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아다리와 밀브릿지는 서울에서 동쪽으로 180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의 깊은 산중이다. 오대산 비로봉에서 뻗어내리는 산줄기의 남쪽 끝자락에 있다. 해발 고도가 700 미터다. 정북 방향으로는 높이가 각각 1,565 미터인 오대산 호령봉과 비로봉을 이고 있고, 서북쪽 머리맡으로 1,579 미터의 계방산을 두고 있다. 월정사까지는 자동차길로 20여 킬로미터 거리다. 그곳의 방아다리는 약수고, 밀브릿지는 숲이다.
방아다리약수의 기원과 이름에 대해서는 세 가지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들은 치병을 간구하는 남자, 사랑을 갈망하는 여자, 그 사람들이 찾아들었던 장소의 특징을 전한다.
치병의 이야기는 이렇다. 1910년 경 경상도 사람 이상로가 큰 병이 들었다. 유명한 의원을 찾아 전국을 돌며 갖가지 약을 써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병으로 세월을 보내다, 마지막 삶을 오대산에서 마무리하기로 했다. 비로봉 자락 척천리에 이르러 나무 밑에서 잠깐 잠을 자는데,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났다. 그 노인은 평생 병으로 고생한 이를 가련히 여겨 누워있는 자리를 파보라 일러주었다. 꿈에서 깨 땅을 파보니 맑은 물이 솟았고, 그 물을 마시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그 후 이상로는 약수 옆에 신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이 이야기에서 1910년은 1924년이 되기도 하고, 경상도 사람은 충청도 사람이 되기도 하며, 앓았다는 병은 위장병이었다가 신병이 되기도 한다.
사랑과 갈망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다. 척천리에 화전민 아낙이 한 명 있었다. 집에는 절구가 없었다. 그녀는 집 근처에 있던 움푹 파인 바위를 절구 삼아 곡식을 찧어 먹고는 했다. 그렇게 때꺼리를 찧어 먹던 어느 날, 그녀의 절구 공이에 바위가 갈라지면서 맑은 물이 솟았다. 물을 마셔보니 생기를 돌게 하는 약수였다. 절구를 찧던 여인의 이름은 전해오지 않는다.
세 번째 이야기는 사실에 대한 것이고, 그래서 간단하다. 오대산과 계방산 자락에 약수가 하나 있다. 그 약수 주변의 땅 모양이 디딜방아의 다리처럼 생겼고, 그래서 그 물을 사람들은 방아다리약수라고 부른다. 약수 주변의 지형은 실제로 거꾸로 세워 놓은 방아다리를 닮았다. 약수 양편에서 나지막한 산능선들이 V자 모양으로 갈라져 올라가고, 그 능선들이 만든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 옆에 약수가 있다. 방아다리약수는 척천리라는 행정지명을 따라 척천약수라고도 불렸다. 사실에 대한 이 이야기에도 약간의 상징이 어른거린다. 방아다리와 사람의 다리는 생김새가 아주 비슷하다.
발견과 이름에 대한 사연은 달라도, 이 물의 약능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꾸준하다. 방아다리약수는 일제강점기까지 이북의 삼방약수와 함께 양대 약수로 유명했다. 1987년에는 경향신문사 선정 ‘한국의 명수(名水) 100선’에 들었고, 1998년에는 ‘한국관광공사 선정 7대 약수‘에 뽑혔다. 이 물에는 철분, 나트륨, 칼륨, 칼슘, 마그네슘, 불소, 황산이온, 망간을 포함한 32종의 효능 성분이 들어 있다. 위장병, 피부병, 신경통, 빈혈에 효험이 크고, 병이 없는 사람이 먹으면 건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약수의 영험함을 믿는 사람들이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모인 사람들은 약수 옆 산장에 장기 투숙하면서 매일 약수를 받아 마셨다. 밥때가 되면, 식당에서 약수로 지은 밥과 약수로 끓인 토종닭 백숙을 먹었다. 물을 받을 때는 약수 옆 용신각에 소원을 빌었다. 용신각의 용왕은 방아다리약수를 지켜줄 뿐 아니라 치병으로 방문한 사람들의 소원도 들어준다고 한다. 사람들은 약수 효험이 가장 좋다는 6-7월 메밀꽃 필 무렵에 산장에 머물다가, 겨울이 오기 전에 집으로 돌아갔다.
