저기 광주에서 아빠 친구들이 오신다고 하시거든? 일단 고모가 일하다가 전화한 거라 이따 다시 전화할게.


짧게 대답하고 통화를 끝냈다. 통화를 끊고 보니 잠시 멍해졌다. 그때 그 기분을 이야기한다면, 나는 뒤통수를 아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평생을 엄마와 살면서 아빠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처음에는 내 세상의 전부인 사람이 그리 힘들게 살아온 것에 대해 마음이 미치도록 아프고 내가 엄마의 그 빈자리를 채워주고 싶었다. 그 아픔도 다 내가 안고 살고 싶었는데 친아빠가 돌아가시고 고모와 사촌오빠를 다시 만나면서 내가 아는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마주해야 했다. 성인이 되면서 친아빠에 대한 엄마의 이야기는 믿지 않았지만, 고모와 잠깐 나눈 이야기는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증오하기를 바라면서 세뇌하려는 듯 똑같은 말만 하는 엄마의 말과 너무나 달랐다. 고모의 말을 한 톨도 믿을 수 없는 신빙성 없는 말이 아니라 내가 평생 보고 듣고 느끼고 자란 그대로 그 시절 있던 이야기를 하시니 거짓말로 듣기 싫어하는데도 이야기했던 엄마에게 짜증이 났다. 학원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다시 고모에게 전화가 왔다. 고모는 아빠 친구들과 동선이 맞지 않아 아무래도 장례식 전날 고모 집으로 와서 자고 함께 움직이길 원하셨다. 나는 오히려 좋다고 대답했고 고모와 아빠 친구들이 타야 할 서울행 버스 시간을 알아봤다. 고모는 내게 먹고 싶은 음식이 뭐냐고 물어보시더니 생각해보라고 하시곤 짧은 통활 끝냈다. 아빠의 장례식을 기다리며 매일 수천번 쓰고 지웠던 편지를 썼다. 요즘엔 편지지도 흔하지 않아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겨우 찾은 편지지에 연습했던 내용을 적었다. 다 적고 근처 꽃집으로 가 사장님과 많은 상의 끝에 작은 꽃다발을 예약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지나 일요일이 됐을 때, 나는 준비한 꽃과 편지, 고모에게 줄 속초에서 산 핸드워시와 간소한 짐을 챙기고 고모의 집으로 향했다. 고모가 사는 곳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내가 기억하는 사람이 고모가 맞을까, 그때 내가 무척이나 부끄러워하면서 좋아했던 오빠를 만나는데 그 오빠가 정말 맞을까 계속 생각하고 그때의 얼굴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생각나지 않았다. 만나기로 한 역 출구에서 이리저리 헤매다 고모를 만났다. 낯설지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나를 보고 고모가 으이구! 하시더니 왜 이렇게 살이 쪘냐며 반가워하는 목소리로 대뜸 잔소리를 하셨다. 잔소리는 엄청 하시면서 내 손을 꼬옥 잡아 팔짱을 꼈는데 새로운 느낌이었다. 난 고모를 만나기 전 상담하는 시간에 고모를 만나는 일이 무섭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나는 밝은 척, 활발한 척은 다 하지만 마음 깊이 경계를 하고 겁을 낸다. 엄마에게 맞고 지냈던 것처럼 함부로 믿었다가 괜히 마음 다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늘 있었는데 고모가 잡아준 손과 다정한 눈빛 그리고 말투에 아주 조금은 경계심이 풀렸다. 내가 누군가의 손을 잡고 깍지를 낀다니 몽글몽글 따뜻한 느낌이 심장을 감쌌다. 고모는 밥 안 먹을 나에게 맛있는 수제 햄버거 집이 있다며 같이 가자고 하시면서 고모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해주셨다. 가는 길동안 들은 이야기는 입이 떡 벌어졌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이복오빠에 의붓동생, 새아빠 등 가족관계가 복잡하다. 근데 아빠가 살아온 세월에 아빠의 가족관계도 복잡해 자세한 설명이 어렵다고 하셨다. 하하, 어이없는 억지웃음이 터졌다. 먼 길을 돌아 돌아 고모가 말한 햄버거집에 도착해 주문을 한 후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고모가 자신을 기억하냐는 질문을 하셨다. 내가 기억하는 그분이 맞는지 모르겠다며 기억나는 그대로 이야기하자 고모가 잠시 아무런 말도 안 하셨다. 고갤 갸웃거리자 고모는 어떻게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냐고 물어보셨다. 순간 어!? 싶었다. 내가 그리도 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하며 소중한 기억을 보물처럼 간직했던 사람을 20년 만에 만났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고모는 내가 어떻게 고모를 만나러 가야 했는지 어디로 가서 누구를 만나고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다 기억해내는 날 보며 신기해하셨다. 확신할 수 없었던 과거의 관계가 확실해졌다. 매번 내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내가 갖고 싶어 하던 선물을 수줍게 내밀며 축하한다고 이야기해준 오빠가 통화 속 그 오빠가 맞았다. 보고 싶어도 만날 수 없었던 사람은 나의 가족이었다. 아빠 얼굴은 기억하냐고 물어보셨는데 내가 어릴 적 엄마에게서 아빠 사진이 있는 민증을 본 적이 있다고 대답했고 정확한 얼굴은 기억하지 않지만, 얼굴의 굵기 등 라인은 기억한데 그게 아빠 얼굴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고모가 아빠 사진이 하나도 없어 장례식 때 사진 걸고 싶어도 못 걸어서 아빠 친구분에게 받은 아주 오래된 친구분의 결혼식 때 사진이 있다고 하시면서 보여주셨는데 내가 알고 기억하는 얼굴과 똑같아서 놀랬다. 고모는 내게 아빠가 널 챙기라고 두고 갔나 보다 하시면서 마음이 많이 걸려서 너랑 연결시켜준 것 같다며 이야기하셨다. 아닌 것 같지만 어떻게 보면 맞는 말처럼 느껴졌다. 햄버거를 다 먹고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또 있다며 고모의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오빠에게 전화를 하며 문 열라고 소리치는 고모를 보고 웃기다고 생각했다. 내가 오는데 준비도 안 하냐고 짜증 부리는 고모와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오빠의 목소리에 애틋하면서 원수처럼 지내는 딱 모자 사이에 웃음이 났다. 고모 집을 딱 도착하니 저 멀리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어색하지만 최대한 밝게 “안녕, 오빠?”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건네자마자 고모가 희한하다며 얘가 다 기억하고 있다고 오빠에게 말했다. 어떻게 해야 그 당시 고모의 집을 갈 수 있었고 누구를 만났고 내가 어떻게 했었는지 다 기억한다는 말을 들은 오빠도 희한하네~ 하고 웃었다. 오랜만에 본 날 뚫어져라 보길래 민망해 괜히 “뭘 봐!” 큰소리를 쳤다. 그러자 오빠가 예쁘게 잘 자랐네~ 대답하자 고모는 콧방귀를 뀌며 “얼씨구, 지랄하고 있네.” 그 말에 모두 엄청 크게 웃었다. 고모는 내게 자세한 이야기를 물어보셨다. 어떻게 살았고,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냐는 질문에 차분히 이야기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엄마와 아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전화로는 자세히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


