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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이지 Dec 07. 2022

걷기, 자전거, 모터사이클 : 성찰, 인내, 몰입

영혼을 위한 강원도 모터사이클 여행

이동의 목적과 효과는 다양하다. 업무 미팅을 하거나 주말 장을 보러 갈 때, 이동은 수단이 된다. 이럴 땐 시간과 힘이 적게 들수록 좋다. 몸이 무거워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생각이 복잡해서 길을 나섰다면, 이동이 목적이 된다. 이럴 땐 이동에 시간과 정성을 들인다. 천천히 가고, 한눈을 팔며, 음미한다.


이동이 목적이 되면, 그 이동은 경험이 된다. 길던 짧던, 노정에서 만나는 익숙하고 사소한 것들을 어제와는 다른 눈으로 보게 된다. 안중에 없던 풀과 꽃이 눈에 들어온다. 흐르는 강에서 평온을 얻고, 석양이 드는 산마루에서 애수를 느낀다. 잊었던 감각, 깊은 감정, 미처 몰랐던 의미가 드러나고, 드러난 것들이 내면에 쌓인다.


이동이 경험일 때, 이동의 수단과 방식이 달라지면 경험의 내용에도 차이가 생긴다. 걷는 경험과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경험과 모터사이클달리는 경험은 같지 않다. 시속 4 킬로미터로 서너 시간을 걸을 때, 시속 20 킬로미터로 대여섯 시간을 자전거로 달릴 때, 시속 100 킬로미터로 예닐곱 시간을 모터사이클로 달릴 때, 길 위의 대상들을 만나고 교감하는 방식은 달라진다.


걸어서 길을 나서면 긴장할 일이 없다. 마음이 느긋하고 유연해서, 길 위와 주변의 모든 대상들에 자유롭게 관심을 줄 수 있다. 가까운 것을 볼 수 있고, 먼 것을 볼 수도 있다. 앞도 보고, 뒤도 보고, 양옆을 볼 수도 있다. 종종 멈춰 서거나 쪼그리고 앉아서 자세히 볼 수도 있다. 마음이 가는 대로 무슨 대상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원하는 대로 보고 느낄 수 있다.


걸으면 모든 것들을 천천히, 자세히 볼 수 있다. 가을 청계천의 옥색 물빛을 볼 수 있다. 뽕나무와 오동나무는 가지가 매끈하지만, 느티나무와 벚나무에서는 실핏줄 같은 잔가지가 퍼져 나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름이 드리우면 남산타워의 흰 기둥이 잿빛으로 변해가는 걸 볼 수 있고, 비 오는 늦가을에는 덕수궁길 은행나뭇잎이 불을 켠 듯 샛노랗다는 것도 알게 된다.


생각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도 가능하다. 걸을 때는 길 위의 대상들을 수용하고 포용한다. 그렇게 마음에 들인 것들을 매만지며 깊이 들여다본다. 섬세하고 주의 깊게 면면을 살핀다. 그러는 동안 막히고 꼬였던 생각들도 느슨해진다. 제자리에서 맴을 돌던 생각은 속도가 느려지고, 날것으로 겉돌던 생각은 숨이 죽는다. 산만했던 생각들이 자리를 잡고, 희미했던 생각들에는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생각의 소란스러움이 잦아들면, 길 위의 대상들을 품고 살피듯이 속에서 일어난 생각들도 한층 여유로운 관심으로 살필 수 있다.


걷는 건 몸의 경험이나 감정의 경험이라기보다는 생각의 경험에 가깝다. 성찰의 경험이다. 철학자들과 명상가들과 수행자들이 뛰지 않고 걷는 데는 이유가 있다.


자전거로 길을 나서면 마음이 밝고 경쾌해진다. 동시에 적당한 긴장감이 든다. 이동이 목적일 때 자전거의 쾌적한 속도는 시속 20 킬로미터 정도다. 이동 거리는 100 킬로미터가 넘는 게 보통이다. 이만한 속도로 이만한 거리를 이동할 때는 가볍지만 역동적인 페달링과 일정하고 깊은 호흡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주행로 위의 장애물, 보행자, 라이더들에 신경 쓰면서 사고의 위험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자전거 이동에 적당한 긴장감은 자연스럽다.


자전거로 이동할 때는 길가의 대상들이 전경으로 다가온다. 길 위의 대상들이 하나하나 보이지는 않는다. 이른 봄 탄천자전거도로에서는 물 오르는 능수버들의 황금빛 가지들이 유려하게 일렁인다. 봄이 절정일 때 퇴촌 분원리는 마음이 환해지는 벚꽃의 천지다. 한여름 잠실나루에서는 키 큰 포플러와 미루나무 잎의 반짝임이 멀리서도 선명하다. 가을의 난지도 한강변은 갈대와 억새의 서정으로 가득하다.


