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셜리 Sep 07. 2022

아빠가 떠난 자리에 남겨진 이야기

수면 위로 올라온 진실




2022년 5월 31일, 내 나이 26살 얼굴도 보지 못한 아빠를 떠나보냈다. 아빠가 떠나고 나는 많은 이야기들을 자세히 듣고 보고 알게 됐다. 그동안 서울에서 어렵게 산 것은 미혼모로 살아온 것은 엄마가 꾸며낸 거짓말이었다. 엄마는 미혼으로 날 낳은 것이 아니라 친아빠와 약속된 관계 속에서 혼인과 임신을 한 것이었다. 8살이 되기 전 엄마는 지금의 계부와 결혼을 했다. 그 당시 나는 엄마의 딸 자격으로 결혼식을 참석한 것이 아니라 먼 친척쯤으로 해 결혼식을 봤다. 선남선녀가 만나 결혼한 것으로 다들 그렇게 알고 결혼식에 왔다. 모두가 엄마의 결혼이 초혼으로 알고 있어서 내가 있으면 안 되기에 안경 이모가 날 꽉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외가족, 계부의 가족 모두 쉬쉬하는 것이 나의 존재였다. 엄마에게 엄마의 딸로 있을 수 없었던 그 결혼식날의 일들은 나에게 상처였다. 교묘하게 나를 피해 사진을 찍고 DVD 영상을 만들어 내 존재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이 일화의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아빠가 돌아가시면서 서류를 정리하는 중에 알게 됐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내가 아빠의 혼인관계 사실확인서를 봤는데 아빠의 혼인관계에 의붓오빠의 어머님이신 전 부인이 있고 그 아래에 엄마와 혼인신고한 날짜, 이혼소송으로 혼인이 종료된 날짜, 소송을 제기해 신고된 사람까지 모두 나와 있었다. 엄마는 수시로 내게 친아빠 밑으로 날 호적에 넣으려 어마 무시한 빚을 져서 소송했다는 말을 했었다. 호적에 넣으려 소송을 한다고? 어린 나이로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 여겼는데 실제로 서류에서 확인하니 계부와 결혼하기 전까지 아빠와 엄마는 혼인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호적 소송은 사실 계부와 결혼 후 혼인관계를 지우려 했던 혼자만의 싸움이지 나와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엄마의 혼인관계 사실확인서는 깔끔하게 계부와 결혼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하지 않는가. 친아빠에게선 엄마의 혼인 사실이 드러나고 소송한 사람이 엄마인데 엄마의 혼인사실엔 계부와의 결혼으로만 나와 있는 초혼으로 꾸며져 있었다. 아빠의 상속 문제를 해결하고자 내 기본상세증명서를 떼고 보니 계부와 결혼한 후 8개월이 지나서야 친아빠와 같은 본이 아닌 계부의 본으로 소송 통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엄마는 수시로 친아빠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이야기하며 만나면 안 된다고 가스라이팅을 했었다. 아빠가 만삭인 자신을 버리고 짐, 보증금이며 모든 것을 챙겨 도망쳤고 끝까지 쫓아갔더니 딴 여자와 바람이 났다고 했다. 그러나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는 고모와 아빠 친구들에게 진짜 이 이야기의 진실을 들을 수 있었다. 짐과 보증금을 들고 도망친 건 아빠가 아니라 엄마였다는 사실이다. 아빠는 엄마의 괴롭힘에도 나를 생각하며 끝까지 버티고 버텼는데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옷부터 살림살이, 민증 그리고 가구부터 보증금까지 아무것도 없고 엄마는 나와 모든 것을 챙기고 아무런 말 없이 도망쳤다. 그때 아빠의 마음은 감히 내가 상상할 수 없겠지만 아마 정말 벼랑 끝에 서 계셨던 것 같았다. 엄마의 무책임한 도망으로 아빠는 가장 사랑한 나를 더 이상 볼 수 없었고, 엄마가 직원들을 붙잡아 매일 아빠에 대해 안 좋게 이야기하고 괴롭히는 것으로 쥐고 흔들었던 탓에 공장 사업이 망해 빈털터리가 되어 차비 겨우 가지고 서울로 도망쳤다고 친구분들이 말해주셨다. 아빠는 내가 싫어 도망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헤어졌던 것이었다. 그리고 엄마가 그렇게 나쁘게 친아빠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모든 진실이 드러날까 두려워서라는 것을 알게 됐다.


