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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이지 Sep 29. 2023

이름을 짓는 일과 바꾸는 일: 치악산과 구룡사

영혼을 위한 강원도 모터사이클 여행

한 존재를 들일 때, 이름을 짓는다. 정성으로 짓는다. 사람이 태어나면, 당연히 새 생명을 위한 이름을 짓는다. 소중하다면, 동물 식물 집을 위해서도 짓는다. 이럴 때 짓는 이름에는 애정과 소망을 담는다. 이름으로써 하나의 객체가 유일의 주체가 되고, 이름에 담긴 뜻으로써 그 주체가 존재를 완성해 가길 염원한다. 이름을 짓는다는 건, 한 존재의 생애를 위한 축원 의례다.


살다 보면 희망과 의지가 무너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시작을 도모하기도 한다. 이름을 바꿀 때도 새로운 소망과 기대가 담기지만, 그 뒤에 어른거리는 절망과 간절함은 어쩌지 못한다. 이름을 바꾼다는 건, 막막함 속의 모색과 전환, 보장 없는 길의 망설임과 두려움, 마침내의 결심과 첫발이 쌓이고 쌓인 하나의 사연이다.


원주 치악산 아래 오래된 절 구룡사를 찾아간다. 이름을 바꾼 적이 있으니, 사연도 깊을 듯하다. 길은 6번 국도를 타고 횡성까지 가서, 442번 지방도, 42번 국도, 구룡사로를 연달아 짧게 갈아탄다.


치악산은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120 킬로미터 거리에 있다. 멀지 않다.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다워 적악산(赤岳山)으로 불린 적도 있다. 붉은 산이고 바위가 많은 산이다. 지금은 누구나 치악산(雉岳山)으로 부른다. 꿩의 산이고, 여전히 바위가 많은 산이다. 적악산은 온전히 사실을 전하는 이름이고, 치악산은 바위라는 사실 위에 온몸으로 종을 울린 꿩의 이야기를 올린 이름이다. 치악산 정상 비로봉에 올라본 사람들은 꿩산이고 바위산이어서가 아니라 ‘치가 떨리고 악이 받치는 산‘이어서 치악산이라고들 한다.


치악산은 형세가 높고 험하다. 압도감 있는 스케일에, 힘과 기백이 넘친다. 시루봉이라고도 불리는 치악산의 정상 비로봉은 1,288 미터다. 비로봉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삼봉(1,074m), 투구봉(1,002m), 천지봉(1,087m), 매화산(1,083m), 남쪽으로는 향로봉(1,042m), 남대봉(1,180m)까지 1천 미터가 넘는 준봉들이 광대하다. 산역이 원주시, 횡성군, 영월군에 걸치고, 면적은 182 제곱킬로미터에 이른다. 치악산은 대관령 서쪽의 거대한 산군이고, 서울 동쪽의 험준한 산이다.


치악산의 주릉은 남북으로 길게 뻗는다. 가장 높은 북쪽의 비로봉과 두 번째로 높은 남쪽의 남대봉을 기둥 삼아 주능선이 걸쳐진다. 주릉을 따라서는 크고 작은 산줄기들과 계곡들이 양편으로 펼쳐지며 뻗어 내린다. 20 킬로미터가 넘는 주릉과 산줄기들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치악산을 치악산맥이라고도 부른다. 치악산국립공원 홈페이지는 ‘주능선을 타는 종주산행 코스는 굴곡이 심하고 바위가 많다. 21.4 킬로미터로 거리가 길기 때문에 초보자의 무리한 산행은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종주에는 10시간 이상이 소요되고 대피소 등 지원시설이 없으므로, 숙련자에 한하여 이른 시간에 산행을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고 권고한다.


험준한 주능선 중에서도 가장 험한 곳은 북쪽 첫 구간, 구룡사부터 비로봉까지의 5.7 킬로미터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전국 고난도 등산코스 구분에 따르면, 구룡사-사다리병창-비로봉 구간은 등산 거리 5-10 킬로미터 카테고리의 7대 난코스들 중에서도 최고 난이도로 꼽힌다. 몸이 받쳐주지 않을 때, 구룡사에서 비로봉으로 오르는 길은 끔찍이도 고통스럽다.