친아빠와 엄마는 운명처럼 만났다고 하셨다. 아! 엄마가 예전에 나를 갖고 아빠가 용감하게 자신의 손을 잡고 외할아버지 집으로 가 맞을 각오를 하고 결혼 허락을 맡았다는 말을 듣은 적이 있다고 했는데 고모가 어이없어하면서 그거 거짓말이라고 하셨다. 순간 멍해지면서 고모의 말을 들었는데 정말 황당했다. 아빠는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해 반대하셨다고 하셨다.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고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면 그때 생각해보자 합의를 했지만, 시간이 지나 엄만 덜컥 나를 임신했다고 폭탄선언을 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아빠는 나와 엄마를 책임지기 위해 공장을 차렸고 불합리한 거래처의 계약조건에도 굳건하게 버티고 계셨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듣는데 나는 엄마가 일부로 피임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아는 엄마는 아빠를 잡기 위해 충분히 그럴 짓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으니까.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다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엄마의 행패였다고 하셨다. 아빠의 공장 직원과 노래방을 가거나 낮에는 자고 밤만 되면 퇴근한 아빠를 밤도 못 자게 괴롭히면서 누구랑 만났냐고 괜한 의심을 하고 힘들게 했다고 한다. 심지어 일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 공장 직원들에게 매일, 받을 때까지 전화를 해 아빠의 행선지를 물어보고 힘들게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을 듣는데 나는 우리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네…, 알죠. 그거, 엄마가 뭐 그렇죠.” 대답했는지 그 말을 하면서 어찌나 비참한 마음이 들던지 참 마음이 복잡했다. 그렇게 살면서 버티고 버티다 개미 한 마리 죽이지도 못하는 마음 약한 사람이 못 참고 부들부들 떨며 옷장을 쳐 부셨다고 했다. 더욱 놀라웠던 건 오빠가 한 말이었다.


