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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이지 Mar 13. 2024

터전의 생활, 시선의 삶: 태백고원 황재 전재의 마을들

영혼을 위한 강원도 모터사이클 여행

모터사이클 라이더에게 로드 로망은 불가피하다. 끝없는 대지 속으로 아득히 멀어져 가는 길의 고독, 절정을 향해 가는 벚꽃길의 분분한 낙화 속을 달리는 애련, 푸른 들 깊은 숲 사이로 난 호젓한 길의 고요함이 모터사이클을 길로 이끈다. 로망이 이루고 싶은, 그러나 이루기 쉽지 않은 꿈이고 동경이라면, 로망을 품은 라이더는 본질적으로 드리머다.


6번 국도는 라이더에게 현실의 로망이다. 이룰 수 있는 꿈이다. 이 길은 서해의 인천항부터 동해의 영진항까지 262 킬로미터를 수평으로 연결한다. 길을 달리면, 한강의 넉넉함과 유장함, 태백고원의 다정함과 아늑함, 오대산과 동해의 벅찬 감동을 만날 수 있다. 은밀한 자리에서 소박하고 맛있는 음식을 내는 예사롭지 않은 집들도 찾을 수 있다.


6번 국도 경로에 황재가 있고, 인근에 전재가 있다. 인천에서부터 160 킬로미터, 서울부터는 120 킬로미터의 거리다. 이 고개들은 한반도를 서쪽 평지와 동쪽 산지로 나눈다. 황재는 해발 500 미터고, 전재는 해발 540 미터다. 전재와 황재 아래 자리 잡은 횡성읍은 해발 100 미터다. 6번 국도는 인천역부터 횡성읍까지 160 킬로미터를 달리면서 고도를 100 미터 올린 후, 황재와 전재에서 곧장 해발 500 미터로 올라서서 해발 960 미터 진고개 정상까지 60 킬로미터에 걸쳐 꾸준히 고도를 올린다. 그리고는 해발 0미터 동해로 곧추 내리 꽂힌다.


황재와 전재의 주위는 오래된 마을들의 터전이다. 행정명으로는 우천면, 안흥면, 둔내면이다. 이곳의 마을들은 사방에 둘러선 높은 산들을 배경으로 하고, 평평한 들을 흘러가는 강과 개울을 전경으로 삼는다. 들이 넓어서 전경은 논이고, 밭은 배경의 일부로 집들에 필요한 만큼씩 딸려 있다. 이 마을들에선 초여름 바람이 들을 쓸어가고, 이른 아침의 안개가 동네를 감싸고, 석양이면 익숙하던 서산의 풍경이 멀어지며 깊어진다.


터전은 생활(Living)의 근거가 되는 땅이다. 집터가 되는 땅이고, 살림의 중심이 되는 땅이다. 사람들은 터전의 환경과 조건 위에서 생활한다. 터전 속에서 목숨을 보전하고, 생계를 잇는다. 생존과 생계는 언제나 시급해서 생활을 일구는 일의 시야는 현재에서 크게 벗어나기 어렵다.


삶(Life)은 생활에 바탕하지만 생활을 넘어선다. 삶은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는 여정이고, 그 여정에 걸친 모든 행동과 활동이 만들어내는 감각, 감정, 의미, 느낌에 대한 기억과 내적 성찰을 반영한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품고 생활하면, 그 결과가 삶이 된다. 삶은 개인적 생활을 넘어선 사회적 의미와 문화의 맥락 속에서 만들어진다. 생활을 넘어선 문화적 차원에 대한 추구는 성찰을 필요로 하기에 삶의 시선은 현재의 순간보다 깊고 멀고 높은 곳을 지향한다.


터전과 시선은 살아가는 일의 두 가지 요건이다. 터전은 살아가는 일의 기초고 토대다. 건실한 생활의 기본이자 바탕이다. 시선은 생활 이상의 세계에 대한 끌림과 관심이다. 즐겁고 충만한 삶에 대한 인식이자 의지다. 터전은 내실이고, 끌어안음이고, 익숙함이다. 시선은 확장이고, 열어젖힘이고, 새로움이다. 터전에서는 머물러 자족하고, 시선은 나아가 성취한다.


터전과 시선, 생활과 삶이 긴장과 균형을 이룰 때, 살아가는 일에는 단단함과 윤택함이 더해진다. 터전에 갇혀 생활에만 몰두하면 사는 일이 뻑뻑하고 건조해진다. 윤기가 사라지고, 즐거움과 멋스러움이 없어진다. 터전에 바탕하지 않은 채 너무 높고 먼 시선만 좇으면 사는 일이 실없어지고 공허해진다. 처지는 딱해지고, 사람은 한심해진다. 자아의 근거와 의식 간에 거리가 적당할 때, 온전함 진실함 풍요로움 존엄함이 들어설 공간이 생긴다.


경계의 황재와 전재 마을들은 동쪽의 깊은 산중으로 더 들어갈 수도 있고, 서쪽의 대처로 나아갈 수도 있다. 터전에 머물 수도 있고, 시선이 이끄는 대로 나설 수도 있다. 이 마을들에는 들고 나는 이치, 터전과 시선의 균형을 저마다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정두화 씨는 우천면 우천포도원의 대표다. 80대인 그는 부인과 함께 포도원을 직접 운영한다. 부부는 언제나 표정이 부드럽고, 말과 행동은 모난 데 없이 조용하고 다정하다. 일을 할 때도 몰아치는 법이 없어서 하는 듯 안 하는 듯 어느새 마친다. 두 사람 모두 나고 자란 우천면을 떠나 본 적이 없다.