자전거를 타면서 보는 풍경은 육체적 한계 안에서만 가능하다. 두세 시간 이상 꾸준한 페달링을 하면 한계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엉덩이에는 안장통이 오고, 다리에는 근육통이 오고, 허리와 목과 손바닥에도 통증이 온다. 한계가 넘어가면 근육에 경련이 오고, 견딜 수 없이 단것이 당기고, 종국에는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이런 상태에서도 자전거 라이더들은 고통을 참고, 파워젤을 빨며, 힘과 의지를 짜내 악착같이 페달링을 계속한다. 라이더가 진심으로 바라는 건 이런 한계와 한계를 넘어서려는 인내와 의지인지도 모른다.


자전거를 달리는 건 생각의 경험이나 감정의 경험이라기보다는 몸의 경험에 가깝다. 라이더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영역에는 여유로운 감정과 생각이 작용할 여지가 없다. 이 대역은 육체적 한계의 경험, 고통에 대한 인내의 경험, 한계와 고통에 맞서는 용기와 의지의 경험 영역이다. 그래서 라이딩에 나설 때의 긴장감에는 결기가 섞이는 것도 사실이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길을 나설 땐 설레고 긴장된다. 조금 두렵기도 하다. 모터사이클을 탈 때 속도는 시속 80 킬로미터와 120 킬로미터 사이를 유지한다. 이동 거리는 300 킬로미터와 500 킬로미터 사이가 되는 게 보통이다. 펄럭거리지 않도록 옷차림도 타이트하게 한다. 라이딩 중에는 몸의 움직임을 최소화해서 가급적 몸과 모터사이클이 일체가 되도록 하고, 손과 발을 이용한 조작도 재빠르게 순식간에 처리한다. 모터사이클을 달리는 라이더들은 거의 정물인 것처럼 보인다.  


모터사이클로 달릴 때는 노정의 대상들이 원경으로 펼쳐진다. 원경의 순간들이 스틸 사진처럼 장면 장면으로 각인된다. 모터사이클의 속도에서는 길 위의 대상들이 보이지 않고, 길가의 풍경들도 빠르게 흐른다. 그래서 안전한 라이딩을 위한 가장 중요한 테크닉이자 습관이 시야를 멀리 넓게 유지하는 것이다. 달릴 때, 라이더는 몸의 움직임은 최소화하지만 감각의 예민함은 최대화한다. 노면은 물론 주변의 모든 상황을 촌각 단위로 주시하고, 상황에 맞는 컨트롤을 위해 모터사이클의 상태와 피드백 느낌을 섬세하게 감지한다. 촌각으로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촌각 단위의 집중을 유지하기 때문에 라이더에게 풍경은 순간의 장면들로 인화된다.  


라이딩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풍경과 길에 순간순간 집중하다 보면, 모터사이클과 라이더가 주고받는 순간순간의 양방향 피드백에 감각을 모으다 보면, 빠르게 달리는 모터사이클 위에서 정적의 순간을 만나기도 한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주위는 멈춘 듯 텅 비고, 모터사이클은 저절로 물 흐르듯 길을 탄다. 라이더는 고요하고 편안하고 명료해진다. 이럴 때, 모터사이클이 저절로 길을 타듯, 라이더의 마음속에는 잊혔던 감정들이 저절로 흘러 오고 흘러간다. 맑은 기쁨이 왔다 가고, 맑은 슬픔이 일었다 잦아들고, 깊은 사랑이 차올랐다 빠져나가고, 선명한 아픔이 돋았다 스러진다.


모터사이클로 달리는 건 몸의 경험이나 생각의 경험이라기보다는 감각과 감정의 경험에 가깝다. 자제된 몸의 움직임 속에서 감각의 예민함과 섬세함에 집중하고, 이 집중이 길, 풍경, 모터사이클, 자기 자신에 대한 몰입을 낳는다. 자신에 대한 투명한 몰입으로 일상에서 경험하기 힘든 감정들을 감지하게 해 준다. 자기 인식과 발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자신의 일면을 잠시나마 보게 해 준다.


몸이 비교적 건실했던 삼십 대에는 생각을 키우는 데 애를 많이 썼다. 생각의 기반이 좀 잡힌 사십 대에는 몸을 격렬히 쓰는 운동을 꽤 했다. 요즘은 근육도 줄고 생각의 순발력도 느려졌지만, 감각과 취향과 감정에 대한 자기 인식을 벼리는 데 관심이 많이 간다. 몸도 나고, 감정도 나고, 생각도 나라는 걸 알아간다. 살아가는 데 포용 여유 성찰도 필요하고, 결기 인내 의지도 필요하고, 집중 몰입 몰아도 필요하다는 걸 깨달아간다. 걷든, 자전거를 타든, 모터사이클을 타든, 가던 길은 계속 가야 한다. 가는 동안 길 위의 경험들이 두텁게 속에 쌓인다면 더없이 좋겠다.


이왕이면 좋은 경험이 쌓이도록 좀 더 좋은 운동화와 자전거와 모터사이클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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