어릴 적 고모네랑 우리는 층은 다르게 해서 같은 집에 살았는지 알 수는 없는데 오빠가 어린이집 다녀와서 날 보러 오면 난 늘 잠에 빠져서 일어나지도 못했다고 이야기했다. 그 뒤에 나오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항상 끝날 때마다 와서 보면 자는 날 흔들어 깨워도 일어난 일이 많지 않았고 겨우 일어난 날 보고 그동안 뭐 했냐 물어보면 잤다는 말 밖에 안 했다고 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린 내게 수면제를 먹이고 정작 엄마는 놀러 다니거나 아빠의 직원들과 노래방에서 놀거나 했다는 것이었다. 충격이었다. 나와 고모 그리고 오빠와 만남이 끊어진 것은 4살 정도이며 완전히 헤어진 건 엄마가 재혼하면서 그랬다고 했는데 그럼 대체 언제부터 그 어린아이에게 수면제를 먹였다는 것일까. 이것도 별거 아닌 이야기라는 말에 더 충격적이었다. 오빠는 엄마를 그 여자라고 지칭했다. 그럴 만도 했다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고 고모와 오빠는 화도 안 난다며 무표정하게 이야기했다. 나도 역시 살아온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자 오빠는 그럴 것 같았다고 체념한 듯 쯧, 소리와 함께 모니터를 봤고 고모는 내 이야기를 듣고 분노하셨다. 고모는 전화기를 들고 예전 같이 일했던 사람들에게 전화를 하며 아빠의 부고와 나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있냐고 물었는데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이야기에 기가 찼다. 엄마는 날 아직도 패륜아로 이야기하고 다니고 있었다. 병원비에 눈이 멀어 굶겨가며 돈을 줬지만 부모를 버린 천하의 나쁜 년으로 말이다.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무작정 전화해 하소연하며 나를 나쁜 년으로 만들고 자신에게 동정을 구걸하는 모습, 내 이야기하고 다니는 꼴이 화가 났지만 어처구니없는 엄마라는 사람의 대처에 더 열불 내며 이런 이야기를 막 하고 그걸 또 믿고 그랬냐고 직접 보지도 않고 뭘 안다고, 대신 화내셨다. 나를 보고 고모는 많이 놀랬다. 흐트러진 눈동자부터 먹는 약의 양 그리고 당해본 사람만 아는 그 심적 고통까지. 20년 만에 다시 만난 조카 대신 열불을 내며 변호해주는 고모를 보고 처음으로 아픔을 인정받은 것 같았다. 아무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다들 엄마 이야기만 듣고 편파적인 생각만 해 내 이야기는 무시했는데 고모는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대신 화내시며 나를 나쁘게 말하고 다닌 것에 대해 아니라고 소리 내주는 것에 대해 고마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엄마의 교활한 거짓말에 속은 사람들은 말이 너무 달라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모르겠다며 무책임한 말로 상황을 넘기려 했다. 어쩔 수 없이 고모도 일단 엄마의 전화는 최대한 받지 말고, 아빠의 부고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전화를 끊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나쁘게 이야기하고 다닌다니 화가 났지만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배 아파 낳은 딸의 성추행을 이야기하는데 이거라고 뭐 다를까 싶기도 했다. 고모는 신경 쓰지 말라고 하며 같이 장 보러 가자고 하시더니 내 손을 잡고 시장에 가서 내가 먹고 싶어 했던 고기와 쌈채소 참외, 도시락에 담을 유부초밥 그리고 물까지 사고 나서 다시 고모의 집으로 돌아왔다. 고모가 웃으며 오빠가 고기 구워 줄 거야 하더니 오빠에게 고기나 구워서 빨리 나한테 주라고 소리를 질렀다. 오빠는 투덜투덜거리며 딸 생겼다고 자신을 너무 막 대하는 거 아니냐며 볼펜 소리를 냈는데 그 말이 웃기면서도 마음이 따뜻했다. 나는 한 번도 이런 따뜻한 상황에 있었던 적이 없는데 20년 지나 만난 나를 이렇게 대해주는 가족이 있는 것에 마음이 많이 녹았다. 자기 전까지도 참외를 깎아주며 “원래~ 내가 이렇게 막 참외를 깎고 그런 사람은 아닌데~ 어? 소예, 너니까 해주는 거야!” 생색을 내면서도 나 먹으라고 예쁘게 담아줘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고맙고 행복했다. 나를 먼저 챙기면서 뒷전이 된 오빠가 계속 볼펜 소리를 한다. 딸내미 생겼다고 친아들 이렇게 막 대해도 되냐고 따져도 고모는 말이 없고 나에게 체하지 않게 천천히 먹으라고 이야기했다. 상담사에게 고모를 만나는 일이 무섭다고 한 말이 후회됐다.