밀브릿지(Millbridge)는 산지 20여 만평 땅에 전나무와 낙엽송 10만 그루를 가진 숲이다. 밀브릿지의 기원과 명명은 분명하다. 교육가이자 독림가인 김익로 선생은 한국전쟁 이후 황폐화된 방아다리약수 일대의 산지를 1957년에 매입했다. 이후 매년 전나무와 낙엽송을 심고 가꿨다. 1975년에 이 숲은 오대산국립공원에 편입되었다. 김익로 선생의 딸 김은정씨는 2016년 학습과 숙박이 가능한 프로그램을 도입해서 아버지의 숲을 밀브릿지로 다시 열었다.
밀브릿지 숲은 바늘숲이나 대나무숲의 느낌이 난다. 한여름에 쏟아지는 장대빗줄기 같기도 하다. 곧고, 가는 줄기의 전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숲 안에서 쳐다보면, 수직의 전나무들이 공중으로 빨려들 듯 뻗어 오른다. 곧장 솟는 나무들은 가지를 펼치는 대신, 힘 있는 율동감으로 하늘로 날아오른다. 하늘에 닿은 아득한 줄기 끝에만 성긴 가지들이 나있고, 그 가지의 푸른 잎들 사이로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듬성듬성하다.
딸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결코 평범한 아버지가 아니다. ‘어렵고 무서운 분‘이다. 목기와 목재 물고기상자로 돈을 모았고, 그 돈으로 평창과 제천 일대의 산들을 매입했다. 그리고는 매년 10만 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었다. 제5공화국 출범 전 계엄사령부가 재산 헌납을 강요했을 때, 요구를 거부하고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그때 나이는 60세가 가까웠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세무사찰도 견뎠고, 큰돈으로 대규모 위락단지를 만들겠다는 대기업의 유혹도 물리쳤다. 폭력, 위압, 유혹을 버티게 한 건 믿음이었다. “아버지는 평생 가꾼 나무를 결코 돈으로 계산하지 않으셨어요. 직접 심고 가꾼 오대산의 숲이 잘 보존돼 후손들의 쉼터가 되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고 항상 말씀하셨어요.”
김익로 선생은 1993년에 사망했고, 김은정씨는 2016년에 밀브릿지를 열었다. 아버지의 말과 행동을 기억하는 딸은 이 숲 속 공간을 허술하게 준비하지 않았다. 국립공원 안의 사유지인 까닭에 국가로부터 허가를 받는 데만 10년을 썼다. 허가가 난 후에는, 20만 평 숲 안에 6천 평 규모의 체험학습과 숙박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자연 공간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승효상 건축가에게 의뢰했다.
건축가와 건축주는 6천 평의 프로젝트에 시간과 공을 들였다. 2011년 환경부 고시로 건축 결정이난 후, 2012년부터 1년 간 설계를 진행했다. 착공을 2013년에 해서 2016년 4년 만에 준공을 봤다. 설계와 시공은 있던 대로의 지형을 따라서 시설들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건축가는 이 방식을 ‘인공물 위주의 계획이 아니라, 지형이 곧 건축이 되도록 지문(地文)을 따르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자연을 존중하는 기본 개념에서 출발한 공간이 오대산의 자연환경과 공생하는 풍경으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고 설명했다. 건축주는 그 뜻을 ‘서두르지 않았다. 몸으로 자연을 느끼고, 편하게 휴식하며, 교양적 욕구도 충족할 수 있는 숲 속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치유 공간으로 밀브릿지가 자리 잡도록 하겠다 ‘고 밝혔다.
