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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몰랑맘 Sep 14. 2024

끈적한 게 좋아요

pocket locket

추석 전 댄스 수업 한 타임이 남았다. 새로운 곡 진도를 나가기엔 애매한 상황이다.  명절이 지나고 오면 배웠던 춤이 전혀 기억나지 않을게 뻔하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 원데이 클래스를 제안하셨다. 1년 동안 학원을 다니면서 그날 배워 그날 영상을 촬영하는 원데이는 또 처음이다. 연습에 기대지 않고, 촬영이 가능한가. 수업 당일에는 매번 허우적대던 나로서는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곡이 아무리 짧아도 안무를 배우고, 외우기에도 벅차 느낌을 제대로 내기엔 무리가 있을 텐데 말이다.


어쨌든 원데이 클래스를 마치고, 영상촬영까지 만족스럽게 해냈다. 곡이 너무 맘에 들었다. 노력하지 않아도 끈적한 느낌이 막 새어 나왔다랄까.  Alania Cstillo의  'pocket locket'인데,  무려 뉴진스의 하니가 커버를 하고, 에스파의 카리나가 댄스 챌린지를 해서 뜬 팝이다. 가사를 들어보니 꽤나 집착적이면서도 걸크러쉬 한 사랑얘기다.


I can keep your secrets in my pocket locket

And then I keep ya held down when I lock and drop it


yea you be sly

I don't mind

you be cruel

I'll survive


아무리 네가 나쁘게, 심지어 잔인하게 굴어도 괜찮다고. 네 비밀은 내가 내 펜던트 안에 간직할 거라는 다소 위험하게 들리는 사랑얘기다. 요즘 노래들은 이렇게나 나라를 불문하고 세다. 그래서 맘에 든다. 춤 자체도 좋지만, 가사를 음미하다 보면 묵은 체증이 해소되는 순간들이 있다. 내가 10대 시절 걸그룹의 사랑노래는 대부분 뭔가를 바라는 내용이 많았다. 날 안아달라던가 약속을 해달라던가 하는. 이런 노래들을 흥얼거리던 때 나는 무의식 중에 남녀 간의 사랑을 이렇게 정의하고, 그런 사랑을 바라왔다. 상대가 나를 리드하면서도 섬세하게 내 마음을 다 알아주기를. 어떤 순간에도 강인하게 나를 지켜주기를 말이다.  그런 맘을 먹었던 내 어린 사랑들은 오래가지 못했다. 끝내 그 환상을 버리지 못하고 결혼까지 한 나는 비로소 아이를 오롯이 책임져야 하는 어미가 되면서 진짜 사랑을 알아갔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야 노력보다는 제어가 힘든 법. 더 난도가 높은 사랑은 남편과의 관계였다. 결혼 10년 차가 넘은 지금에야 남녀 간의 사랑을 넘어선 부부애를, 처절한 전우애와 눈물겨운 동지애를 쌓아가는 중이다.





이 춤을 추면서 가장 맘에 들었던 건 사지를 복잡하게 쓰지 않으면서 끈적한 느낌이 그득한 점이다. 뭐 그렇다고 내가 엄청 잘 췄다는 건 아니다. 영상 속 선생님의 끈적함이 어른이라면 나는 아직 어린애 수준일 뿐이니까. 그래도 느끼하지 않은 끈적함이 맘에 든다. 귀여운 척보다는 섹시한 척이 어울리는 나이여서일까. 박자를 밀어내면서 고개를 사뿐하게 꺾고, 골반을 틀 때 느껴지는 쾌감이란! 그러다 가사에 Pocket locket이 등장할 땐 가벼운 웨이브로 몸을 띄우면서 리듬에 몸을 싣는다. 파킷라킷으로 발음되는 어감도 좋고, 상대의 약점을 아무렇지 않게 내 포켓에 넣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통 큰 여자가 된 것 같은 착각도 좋다.


어린 사랑을 할 때는 누가 다가오지 않으면 먼저 다가가지 못했다. 절대 먼저 마음을 드러내 표현하는 일이 없었고, 살짝 열었던 마음마저 약간의 서운한 일들에 후회하며 다시는 열지 않으리 마음먹곤 했다. 그렇게 알 듯 말 듯한 사랑들만 가냘프게 이어 온 날들이 나이 40 먹은 아줌마가 된 지금에 와서야 조금 아쉽다.


Pocket Locket을 추는 지금처럼 더 유연하고 끈적하게 애정표현을 할 수 있었더라면, 더 통 크게 상대를 감싸줄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더 진한 연애를 해보지 못한 걸 후회하는 건 아니다. 단지 결혼을 하고 보니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고, 내 생각을 현명하게 전달하면서 서로 맞춰가는 과정이 좀 더 수월하진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느낄 뿐이다. 내 성에 안 찬다고 남자친구에게 했듯이 내 아이의 아빠를 향해 문을 쾅 닫아버릴 수만은 없었다. 어떻게든 대화하고, 풀어나가야 했다. 언성을 높이고, 서로를 비난할수록 멀어지기만 했다. 건조하고 싸늘한 태도로 일관하는 동안에는 불안해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결혼 12년 차인 요즘에야 무기라고 생각했던 내 단호함을 조금씩 내려놓고 있다. 12년째 거의 매일을 얼큰하게 취해 들어오는 남편에게  따끈하고, 얼큰한 북엇국을 내주면서 얼마나 힘들었냐고 한 번 물어봐준다. 거의 매일 골이나 쳐다도 보지 않았던 아침 출근길에는 아이들과 쪼르르 현관문 앞으로 마중 나가 순서대로 끈적하게 안아준다. 춤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호기롭게 거실에서 춤을 춘다. 아이들도 질려하는 춤을 남편이 그렇게 옆에 와서 같이 춰준다. 둘 이상의 아이를 품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배를 내밀고 말이다.


안 좋은 날보다 좋은 날이 많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남편과는 투닥거리면서 지낸다. 그럴 때마다 이제는 단호함보다는 끈적함을 먼저 내세워 본다. 부부관계라는 게 본디 끊어지지 않고 쭈욱 늘어지는 치즈처럼 그렇게 찐득한 게 아니겠는가.


이제 나는 Pocket Locket을 장착했다. 남편이든 아이든 미운 꼴, 싫은 꼴들은 다 이 안에 넣어두고, 사랑만 주리라. 더 끈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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