이 부부가 우천면과 포도원 생활에만 매여 사는 건 아니다. 우천포도원은 2023년 대한민국 과일산업대전의 대한민국 대표과일 선발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외관심사, 계측심사, 과원심사의 까다로운 심사 과정을 거친 결과다. 2020년에는 같은 대회에서 장려상을 받았고, 2021년에도 장려상을 받았다. 이런 결과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정두화 대표 부부의 시선은 포도에 관한 한 늘 더 높은 곳을 향해 있다.


10 킬로미터 떨어진 안흥면에는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 이가본때라는 베이커리 카페가 있다. 위치는 산간마을의 한가운데고, 카페로 쓰는 집은 허름하고 오래된 농가다. 한겨울 혹독한 찬바람과 매서운 눈보라를 피하기 위해 북쪽 산비탈을 파내고 남향으로 낮게 들어앉힌 전형적인 산촌 가옥이다. 이 집은 여주인의 할아버지 집이었다. 여주인의 아버지는 이 집을 떠나 서울에서 자리를 잡았고, 여주인은 서울에서 자라 결혼한 후에 할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다.


주인 부부는 할아버지의 언덕밭에서 밀을 키우고, 그 밀을 빻아 밭 옆의 헛간 화덕에서 시골빵 올리브빵 카스텔라를 굽고, 할아버지의 집에서 그 빵과 커피를 판다. 이가본때의 업력이 10년에 가깝고, 안내판도 간판도 없는 카페에 손님이 끊이지 않으니 한 때의 낭만으로 지나갈 일이 아니다. 할아버지의 오래된 터에서 새로운 터전을 일구는 부부는 자신들의 본모습대로, 사람의 본모습대로 살기를 지향한다. 이렇게 사는 건 쉽지 않다. 둘 다 이 씨인 부부는 본모습, 본태로 산다는 뜻으로 카페 이름을 이가본때로 지었다.


둔내면과 방림면의 경계를 이루는 산속에 화이트 크로우 브루잉이 있다. 이가본때에서 20 킬로미터 거리의 브루어리 겸 브루 펍이다. 이 크래프트 브루어리에서는 캐나다인 남편이 맥주를 만들고, 한국인 부인이 피자를 굽고 감자칩과 어니언링을 튀긴다. 부부는 좋은 물과 지역의 재료로 맛있는 맥주를 만들기 위해 인연이 전무한 이 산중에 자리를 잡았다.


생면부지의 자리에서 부부는 로컬의 색과 향이 진한 맥주를 만든다. 시그니처 라인업에는 화이트 크로우 IPA, 고라니 브라운, 앨티튜드 앰버 같은 맥주들이 포함되어 있고, 시즈널 라인업으로는 쿨벅 라거, 새소리 같은 맥주들이 있다. 깊은 산중에서 맥주를 만들지만, 부부의 지향점과 기준은 전국을 넘어 세계적 수준에 맞춰져 있다. 화이트 크로우 브루잉의 대표는 캐나다 올즈 칼리지의 브루 마스터 과정을 수석으로 마쳤고, 그가 만든 '평창 골드'는 2020년 아시아 맥주 챔피언십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2019년에는 '평창 고라니'로 같은 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브랜드명인 화이트 크로우는 흰 까마귀라는 뜻인데, 브루어리가 자리 잡은 평창의 옛 이름이 백오다.


라이더에게는 로망이 있다. 끝없이 뻗은 길 위에서 고독에 전율하는 로망, 꽃잎 흩날리는 길을 낭만과 함께 달리는 로망, 들 길 숲 길과 하나가 되어 자신도 세상도 잠시 잊는 로망.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로망이 있다. 자신의 터전에서 자부심 넘치는 최고의 포도를 키워내는 로망, 낮고 조용한 곳에서 사랑하는 남자와 온전한 빵을 구우며 온전한 삶을 사는 로망, 산속에서 사랑하는 여자와 '좋은 사람들을 위해 좋은 맥주'를 빚으며 사는 로망,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사는' 로망.


황재와 전재의 마을들에서 로망이 꼭 이루기 힘든 꿈만은 아니라는 걸 본다. 로망을 사는 사람들은 매력적이고,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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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영순, “생활과 삶의 차이“, 문화일보 2011. 6. 2.


- “Live vs Life: A Comprehensive Guide to Using These Words Correctly”, Strategically Content Writing Agency (https://strategically.co/blog/grammar-tips/live-vs-life)


- “횡성 포도, 대한민국 대표 과일 선발대회 우수상 수상“, 스포츠서울, 2023. 11. 24. / 강원일보, 2023. 11. 26. / 횡성뉴스, 2023. 12. 11.


- “새로운 취향의 발견, 한우 없는 횡성 여행”, 대한민국 구석구석, 2020. 10. 23. (https://korean.visitkorea.or.kr/detail/rem_detail.do?cotid=23377e29-6a75-429d-8696-ded212f94cd7)


- “생활맥주X화이트크로우 브루잉, 지역 상생 프로젝트 '마시자! 지역맥주' 5차 진행”, 디지털조선일보, 2019. 5. 17. (https://digitalchosun.dizzo.com/site/data/html_dir/2019/05/17/2019051780056.html)


- “화이트 크로우 브루잉, 2023 KIBEX 참가... 강원도 평창發 수제 맥주로 전국구 소비자 입맛 겨냥!”, AVING, 2023. 4. 12. (https://kr.aving.net/news/articleView.html?idxno=1778120)  


- 박경리, “일 잘하는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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