다음 ,  길을 떠나 장례식을 가기 위해 다들 일찍 잤지만, 깊게 자지 못해 정신없이 도시락과 내가 가져온  그리고 편지까지 챙겨 준비하고 새벽 4시쯤 출발해 움직였다. 가는 중간에 아빠 친구들을 픽업하러 가다가 연락이 닿지 않아 멘붕이 왔는데 결국  만나 아빠의 장례식이 진행되는 곳으로 이동했다. 가는 길이 너무 멀고 험해서 앞자리에 앉은 나와 오빠는 졸음을 어찌할  몰랐고, 졸음과 싸워가며 힘들 겨우 도착했다. 일찍 도착해 빈소를 가봤지만, 시간에 맞춰 오라는 말만 듣고 하는  없이 근처 벤치에 앉아 고모와 아빠 친구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오빠는 새벽부터 일어나 운전하느라 졸음을 참을  없어 차에서 자기로 했고 고모, 아빠의 친구분들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이런저런 한탄도 했다가 귀신 이야기도 했다가 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굉장히 민망했다. 아빠의 친구들은 갓난아이  보고 처음   어색하게 대하셨고 나도 어색해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만 들었다. 시간이 지나 예정된 장례 시간이 다가오자 오빠 차로 가서 오빠를 깨우고 준비했던 꽃과 편지를 꺼냈는데 아침에 그렇게 파릇파릇했던 꽃이  시들어 있었다. 고작 2~3시간 만에  죽어 시들어진 꽃을 보니 마음이 괜스레 아프게 느껴졌다. 빈소로 갔는데 무연고자 장례는 합동 장례식이라 아빠 말고 다른 분의 명패가 있었다. 우리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움직여서 5 정도? 합동으로 진행되는 분의 가족은 대충 봐도 10명은 넘어 보였다. 장례가 시작되자 고모는 조용히 흐느꼈고 나와 오빠는 그런 고모를 달래주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보는 장례식이었고 장례 절차에 어리둥절하면서 조심조심했다. 아빠 친구분들이 차례로 술을 올리고 절을 하면서 터질 듯한 울음을  참으셨다.  역시  참다가 자녀분 계시냐는 질문에 손을 들고 나와 준비한 꽃다발을 드렸는데 나중에 차례 됐을  해달라는 말에 살짝 민망했다. 아빠에게 살면서 처음으로 술을 올리고 인사를 했다. 모든 절차가 끝날 때쯤 헌납하는 시간을 갖는다면서 나를 보시며 편지가 있는  같은데 앞에서 읽어달라고 하셨다. 생각하지 못한 상황에 다들 당황해하며 나를 쳐다보는데 ‘, 편지는  어떻게  거지…’ 혼자 생각하며 조심히 나와 꽃다발을 아빠의 명패 옆에 올려두고 편지를 읽었다.


