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기술이 만든 디자인 스페이스 뷰
해밀턴의 벤츄라처럼 유명 디자이너가 창작한 디자인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기술로 시계를 만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미래형 디자인도 있다. 블로바의 '스페이스 뷰(Space View)'가 그런 시계다. 해밀턴이 전기 시계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사이에 등장한 시계이다. 손목시계의 역사를 진짜로 바꾸어 버린 '어큐트론(Accutron)'이다. 전기(electric) 시계가 아니라 전자(electron) 시계다. 반도체 칩을 사용한 첫 시계였다.
이 시계는 스위스 바젤 출신의 막스 헷젤(1921-2004)에 의해 만들어졌다. 1921년 바젤에서 태어난 헷젤은 어려서부터 자전거 라이트, 발전기는 물론 라디오와 전화기는 물론 렌즈를 갈아 망원경까지 만들 정도로 손재주 뛰어난 소년이었다. 취리히의 기술대학을 졸업하고 1950년에 전기 엔지니어로 비엔에 있던 블로바에 취업하게 된다.
블로바는 해밀턴과 달리 시계의 무브먼트는 인건비가 저렴한 스위스에서 만들고, 시계 케이스와 다이얼만 미국에서 만드는 회사였다. 전쟁 전인 1919년에 스위스의 비엔에 공장을 설립하여 무브먼트를 제조하고 있었다. 블로바는 공장 설립 이후 당시 최고의 설비들을 만들던 미국의 기계들을 도입하여 부품들의 호환성을 높이고, 생산비를 절감하기 위해 자동화를 연구했다. 막스 헷젤은 블로바의 생산시설 자동화를 위해 영입한 전기 기술자였다. 그러나 1952년 해밀턴에서 전기시계를 개발한다고 발표하자, 전기 기술자 출신 막스 헷젤에게 전기 시계를 개발할 것을 주문하게 된다.
그러나 해밀턴, 엘진과 LIP에서 개발하는 전기 시계가 기계식 시계의 밸런스를 그대로 사용하는 구조이므로 기계식 시계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막스 헷젤은 자신이 대학 졸업 후 연구했던 튜닝 포크(Tunning Fork : 메트로늄처럼 일정한 진동을 전기적으로 발생시키는 장치)를 사용한단 다면 기계식 시계와 전기 시계보다 훨씬 정확한 시계를 제조할 수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하게 된다.
당시 블로바의 사장이었던 아르데 블로바는 당시 미국에서 개발된 새로운 트랜지스터들을 보내주며 헷젤이 제안한 튜닝 포크 시계를 개발할 것을 지시하게 된다. 새로 개발된 트랜지스터와 소형 튜닝 포크를 결합하여 튜닝 포크 방식의 무브먼트를 개발한 막스 헷젤은 시계의 기본 구조에 대해 1953년 6월에 특허출원을 하게 된다. 그리고 튜닝 포크 시계의 프로토 타입을 개발한 것이 1954년 11월이었다.
완벽한 준비를 거쳐 1960년에 발표된 블로바의 어큐트론은 해밀턴의 실패 뒤에 등장하여 전기시계보다 더 정확하고 고장도 없다는 이유로 10년 이상 최고급 시계의 대명사로 블로바를 지탱해주는 최고의 상품이 된다.
미완성인 상태에서 출시되었던 전기시계와 달리 1961년부터 판매를 시작한 어큐트론은 완성도가 높아 출시되자마자 미국 시장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어큐트론(Accutron)은 블로바에서 선전용으로 만든 문구인 'Accuracy through Electronics'에서 정확성의 Accu와 전자의 Tron을 합성하여 만든 이름이었다.
튜닝 포크의 초당 360 헤르츠의 진동수가 가청 주파수여서 귀에 대고 들으면 이 시계에서 '붕'하는 미세한 소리가 났으므로 기계식 무브먼트나 전기 시계와는 다른 개성을 가진 그야말로 신비로운 시계였다. 더구나 기계식 무브먼트나 전기식 무브먼트와 달리 밸런스 휠을 사용하지 않는 구조였으므로 충격에 강했고 기계식 시계의 2-5 헤르츠, 전기식 시계의 2.5 헤르츠 보다 훨씬 빠른 360 헤르츠로 진동하는 구조였으므로 기계식 시계나 전기식 시계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정확성을 유지했던 것이다.
어큐트론 모델 중 가장 유명한 모델이 '스페이스 뷰'(Space View)라는 모델이다. 이 모델이 공식적으로 출시되게 된 에피소드가 매우 흥미롭다. 튜닝포크를 사용하는 전자식 시계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판매점의 쇼윈도에 진열할 목적으로 다이얼 대신에 유리에 어큐트론의 이름과 시간과 분을 표시하는 마크를 표기한 진열품을 만들어 진열했다.
그러나 처음 보는 독특한 무브먼트가 유리를 통해 보이는 진열제품을 구입하고 싶어 하는 소비자들로 인해 판매 제품보다는 진열제품이 판매되는 기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그 결과, 진열제품과 같은 유리를 사용하고 정상적인 다이얼과 투명 유리를 부속품으로 제공하는 '스페이스 뷰'라는 이름을 가진 모델이 출시 직후 발매되게 되었던 것이다.
1961년에 시계 박람회인 바젤 페어에 전시되고 미국에서 시판된 어큐트론은 블로바의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1963년까지 10만 개가 판매되고, 1965년에는 35만 개가 판매되었으며, 1977년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 총 550만 개나 판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