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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몰랑맘 Aug 31. 2024

크롭티에 찢청

당당하게

춤을 추기 시작하면서 아이돌 영상을 챙겨보는 일이 소소하고, 즐거운 여가가 되었다. 요즘 아이돌은 다 똑같이 생기고, 가사는 알아듣지도 못하겠다고 떠들던 고리타분한 40대 아줌마는 이제 초등학생인 딸들보다 아이돌 정보에 빠삭한 젊줌마가 되었다. 어쩜 이렇게 마른 몸에서 파워풀한 춤이 나오냐며 감탄하고, 그녀들의 표정과 제스처 하나하나를 주책맞게 따라 해 보는 젊줌마는 자연스럽게 그녀들의 의상들을 탐내기 시작한다. 화려한 무대의상을 감히 탐하는 것이 아니다. 연습영상 속 청초한 얼굴을 하고, 힙하게 춤을 추는 그녀들의 무심한 듯 스타일리시한 연습복에 눈길이 간다. 




댄스학원에 입성한 초기엔 영상 찍는 날에만 조금 신경을 쓰는 정도였다. 게다가 우리에겐 민희진으로 통하는 '노진스' (우리끼리 정한 그룹 이름이다.) 의 스타일리스트 언니가 있었으니. 다크, 발랄 정도의 콘셉트가 정해지면 최대한 집에 있는 옷 중 괜찮다 싶은 옷들을 매칭해 가는 정도였다. 여기에 체크남방을 허리에 두르거나 스카프를 매칭하는 정도랄까. 분위기 흐릴 정도만 아니면 되었다. 그런데 그 분위기라는 게 다 집에 있을 리가 있나. 하나 둘 사나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나르는 옷들이 점점 쌓여 영상 찍는 날 뿐 아니라 연습날에도 스타일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아이돌 연습생이 된 냥 힙해 보이는 내 모습에 들썩들썩 신이 나 리듬이 더 잘 타지는 날들을 경험하다 보니 후줄근하게 가기가 싫어진다. 더 이상 멋모르고 집에 있던 레깅스를 입고 댄스학원에 가던 초짜가 아니다.


문제는 돈이다. 사실 이 나이에 크롭티라는 게 춤출 때 말고는 잘 입어지지 않는 게 문제다. 춤출 때만 입는 옷에 돈을 많이 들이기엔 아까운 생각이 들고, 그렇다고 매번 같은 옷을 입고 추기는 싫다. 그런 우리에게 단비 같은 장터가 있었으니. 바로 지그재그, 에이블리 같은 초저가 의류 플랫폼이다. 흔히 말하는 '보세' 총집합이라고나 할까. 2000년대 동대문 시장을 핸드폰으로 훑어보는 느낌이다. 게다가 지그재그에는 '직진배송'이라는 서비스까지 있어 당장 촬영날에 급하게 필요한 의상을 전 날 구매할 수도 있다. 갑자기 이게 웬 광고인가 싶으시겠지만, 안심하셔도 좋다. 내가 여기서 광고를 따 낼만큼 핫한 작가나 인플루언서는 아직 못되니까 말이다. 재질이 만족스럽지 못할 수는 있다. 그런데 뭐, 춤출 때만 입는 거니까!라고 생각하면 필요한 옷을 1~2만 원에 눈으로 훑고 구매할 수 있는 편리함에 중독되고 만다. 물론 쿠팡을 이용해도 되지만, 내가 자주 이용하는 두 플랫폼에는 리뷰도 많고, 워낙 다양한 제품들이 있다 보니 선택의 폭이 넓다.




삶의 지혜는 경험으로 얻어지지 않는가. 사다 보면 빳빳하고, 저렴한 재질에 실망스러울 때도 있게 마련. 그리하여 가끔은 '나이키'나 '아디다스' 같은 브랜드에서 거금을 쓰기도 하고, '무신사' 'w콘셉트'로 이탈해 조금 더 주고, 더 쓸만한 퀄리티의 옷을 구매하기도 한다. 평소에도 잘 입어지는 카고팬츠나 적당한 길이의 크롭티는 무신사나 w콘셉트 입점 브랜드 옷들이 개인적으로 맘에 든다.


너무 빳빳한 재질의 티, 투박한 바지 고무줄, 화면과 달라도 너무 다른 색상에 실망한 친구는 보세 의류와 작별을 고하고 브랜드에서만 살래!라고  선언했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지그재그와 에이블리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저렴한 가격에 쓸만한 옷을 만나는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검은색 핫팬츠가 대표적이다. 춤을 추려면 꼭 필요한 필수템 3가지가 있다. 크롭티, 박스티, 핫팬츠, 찢어진 청바지, 카고팬츠. 티만 두 세벌 정도 있다면 바지는 여기서 종류별로 돌려 입으면 된다. 옷을 많이 살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에이블리에서 구매했던 내 검정생 핫팬츠가 길이도 색깔도 사이즈도 착용감도 적당하니. 매번 핫팬츠가 어울리는 노래가 등장할 때마다 맵시 살리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13000원에 구매했던 옷이다. 득템!


좀 실망스러운 옷들이래 봐야 연습 때 입으면 된다. 나의 경우에 그렇다는 얘기다. 주 2회 한 달에 8번 입을 기회가 있으니 낭비라 여겨지지는 않는다.




엄마라는 타이틀을 얻은 나는 최대한 볼록한 배를 가리고, 몸매가 도드라지지 않는 펑퍼짐하면서도 우아한 옷들을 찾아 입었었다. 그런데 어째 11살인 첫째가 내 키를  넘보고 있는 무렵인 지금 크롭티와 찢청을 입고, MZ흉내를 내고 있다. 아니 사실 나도 MZ 끄트머리에 걸려있는 나이 이기는 하다. 게다가 내 크롭티는 이제 딸에게 적당한 사이즈의 티로 딱 맞아떨어지니 내게 영 아니더라도 입어줄 사람까지 있다.


이런저런 합리화로 오늘도 크롭티와 찢청을 꺼내 입는 나는 거울 앞에서 흥얼거린다.  아이를 둘 출산한 배 인지라 매일의 복근운동에도 불구하고, 축 쳐진 아랫배는 밑위가 긴 청바지로 가려야 한다. 그럼에도  허리선에서 딱 끊어지는 찰랑한 크롭티와 무릎 한가운데가 다 보이게 뻥 뚫린 청바지가 참 예뻐 보인다. 매번 세탁해야 하는 비싼 블라우스와 별 개성 없는 명품가방을 든 내 모습보다 훨씬 생기발랄하다. 아이를 마중 나가 기다리면서 명품으로 치장한 다른 엄마들을 은근히 부러워하던 나는 이제 당당하게 크롭티와 찢청을 입고, 웃는 얼굴로 아이를 맞이한다.




사진: Unsplashian doo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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