To. 나의 아빠
사랑하는 아빠, 안녕? 이렇게 편지를 쓰고 인사를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어.
매일 쓰고 지우고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이 편지를 썼을까.
아빠, 나는 지금 ‘소예’ 이름으로 살고 있어. 소중하고 예쁜 사람이라는 뜻인데 이름 예뻐?
매일 보고 싶고 항상 그리워하고 생각했었어. 언젠간 아빠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안고 살았는데 결국 이렇게 만났네!?
아빠에게 보여주려고 단발로 자르고 가장 예쁘게 하고 이 앞에 섰는데 떨려.
아빠가 내 아빠여서 좋아. 고마워 그리고 많이 사랑하고 있어.
지금은 나와 같은 곳에서 숨 쉬고 살지 않지만 아빠를 위해 매일 기도할게.
아빠가 항상 날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살면서 지금보다 더 씩씩하게, 더 정직하게 살게.

아빠의 사랑하는 하나뿐인 딸내미 올림


편지를 읽을 땐 다들 수군수군됐다. 합동으로 하신 분의 유가족들이 뭐 편지까지 쓰냐 또는 나도 편지라도 쓸 걸.. 하는 반응이었는데 내가 편지를 천천히 읽을 때 사실 나도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소중히 간직한 내 마음속 비밀 이야기를 천하에 공개하는 것 같았는데 몇 줄 되지도 않는 편지를 읽다 갑작스럽게 울음이 터져 읽기가 어려웠다. 얼굴 한 번 제대로 못 본 아빠가 이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눈물이 터졌지만 꾹꾹 눌러 읽고 자리로 돌아와 조용히 울자 오빠와 고모가 ‘잘했어, 잘 썼어.’ 위로해줬다. 빈소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절차를 끝내고 다시 로비로 나왔다. 아빠 친구분들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파란색 수의가 담긴 보따리를 장례 해주신 나눔과나눔 대표님께 급하게 전달해 입혀달라고 부탁드렸다. 난처해하셨지만 알겠다고 하시고 가신 후 아빠의 이름이 호명돼 오빠는 상주로 앞에 있고 아빠 친구분들이 그 뒤에 계시면서 기다렸다. 수의는 입히지 못하고 그 위에 얹었다는 말에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얼마 후 아빠의 관이 차에서 나왔다. 그때 나는 갑작스럽게 눈물을 터트렸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친아빠를 미워하거나 원망한 적이 없었는데, 아빠 없는 애라고 놀림받아도 괜찮았는데 관의 끈을 잡고 움직이는 순간 아빠가 정말 미치도록 밉고 싫고 화가 났다. 살면서 처음으로 아빠를 만났는데, 항상 언젠간 만나지 않겠냐며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 만남이 고작 관짝으로 만나야 했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관으로 만나서 관으로 이별한다니 가슴이 미치도록 미어지고 터져버릴 것 같았다. 잡고 화장터로 옮기는데 안 된다고, 이렇게 가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아빠의 관을 들고 화장터까지 가서 강화유리 문 사이로 아빠가 떠나는 그 마지막을 보며 아빠를 담은 관이 화장터로 떠났다. 화장되기 위해 천천히 관이 들어가는 것을 보자 어른들이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유리문을 치며 원망하다가 이제는 다 놓고 떠나라고 잘 가라고 인사하시는 모습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나는 아빠 친구분들과 고모와 다른 시간을 가지고 있다. 아빠와 난 고작 10개월 정도 지냈고 갓난아기 때 이별해 아빠의 얼굴을 잘 정확히 모르는 나와 달리 아빠 친구분들은 아빠와 30년을 넘게 함께 했고 고모는 미우나 고우나 자신의 오빠였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없어졌다 나타났는데 그 만남이 화장터였다면 그 누구라도 자지러지도록, 아이처럼 울고 또 울었을 것이다. 어떻게 그 많은 마음을 애써 감추고 계셨을까, 툭툭 장난도 치고 하면서 이별의 큰 아픔을 견뎠을까 싶었다. 아까 장례식 전에도 장례를 할 때도 아무렇지 않게 계시며 누구보다 침착하시던 어른들이 정말 마지막인 이 상황에서 아이처럼 울고 계시는 것을 보니 이것이 정말 어른들이 가진 무게구나, 이게 정말 어른이구나 싶었다. 그렇게 울던 분들이 아빠 시신이 안 보일 때까지 울다 문이 닫히자 눈물을 쓱 닦아내고 언제 울었냐는 듯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에 나는 어른의 무게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내가 본 이 어른들처럼 나도 나중엔 그런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 물음은 내게 너무나 무겁고 어렵다고 느꼈다. 화장이 끝나는 동안 대기하면서 긴장감에 먹지 못한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먹으면서 아빠와의 추억을 회상하시던 친구분들은 웃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1시간쯤 되니 아빠의 유골을 함에 넣는 것을 볼 수 있다며 우리를 안내해주셨고 이름 확인 후 유골을 꺼내 보여주셨다. 보자마자 놀랬던 것은 아빠의 뼈가 굉장히 굵어 유골함에 겨우겨우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아빠는 친구분들과 고모의 말처럼 체구가 크고 키도 큰 아주 멋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모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돌아가는 길에 계속 이야기하셨다.