밀브릿지는 지금 10만 그루의 전나무숲, 숲 속 산책로, 야생화 정원, 습지원, 명상원, 갤러리, 카페, 숙박, 교육, 문화공간이 자연 속에서 조화되는 고요한 공간이다. 무엇하나 날림이 없고, 유치함도 없다. 도드라지는 것도 없고, 나대는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소박하게, 굳건하게 제자리에 제 모습으로 있을 뿐이다. 밀브릿지에 들어서면, 어느 결엔가 나직이 말하고, 정성스레 걷고, 조용히 웃게 된다. 시간은 순하게 흐르고, 숲은 편안하게 감싼다. 굳은 믿음을 가진 건축주의 뜻이 깊은 생각과 존중을 가진 건축가에 의해 구현된 모습이 밀브릿지인 것 같다. 사람들은 이제 밀브릿지에 약수를 마시러 오지 않는다. 담담한 격조 속에서 쉬고, 산책하고, 독서하고, 배우고, 토론하고, 성찰하러 온다. 약수를 마시기는 하지만, 그것 또한 밀브릿지 콘텐츠의 하나로 받아들인다.
방아다리에서는 신앙의 느낌이 묻어난다. 사람들은 병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 앞에서 절박했다. 사랑과 로맨스가 없는 생활 속에서 절망했다. 병이 낫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약수를 마셨고, 사랑을 갈구하는 몸으로 절구를 찧었다. 치병과 사랑의 소원을 들어 달라는 애끓는 마음으로 용신각에 빌었다. 견디기 어려운 삶 앞에서, 버티기 힘든 생활 속에서, 물에 의지하고 용왕에게 의탁했다.
밀브릿지에서는 신념이 느껴진다. 이 숲을 일군 사람은 숲을 위해 물리적 폭력을 견뎠고, 행정적 폭력에 굴복하지 않았고, 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의 딸은 숲의 가치를 현대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허가를 청원하고 10년을 기다렸다. 아버지의 뜻을 요즘 사람들에게 전달하기에 적합한 공간의 목적을 궁리하고 공간의 모습을 상상했다. 사려 깊은 건축가는 자연을 존중하는 기본 개념을 바탕으로, 자연과 공존하는 풍경을 지향하면서 소박하고 단단한 품격의 공간을 구현했다.
밀브릿지에 가보면, 방아다리 약수물은 계곡을 따라 낮은 곳으로 흐른다. 밀브릿지 계곡을 벗어난 물은 한 척 깊이의 척천이 된다. 척천은 진부에서 오대천이 되고, 오대천은 나전에서 조양강이 된다. 조양강은 가수리에서 동강이 되고, 동강은 영월에서 남한강이 된다. 남한강은 양수리에서 한강이 되고, 한강은 김포에서 조강이 된다. 조강은 끝내 강화도에서 서해 바다에 섞인다. 방아다리 약수물은 제 이름을 지우고 지우면서 흘러간다.
밀브릿지 숲에 들어서보면, 숲을 이루는 건 나무다. 나무의 줄기는 암갈색이고, 나무의 가지는 회갈색이다. 나뭇가지 마다에는 뾰족하고 푸른 잎들이 달려 있다. 나무의 옆에는 다른 나무가 있고, 그 옆에는 또 다른 나무가 있다. 그 나무들은 봄에 꽃을 피우고 가을에 열매를 맺는다. 매년 그 일을 새롭게 반복한다. 그러면서 매년 자란다. 연륜을 더해가며 존재감을 키워간다. 그렇게 잘 자란 전나무는 키가 40 미터, 둘레가 1.5 미터가 넘는 거목으로 늠름해진다. 전나무 하나하나에 모두 이름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웃한 월정사에서 600살까지 살다 간 전나무는 ‘할아버지 전나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흐르고 흘러 이름을 지워가는 것과 년년이 자라 존재를 이뤄가는 것들이 여기 한자리 지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