차비만 달랑 들고 광주를 떠난  , 아빠는 서울에서 힘들게 배달 일을 하며 6개월가량 서울 친구 집에서 지내다 나오셨고 아빠가 돌아가시기 4  만남으로  이상의 연락은 없었다고 한다. 아빠를 만난 친구분은 원래 못하는 담배를 심하게 펴 놀랬다고, 삶이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감히 상상할 수 있었다는 말씀하셨다. 엄마의 행동 때문에, 고작  이기심 하나로  사람의 인생이 엉망으로 됐다는 것에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다. 고작 3살밖에  되는 나는 엄마만 바라보며 엄마만 기다리며, 버려질까 무서워하며 살았고 아빠 없다는 이유로 또래 아이들에게 손가락질받고 단체로 아이들이 때려 다치고 물건도 도둑맞아가며 살았다. 아빠가 없어서 이런 수모는 당연한 것처럼 여기며 살아온  세월이 아까웠고 마음이 찢어지도록 괴로웠다. 아빠 역시 누구보다, 어떤 사람들보다 나를 소중히 여기며 엄마의 괴롭힘에도 버티다  잃고서야 모든 것을 내려놓고 거주지 불명자, 신원 확인 불가로 숨어 지내셨다. 아무도 아빠를 찾을  없었고 연락조차   없었다. 모두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기다리고 있다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아빠의 죽음은 누구보다 안타깝고 미치도록 가슴이 찢어졌다. 상속 문제 때문에 여러 가지 조회하고 연락해보니 아빠는 혹여나 자신이 사는 곳이나 행적을 찾을까 거주지 불명자로 지내며 병원   제대로 가지  했고 보험료도   모두 정지당한 상태로 홀로 25년을 사셨다는  미치도록 가슴이 아팠다.


나는 끝까지 몰랐던 사실이 있었는데 그게 아빠가 어디서, 어떻게 발견됐을까 였다. 고모가 참고 참다가 속상한 마음이 터져 내게 해 준 이야기에 나는 3일을 내리 울기만 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구청에서 아빠의 사망신고 처리를 기다렸었다. 장례식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어쩌면 아빠가 어두운 곳에서 지냈을지도 모른다는 친구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와 고모, 사촌오빠까지 긴장상태로 있어야 했다. 우리가 모르는 빚이 많을 수 있고 밀린 지역보험료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망신고가 됐다는 사실을 알고 동사무소로 가서 원스톱 상속 확인을 하려고 서류를 뗐는데 발견된 곳이 지층 4호라고 적혀 있었다. 지층? 설마 내가 아는 지층? 싶었는데 반지하가 맞았다. 그것도 미치도록 가슴이 찢어지는 부분이었다. 발견 당시 보일러가 켜지지 않았다고 한다. 오랫동안 보일러 킨 흔적이 없어 바닥이 차디 찼는데 아빠가 싸늘하게 죽어가는 동안 빛 한 번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고 따뜻한 날씨조차 느끼지 못하게 차가운 곳에서 차갑게 돌아가셔서 늦게 발견됐고 안치실이라는 곳에서 한 달의 시간을 보냈다. 그것만으로도 날 미치게 했지만 3일 내리 울게 한 것은 아빠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머리맡에 자신의 신분증을 올려두고 살아 경찰이 빠르게 연락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고모는 한탄하며 어느 누가 신분증을 자신 머리 위에 올려두고 사냐며 어떻게 마지막까지 사람을 이리도 잔인하고 비참하게 만드냐고 말씀하셨다. 고모 말처럼 잔인해도 이렇게까지 잔인하고 아플 수 있을까? 발견이 늦어져 사망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지만 겨우겨우 사인을 말한다면 경찰은 폐렴이라고 했다고 했다. 폐렴마저도 사망원인이 될 수 없다는 듯 이야기를 고모가 듣고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고 했다. 나 역시 그 말을 듣는데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아프고 힘겨웠다. 얼마나 어떻게 그 추운 곳에서 햇빛 하나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발견되기를 기다렸을지 나는 모른다. 고모도 모르고 발견했던 경찰도, 부검하시는 분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끝까지 아빠의 흔적을 찾고 싶어 상속으로 조회된 내역을 따라 보험사에 전화해보고 통장 마지막 거래를 알려달라고 서류를 챙겨 잔액이 있는 은행에 갔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얼마나 질리고 힘들었으면 그렇게까지 정말 꽁꽁 숨고 또 숨어 지냈다는 게 너무 마음이 무너졌다. 아무리 해도 아빠의 마지막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찾을 수 없는 아주 오래된 세월에 아빠는 어떤 생각을 하며 지냈을까. 알고 싶어도 알 수가 없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유명한 장면이 있다. 주인공 우영우가 엄마를 만나 자신의 정체를 말하고 이야기할 때, 우영우의 친엄마인 태수미는 자신을 원망했냐고 물었다. 그러자 우영우는 긴 침묵 속 대답이 아닌 “한 번쯤은 만나보고 싶었어요.” 이야기했다. 이 장면을 보며 나는 주인공 우영우의 마음이 어떤지, 무슨 의미인지 알았고 나와 같다고 생각했다. 이 드라마가 나오기 전 나 역시 비슷한 질문을 받았었다.