구룡사는 험준한 치악산 주릉의 기세를 받는 절이다. 주릉의 가파른 북쪽 구간이 쏟아져 내리는 끝지점, 정상인 비로봉으로부터 격하게 내리닫던 능선이 숨을 죽이는 곳이 구룡사의 위치다. 숨을 죽였다고는 하나, 구룡사 계곡은 여전히 깊다. 계곡을 이루는 양편의 산들은 경사가 급하고, 급경사 산들은 서로 바짝 조여 앉아 협곡을 이룬다. 깊고 급한 V자 바위 계곡에는 차고 맑은 물이 흐른다. 물가로는 단풍나무와 소나무가 빼곡하다. 구룡사는 계곡의 급한 산세대로 닦은 터에 높이 올라앉은 채, 성벽처럼 마주 선 맞은편 봉우리를 대면하고, 발치의 깊은 계곡을 조망한다. 사천왕문 뒤에 서보면, 곧추선 돌계단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계단 끝에서는 창공을 배경으로 보광루가 아득하다.


구룡사의 입지와 품새는 창건 연도와도 이치가 닿는다. 구룡사는 668년 의상대사가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위치가 예사롭지 않듯이, 절이 세워진 년도도 범상치 않다. 신라는 서기 668년에 고구려를 무너트렸다. 그로부터 8년 전인 660년에는 백제를 무너트렸고, 그로부터 8년 후인 676년에는 당군을 물리치고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668년 신라의 기세는 거칠 것이 없었고, 포부는 창대했을 것이 틀림없다. 거칠 것 없는 신라의 이념적 중심이었던 의상이 668년 구룡사를 창건할 때, 절집을 앉힐 터로 기백이 넘치고 격한 힘이 흘러내리는 지점을 고른 것은 당연해 보인다.


668년의 九龍寺는 아홉 용의 절이었다. 의상이 절을 지으려고 터를 잡고 보니, 대웅전 자리의 연못에 아홉 용이 살고 있었다. 자리를 내달라 부탁을 하니 용들은 거절했다. 재차 부탁을 하자, 용들은 도력을 겨루자는 제안을 했다. 용들이 비바람을 불러 선공을 했으나, 의상은 여유롭게 받아냈다. 후공으로, 의상이 부적을 써서 연못에 넣으니, 못물이 끓어 용들이 견디고 못하고 떠났다. 여덟은 동해바다로 옮겨갔고, 하나는 눈이 멀어 멀리 가지 못하고 절 위의 깊은 소에 머물렀다. 구룡사는 불법의 수호자인 용들쯤은 여유롭게 다루는 의상이 창건한 절이다.


구룡사 용들이 동해바다로 옮겨가고 13년 후, 681년에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대왕이 죽었다. 대왕은 죽어서 나라를 지키고자 동해바다의 대왕암에 묻혀 용이 되었다. 새로운 세상의 이념을 이끌던 의상의 여덟 용과 통일된 나라의 실체를 이끌던 문무대왕의 용은 한 바다에서 만나 새롭게 구룡의 진용을 갖추었다. 용은 아홉 가지 동물들이 합체한 영물이고, 무한한 힘을 상징하는 황제의 용포에도 구룡이 장식되었다.


아홉 용의 절은 천년 후 거북과 용의 절, 龜龍寺가 되었다. 九龍寺는 의상의 포부와 바람대로 오랫동안 융성했다. 화엄사상을 세운 의상의 절답게 사상과 불법을 추구하는 수도 도량으로 이름이 높았다. 높고 깊은 정신세계를 구축하는 동안, 신라 말의 도선국사와 고려 말의 무학대사가 머물기도 했다. 기운찬 천년을 보낸 후, 조선중기가 되자 九龍寺는 사세가 기울었고, 새로운 운명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이름을 龜龍寺로 바꾸었다.


포부 드높던 의상의 작명 이야기와 달리, 익명의 개명 사연에선 막막함과 혼란스러움이 느껴진다. 스님들은 기운 사세를 두고 고민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노인이 찾아왔다. 그는 절 입구의 거북바위가 기를 막고 있으니 혈을 끊으라고 말했다. 말을 들은 스님들은 거북바위 등에 구멍을 뚫어 혈을 끊었다. 바람과는 달리, 사세가 더욱 기울었다. 그러던 또 어느 날, 다른 노인 하나가 찾아왔다. 그는 사운을 지키던 거북바위의 혈맥이 끊겨서 절이 기우는 것이니 맥을 다시 이으라고 말했다. 다시 말을 들은 스님들은 구멍이 뚫린 바위를 어쩔 수 없어 거북을 되살린다는 뜻으로 절 이름의 九를 龜로 바꿨다. 龜龍寺는 의상의 자리에 한 노인이, 사상의 자리에 노인의 말이, 자신감과 여유로움의 자리에 불안함과 다급함이 얹어진 사연이다.


