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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이지 Jul 19. 2024

강, 산, 아름다움과 평화: 북한강 끝 평화의 댐

영혼을 위한 강원도 모터사이클 여행

강산, 산하, 산천은 강과 산이다. 물리적 실재로서 강과 산은 우리가 강산, 산하, 산천이라고 말을 하면 지리적 대상을 넘어서 정서, 느낌, 생각을 전한다. ‘우리 강산‘이라고 말해보면, 공동체와 정체성과 영토의 뉘앙스가 느껴진다. ‘우리의 산하’라고 말하면, 자연과 아름다움과 예술의 취향이 강해진다. ‘우리의 산천’이라는 말에는 삶과 지역성과 토착성의 분위기가 있다.


강산, 산하, 산천은 강과 산뿐 아니라 들과 마을까지 포함해서 일반화한 땅이고, 그 땅은 그래서 강토가 된다. 사람들이 제 땅의 불가피함을 받아들이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대할 때, 그 애착으로 인해 땅은 의미와 느낌의 대상이자 원천이 된다.


북한강의 시원 평화의 댐으로 가는 여름 길은 아름답고 힘차다. 양편에 버티고 선 산들은 검푸르게 굳건하고, 계곡을 가득 채워 흐르는 강은 넉넉하고 깊다. 길은 산과 강이 만나는 경계를 따라 이어지고, 그 길을 따라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강토의 끝 평화의 댐에 닿는다. 여름에 이 길을 가는 건 길 위를 달리는 게 아니다. 하나가 된 강과 산의 공간 속을 가는 것이고, 강과 산이 만드는 장의 깊이와 밀도를 통과해 가는 일이다.


북한강을 따라 평화의 댐으로 가는 경로는 도로 체계를 따르자면 복잡해 보인다. 서울 시내를 벗어나 덕소에서부터 6번 국도, 45번 국도, 46번 국도, 403번 지방도, 70번 지방도, 5번 국도, 460번 지방도를 연결해서 타야 한다. 거리는 170 킬로미터다. 지도 위에서는 여러 길들이 혼란스럽게 연결되지만, 막상 달려보면 길들을 갈아타며 연결해 달리는 데 어려움이 없다. 길이 갈라지고 연결되는 곳마다 강의 방향으로 강가에 붙은 길을 타면 된다. 머릿속의 도로 번호를 지우고 그저 강을 따라 올라가면 된다.


두물머리는 북한강을 거슬러 오르는 길의 시작이다. 사철 아름답지 않은 때가 없지만, 장마의 두물머리는 경이로운 회화적 장면을 만든다. 북한강의 푸른 물과 남한강의 황토물은 두물머리를 꼭짓점으로 자로 그은 듯한 일직선의 경계를 따라 청과 황의 대비면을 구성한다. 두물머리의 대비면을 중심으로 북동쪽으로는 북한강 푸른 물줄기가, 남동쪽으로는 남한강 황토 물줄기가 상류 쪽으로 아득히 뻗어간다. 서쪽 하류로는 합수한 한강이 팔당호 가득 황토색 파도를 너울거리며 서해로 흘러간다.


북한강 푸른 물과 남한강 황토물의 대비가 사람들의 이목을 끈 건 오래된 일이다. 북한강의  이름은 녹효수(綠驍水)고, 남한강은 황효수(黃驍水)다. 녹효수는 푸른 물이 말 달리듯 날래게 흐른다는 뜻이고, 황효수는 황토물이 말 달리듯 날래게 흐른다는 뜻이다. 북한강 물은 산지를 흐르기에 장마에도 푸르고, 남한강 물은 평지를 흘러서 장마에 황토물이 된다.


북한강과 남한강은 한강을 기준으로 본류와 지류의 하천 체계를 반영한 개념적 명칭이다. 녹효수와 황효수는 사람들이 보고 겪은 물의 특징을 담 생활과 직관의 다. 북한강과 남한강은 조선 말기 이래 근세에 들어 사용된 반면, 녹효수와 황효수는 삼국시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니 두 물의 차이에 대한 관심의 역사는 깊다. 18세기를 살았던 정약용도 북한강남한강을 녹효수 황효수라고 불렀다.


가평 경강교부터 춘천 최북단 원평교까지 40여 킬로미터는 북한강길이 가진 아름다움과 공간감의 절정이다. 경강교는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다. 내내 오른편으로 강을 끼고 달리던 북한강길은 경강교에서 처음으로 북한강을 건넌다. 강을 건너면 일순 산하의 풍경과 풍토의 기색이 달라진다. 산들의 형세가 한결 우뚝하고 준수해지고, 협곡의 푸른 강은 지척에서 흘러간다. 길은 깊어진 강산 저편으로 저 너머로 이어진다.


춘성대교를 건너 의암댐까지는 몰입의 길이다. 왼편의 계관산과 삼악산, 오른편의 검봉산 봉화산 방아산 줄기들이 겹겹층층 강으로 쏟아져 내려 15 킬로미터에 걸친 계곡을 이룬다. 강은 계곡을 따라 상류를 향해 좁아지다가 이윽고 좁게 열린 하늘로 소실된다. 길은 저만치 계곡 아래를 흐르는 강 위에서 풍경 속을 달린다.