아빠의 유골이 담긴 도자기를 보자기에 꽁꽁 감싸 나왔고 딸인 내가 그 유골함을 들고 고인에게 인사하는 마지막 장소로 이동했다. 유골함을 들고 움직이는데 아마 그게 내가 유일하게 느낄 수 있는 마지막 온기였을 것이다. 진짜 아빠의 온기는 아니고 기계로 한 인위적인 온기였을지 몰라도 참으로 따뜻하고 식지도 않아 내 왼손에 남았다. 아빠의 관의 끈을 잡고 움직이는데 10초, 유골함을 들고 가는데 20초, 정말 짧은 만남과 영원한 이별이었다. 마지막 장소로 유골함을 들고 움직이며 나는 다짐했다.


아빠, 내가 지금 이름처럼 걸맞게 살게. 아빠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도록 지금보다 더 열심히, 착하게, 성실하게 살면서 아빠의 딸로 이제부터 잘 살게.
아빠는 영원히 내 아빠야. 아빠를 내 마음에 담아두고 흔들리거나 아프거나 힘들 때마다 아빠가 살아온 시간들을 생각하며 살아볼게. 사랑하고 아빠가 내 아빠라 자랑스러워. 나 역시 아빠의 딸로 자랑스러운 사람으로 남아 있을게.


짧게나마 느낄 수 있던 온기는 내 왼손에 있다. 관짝으로 날 만난 아빠가 처음으로 그렇게 미웠지만, 고마웠다. 이유는 없다. 아빠가 내 친아빠라서 고맙고 원하지 않는 임신에도 책임감을 가지고 잘해보고 싶어 조금 무리하더라도 공장을 차리고 손해 보는 계약에도 아빠는 끝까지 버티셨다. 마지막 아빠의 이름과 꽃을 태우는데 왜인지 잘 타지 않았다. 아무리 불을 붙여도 타지 않다가 천천히 타오르는 것을 보며 울었다. 그 작은 이름 적힌 종이가 타는 게 1분은 넘게 걸렸다. 아빠가 아직 떠나기 싫었던 걸까 생각이 들만큼 오래오래 타다가 결국 이름은 없어졌다.



장례식을 나 혼자 지키며 모든 것을 감당하려 했지만 어른들이 나서서 함께 해주셨다. 아마, 나 혼자 그 많은 절차를 따라 움직였다면 슬픔에 잠겨 자지러지게 울고 괴로워하다 기절했을 수 있다. 오빠는 우리 아빠를 미워한다. 어릴 적 고모를 힘들겠다고 했다. 그렇게 미워하면서도 직접 상주로 나서서 고모와 나의 슬픔을 덜어줬다. 내가 울면 어릴 때처럼 나타나 괜찮다고 다독여주고 고모에겐 든든한 아들로 감싸주고 오빠, 고마워. 혼자 먼 길 떠나는 아빠를 위해 광주에서 전날 밤부터 서울에 올라와 함께 해주신 삼촌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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