조선중기에 막다름에 처했던 건 구룡사뿐이 아니었다. 무방비의 왜란과 호란으로 나라는 황폐해지고, 타락한 정치와 제도로 백성들은 궁핍해졌다.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 백성들은 앞날을 몰랐고, 길을 잃었다. 고난과 고통 속에서 절박했던 중생들은 연명, 치병, 풍요, 무탈을 빌고 또 빌었다. 하늘에도 빌고, 바위에도 빌고, 물에도 빌었다. 기복이 종교가 되는 것이 조선중기 백성들의 현실이었다.


불법을 수호하는 용은 하늘을 날지만, 거북은 낮은 자세로 천천히 걷고 헤엄친다. 불교에서 거북은 중생의 고통과 함께하는 영물이다. 거북은 중생이 고통의 바다를 건너 괴로움 없는 세계로 가도록 돕는 동반자고, 중생을 태우고 고통의 세상을 헤쳐 나가는 큰 배다.


龜龍寺는 절로서는 사운의 활로를 모색하는 이름이지만, 시대적으로는 당대의 고통과 절박함에 화답하는 이름으로 느껴진다. 조선중기의 구룡사가 사상과 경전의 높이를 계속 추구할 것인지, 몸을 낮춰 중생의 고통을 새롭게 포용할 것인지를 두고 격한 논쟁을 했다는 건 틀림없어 보인다. 용의 길과 거북의 길 앞에서 숙고와 장고를 했음도 확실해 보인다. 백성들과 중생들이 한없는 고통에 처했을 때, 九龍寺가 龜龍寺로 개명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모든 이름에는 뜻과 지향이 담긴다. 내일의 정체성이 담긴다.


창건으로부터 천년이 지나고 다시 350년이 지난 지금, 구룡사는 거북과 용의 절로서 거북의 길과 용의 길을 함께 가는 것 같다. 구룡사는 2022년 10월 치악산이 적악산이 될 때, 가수 설운도, 장민호, 홍지윤을 초청해서 시민들을 위한 가요축제를 열었다. 대웅전 불단을 낮춰 방문자들이 같은 눈높이에서 부처상을 볼 수 있도록 하고, 노래 연극 풍물을 공연할 수 있는 야외극장도 추진하고 있다. 이 모든 노력들은 ‘기다리지 않고 다가가고, 스님뿐 아니라 지역 공동체와 상생발전하며, 산중에 위치하지만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고, 깨달음의 종교지만 실천의 종교이기도 한‘ 길을 가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높고 험한 치악산은 구룡사 뿐 아니라 인근 주민들의 삶도 품는다. 비로봉에서 흘러내린 물은 치악산 아래 학곡저수지에 모인다. 매화산 정상에서 시작된 물은 전재 밑 오원저수지가 된다. 학곡저수지는 88만 톤의 물을 주변 54만 평의 농경지에 대고, 오원저수지는 85만 톤의 물을 근처 36만 평의 농경지에 공급한다. 학곡지와 오원지의 물로 농사짓는 사람들은 초파일이면 구룡사에 가고, 한여름에는 금강송과 단풍나무 사이로 차고 맑은 물이 흐르는 구룡계곡에서 더위를 피한다.


"천년 신령스러운 거북이 연꽃을 토하고, 영험한 아홉 바다의 구룡을 풀어놓은 형상을 한 천하의 승지”라는 의상의 통찰은 끊어지는 듯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아홉 용의 절이 거북과 용의 절이 되었지만, 九龍寺도 龜龍寺도 구룡사다.


구룡사 아래 전나무숲에는 머리를 들어 오가는 중생들을 살피는 거북바위가 여전하고, 절 위쪽 협곡에는 눈먼 용이 산다는 구룡소가 사철 시퍼렇다. 사람들은 말없이 응시하는 거북바위를 대개 지나치고, 눈먼 용이 어디로 갔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니 구룡소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가끔 거북바위를 찾고, 구룡소를  경외할 뿐이다.

* * * * * *  

아래의 글들과 정보를 참고했다.

- “거북”, 법보신문, 2021. 11. 29.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홈페이지(http://contents.history.go.kr)

- 농어촌알리미 저수율 현황 (www.alimi.or.kr) 2023. 9. 12.

- “오색단풍과 山寺의 절묘한 조화… 마음까지 붉게 물든다”, 현대불교, 2015. 10. 30.

-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르기 어려운 산은 어디?”, < 월간산 >, 2012. 7. 4.

- 원주시청 홈페이지(www.wonju.go.kr)

- “[절로절로 우리 절] <68> 원주 치악산 구룡사”, 불교신문, 2022. 10. 31.

- 조계종 홈페이지 (http://www.buddhism.or.kr)

- “특집/여름산사 1 - 원주 구룡사”, 불교신문, 2005. 0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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