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만큼은
찌는듯한 더위에 기어코 껄렁한 긴바지를 입고, 정자동에 사는 H 언니네 아파트 주차장에 평균나이 42살인 여자 6명이 모였다.
유난히 어려운 스텝이 많고, 팔다리를 우렁차게 뻗는 동작으로 이루어진 뉴진스의 '슈퍼내추럴' 안무를 연습하기 위해 따로 모인 것이다. 집에서 연습했다가는 TV든 나든 뭐 하나 부수고도 남을 안무다. 게다가 큰 전면 거울이 없으면 내가 잘 추고 있는지 확인이 안 된다. 이리하여 우리는 한 마음으로 '연습실'을 따로 예약하기에 이르렀다.
만 원대부터 십만 원대까지 동네마다 시설마다 천차만별인 연습실들을 몇 군데 서치 해 본 결과 정자동 어느 골목길에 위치한 연습실이 우리 사정에 딱 맞았다. 학군지인 이곳에 예체능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타깃으로 마련된 무인 연습실인 듯했다. 마침 주차할 곳도 마땅치 않은 이곳 주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언니의 안내로 우리는 각자의 차들을 안전하게 아파트 주차장에 모셔두고, 연습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33도 늦더위에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치렁치렁한 바지를 입고, 10분을 꼬박 걸었다. 중간에 커피를 테이크아웃 할 수 있는 카페가 있음에 감사해하면서.
"우리 완전 연습생 출근길이네!"
한 손에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들고 힙하게 차려입은 6명의 40대 여자 무리들에게 이 얼마나 감사한 콘셉트인가. 더운 열기를 시원하게 식혀주는 농담에 누구 하나 더위에 투덜대지 않고, 키득거렸다. 이미 예약시간 보다 30분이나 늦었지만, 아무도 서두르지 않는다. 여유도 나이만큼 생기는 건가.
드디어 어느 허름한 건물 지하에 도착한 우리들. 입장하는 순간부터 버벅거렸다. 이런데 예약해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입장해보는 건 한참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 거금을 들여 프라이빗 키즈룸을 예약해 방문했던 때 이후로 처음인듯하다.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다가 어느새 도착해 버린 우리. 연습실 예약을 주도한 언니는 다급하게 안내받은 문자를 확인하고, 차분하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이 열리자 우리는 어느 고급 호텔에 들어선 듯 열렬히 환호했다.
'와, 너무 좋은데???'
사실 연습실은 생각보다 비좁았고, 오픈한 지 얼마 안 되었는지 페인트 냄새가 진동했다. 아이가 있었다면 페인트냄새가 너무 심하다고 컴플레인을 했을 수도 있는 상황. 그래도 우리는 무조건 좋다고 감탄했다. 아마 육아로 각자의 30대를 불태우고, 늦깎이에 춤을 함께 출 수 있는 서로가 있기 때문아니었을까. 학생들이나 올 법한 연습실을 방문하는 우리의 열정을 민망해하기는 커녕 여고생 무리들처럼 들떠 있었다.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마련된 것만으로도 기뻤다. 연습실이 좀 작으면 작은 대로 3명씩 나눠 추면 될 일이었다. 어차피 이 파워풀한 춤을 쉬지 않고 출만한 강체들도 아니고, 지독한 페인트 냄새에 그다지 건강을 염려할 만큼 약체들도 아니다.
우리가 예약한 연습실에는 인테리어 필수템인 마샬 스피커가 놓여있었다. 막상 발을 들이니 깔끔하고, 트렌디한 연습실 전경이 진심으로 맘에 들기 시작했다. 빠르게 핸드폰을 스피커 블루투스와 연결하고, 음악을 틀었다. 천천히 농담을 따먹으며 걸어오느라, 커피를 사 오느라 이미 우리는 2시간 예약 시간 중 30분을 잡아먹은 상태였다.
"자자 , 수다 금지! 바로 연습하자!"
할 때는 제대로 하는 열정. 이것도 나이만큼 먹는 건가. 40대 아줌마에게 수다금지라니. 보통의 의지로는 지키기 어려운 경고다. 그래도 누구 하나 그건 좀 너무하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없다. 당장 내일이 촬영인데도 안무숙지조차 안된 우리는 모두 다급한 상황이긴 했다. 연습은 착착 진행됐다. 중간중간 박자가 빨라 동작을 맞추기 어려운 부분은 느린 배속으로 틀고, 그 부분만 반복적으로 연습했다.