몰입의 길을 빠져나오면 돌연 의암호 물의 세상이다. 서쪽 호반길을 따라 천천히 달릴 때, 의암호와 호수 너머 춘천은 정물적이고 선적이다. 호수는 고요하고, 수면에는 끝없는 잔물결이 인다. 잔물결 담담한 호수는 더욱 고요해진다. 물결을 스치는 시선의 저만치에는 작은 섬 몇몇이 떠있고, 섬들에선 미루나무가 바람에 눕는다. 건너편 호반 아득한 곳에서는 하얀 춘천이 호수의 일부로 나직이 자리하고, 그 뒤로 산마루 달리는 준령과 하늘이 배경을 이룬다.


춘천호 호반길에는 가서 닿을 수 없는, 그러나 닿고만 싶은 로망과 노스탤지어의 아름다움이 있다. 춘천호는 산들에 안긴 산중 호수다. 산중 호수는 은둔과 고립으로 아름답다. 아침의 호수에 내려앉은 산들은 안개 속에 묵묵하고, 산그림자 드리운 저녁 호수는  묵상의 표정으로 바람을 받는다.


호반에는 이따금 집 한 채씩이 놓여 있다. 드문드문 자리한 집들은 인적이기보다는 호수의 정적 위에 놓인 악센트처럼 보인다. 중 호수가의 정적에 한 점 집을 놓는다는 건 철부지 로망이다. 꿈에 대한 아린 노스탤지어다.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밝은 욕망 하나쯤은 품고 산다. 호수와 산의 고요를 들으며 묵언하는 삶은 아름다운 욕망이고 이상이다. 그런 삶을 사는 건 쉽지 않으나, 사람들 중에는 그 이상과 욕망의 소리를 따르는 이들이 있다. 춘천호에는 로망과 그리움의 소리를 따라 지은 아름다운 집들이 있고, 그 집들이 있어 호수는 아름답다.


평화의 댐은 북한강의 끝에, 우리 강토 최북단의 외진 계곡에 있다. 평화의 댐으로 가기 위해서는 접경도시 화천이나 양구를 거쳐야 한. 화천, 평화의 댐, 양구는 한 줄기 외길 460번 지방도로 연결된다. 길의 이름은 평화로다. 적막강산을 오르내리는 평화로의 길이는 60 킬로미터고, 평화의 댐은 화천 양구로부터 30 킬로미터 떨어진 무인지경에 있으니 평화로의 한가운데가 평화의 댐이다.


화천에서 평화의 댐으로 가자면 해산(일산, 日山)의 고비를 넘어야 한다. 해산은 높이가 1,140 미터고, 산세가 가파르고 날카롭다. 해산은 이 산 너머에서 해가 뜨는 것을 보고 사는 화천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쉽고 환하고 간단하다.


 이름이 쉽고 간단하다고 해산을 넘는 것까지 쉽고 간단한 건 아니다. 산을 넘자면 해발 702 미터의 해산터널까지 아흔아홉 구비를 돌아 오르고 거기서부터 다시 평화의 댐까지 아흔아홉 구비를 돌아 내려야 한다. 가파른 산줄기들을 깎아 낸 길이라 위쪽은 절벽이고 아래쪽은 벼랑이다. 서툰 라이더에게는 권할 만한 길이 아니다.


해산 일대는 일망무제의 대자연이다. 광대무변의 무진강산이다. 해산전망대에 서면, 가깝게는 재안산, 백석산, 사명산부터 멀리로는 대우산, 도솔산, 설악산, 점봉산, 방태산, 가리산까지 해발 1,000 미터급의 산봉우리들이 해가 떠오르는 방향으로 거칠 것 없이 펼쳐진다. 봉우리 봉우리 이어 달리는 능선들이 겹쳐지고 또 포개지며 장엄한 파도를 이뤄 한없이 퍼져 나간다. 아득히 깊은 계곡에는 파로호와 지천들이 푸른빛으로 언뜻 거리고, 바람이 쓸어가는 자작나무 숲에서는 소나기 소리가 인다. 참나무 숲에서는 먼 파도 소리가 인다. 무변으로 펼쳐진 산봉우리들과 무한을 달리는 산릉들은 침묵의 범종으로 천지를 출렁이고 소리 없는 법고로 하늘을 울린다.


해산의 무한강산은 땅을 디뎠지만 땅이 아니다. 산을 가졌지만 산이 아니다. 호수와 강을 지녔지만 물도 아니고, 하늘 지만 하늘도 아니다. 여기는 하나의 계(界)고 천(天)이다. 차원이고, 경지고, 이상이다. 강과 산과 하늘의 원형이고, 강 산 하늘의 이데아다. 진실이고 통찰이며 각(覺)이다. 기쁨이고 슬픔이며, 가득 찬 것이고 텅 빈 것이며, 사랑이고 연민이며, 무질서한 질서고, 결국은 아름다움이다.


평화의 댐은 북한강의 끝에 있다. 강토의 끝에 있다. 평화의 댐은 내륙 깊숙한 곳에 있다. 그중에서도 깊고 깊은 산중에 있다. 평화의 댐은 해산과 재안산 높은 봉우리들 아래 낮게 엎드려 있다. 멀고 깊고 낮은 곳에 당도해보는 평화의 댐에는 별 볼 것이 없다. 동으로도 서로도, 남으로도 북으로도 인적이 없어 있는 건 적막뿐이다.


이곳 적막의 존재는 묵직하고 충만하다. 평화의 본질은 적막이고, 평화의 과정은 어긋난 것들의 부딪침과 마주 선 것들의 곤두섬을 묵직한 몸짓으로 통과해 가는 것이다. 평화를 찾아가는 길은 도시와 마을과 강과 산과 숲과 바람소리를 거쳐 적막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게 가는 길이다. 그저 그렇게 가는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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