아빠가 아닌 상담사에게.  이 질문을 받았을 당시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아무것도 모른 채 하염없이 장례식만 기다릴 때였다.


상담사는 내게 아빠가 돌아가신 후 계속 편지를 쓰며 서류만 알던 아빠가 돌아가신 것을 믿지 못하냐고 물으셨다. 아빠가 날 버렸다 혹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냐고 추가적인 질문을 하셨다. 나는 당연하지 않은 질문에 단호하게 “그런 적 없어요.” 대답했다. 숨을 몰아내 쉬고 덧붙여 말했다.


“서류상으로 아빠가 살아있었다는 걸 알 때마다 같은 하늘에서 살고 계신다는 것으로 만족했고 안도했어요. 처음 서류로 알았을 땐 아빠를 찾고 싶기도 했어요. 당연히 찾는다고 해서 그렇게 숨어버린 아빠를 찾지 못했을 거예요. 찾고 싶어도 찾지 않은 건 엄마가 훔친 민증 속 아빠의 모습과 다르게 많이 늙었을까 봐 무서워서 찾지 않았어요.”


왜 다른 것도 아닌 늙어버린 것에 대해 두려워했냐고 그런 감정이 든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셨다.


“적어도 아빤 혼자 그 많은 시간을 보냈을 테니깐요.…”


혼자 모든 시간을 보냈을 아빠에 대한 마음도 있지만 사실 나는 겁쟁이였다. 아빠가 나를 보고 실망할까 무서운 마음에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었다. 매일 내게 ‘너는 못생기고 못난 딸이야!’, ‘뚱뚱하고 못났고 부끄러워.’ 엄마가 했던 말처럼 아빠가 날 보고 그렇게 생각할까 두려웠다. 아빠에겐 못난 딸의 모습으로 비치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하지만 아빠가 떠나고 장례식까지 나는 매일 아빠를 찾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한 번쯤 먼 곳에서 보고 돌아섰다면 이렇게까지 아플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고모의 말로는 누구보다 날 가장 많이 사랑한 사람은 아빠였다고 한다. 살면서 나를 가장 사랑한 사람이 나를 태어나게 한 아빠라는 사실에 숨 멎을 만큼 아프고 눈물이 터졌다. 나는 살면서 나를 진짜 사랑해준 사람이 있었을까 매일 묻고 싶었다. 엄마도, 엄마와 결혼한 계부도, 외가족마저도 날 외면하는데 누가 날 사랑했나 했지만 아빠가, 원치 않은 임신에도 태어난 날 사랑했다는 사실이 가슴이 터지도록 아프고 고마웠다. 엄마만 아니었다면 나는 아빠와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나와 함께 살기 위해 무리해서라도 사업을 하고 말도 안 되는 계약에도 나만 보며 버틴,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지내며 아빠에게 자전거 타는 법도 배우고 내가 아플 때마다 함께 해주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 때문에 두 명의 삶이 엇갈려 한 명이 죽어서야 만날 수 있는 슬픈 관계가 되었다. 아빠가 날 사랑한 만큼 나 역시 아빠를 많이 사랑했던 것 같다. 아빠의 소식을 알고 장례식을 치르고도 매일 유골함 속 온기를 왼손에서 기억하며 울고 또 울었다. 아빠가 그립고 아빠를 만나고 싶었지만 만날 수 없다.

이전 22화 30초, 짧은 만남 속 영원한 이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