계속 비틀대던 턴 동작, 하체 근력으로 앉았다 빠르게 일어나야 하는 동작, 쉬운 줄 알았는데 제일 어려웠던 토끼춤 스텝까지. 차근차근 자세를 잡아나갔다. 누가 부탁하지 않아도 쉬는 중에는 서로의 춤 영상을 찍어주었다. 추면서도 거울 속 나를 보지만, 촬영된 나를 보면 놓쳤던 부분, 어색한 부분들을 더 면밀히 체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와, 우리 진짜 연습생 아니냐 이 정도면, 누가 우리 데뷔 안 시켜 주나!"
농담 삼아 데뷔니 연습생이니 아이돌이니 떠들지만, 사실 우리는 내심 언젠가 서 볼 무대를 기대하고 있다. 진지하다. 당장은 잘 안 따라주는 몸을 어떻게든 놀려서 멋들어지게 슈퍼내추럴 노래에 맞춘 댄스 영상을 남기고 싶은 욕심이다. 그 욕심 속에는 사실 응원받고 싶은 마음도 숨어있다. 이제껏 누군가의 무대를 응원만 했다. 여전히 남편과 아이의 꿈을 응원하고 있고 말이다. 우리도 하고 싶은 게 있다고. 썩 타고난 게 없어도 누구보다 열심히는 할 자신이 있다눈걸 티내고 싶다. 더 늦기 전에 한 번쯤은 주인공을 해봐도 되지 않을까.
내가 잘 모르는 아이돌 영상과 소식을 늘 빠르게
전달해 주는 것도 모자라 그때그때의 의상까지 디렉팅 해주는 S언니는 무려 조명이 들어오는 카메라 삼각대를 직구했다. 대학시절 댄스동아리까지 했다는 M 언니는 관객과 소통하는 무대를 우리가 다 경험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올해 1학년이 된 아이를 케어하기 위해 육아휴직을 낸 내 친구 Y는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춤에 열정을 불사 지르고 있다. 왕 언니 H언니는 미국까지 가서 찍은 춤 영상을 보내오기도 했었다. 벌써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내미와의 소통단절에 안타까워하는 차분한 K언니는 하루하루 나이 먹는 게 아깝다며 해 볼 수 있는 건 다 해보자고 은근히 우리를 부추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가장 빈약한 내 열정을 반성한다. 나는 사실 책 읽고 쓸 시간도 없다며 댄스 수업이 끝나고 커피 마시는 시간도 아까워했던 사람이다. 춤은 가벼운 취미정도로만 여겼었다. 그런데 지금은 춤을 소재로 글을 쓰고 있다. 책으로 도배됐던 내 인스타는 춤 지분이 조금씩 늘고 있다. 열정이 전염된건지 내 열정이 드디어 주인을 만난건지 모를 일이다.
드디어 영상 촬영날. 수업시간에 엉거주춤하던 우리가 단체로 칼군무를 선보이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며 놀라시는 선생님. 우리가 예상했던 시나리오였다. 다음 시나리오는 또 연습실을 빌려 연습하는 거고, 그다음은 정말로 무대에 서 보는 것이다. 그다음 시나리오는? 아이돌이다. 꼭 어리고 예뻐야만 아이돌이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무개의 응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야 그게 아이돌 아닌가. 무슨 자신감이냐, 얼굴 참 두껍다고 비아냥 거리는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 아무렴 어떤가. 누군가는 우리를 보고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다. 육아와 살림을 도맡아 하는 40대 아줌마도, 심지어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슈퍼 파워 워킹맘도 추고 싶은 춤을 출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뚝딱거리던 몸치도 죽도록 연습하면 멋들어지게 춤 한 곡조 뽑아낼 수 있다는걸 증명하고 싶다. 포장이 좀 과했나. 그냥 관종코드가 맞는 걸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은 연습밖에는 방법이 없다. 언젠가 무대에 설 그날을 위해 말이다.
사진: 뉴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