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나는 뱀
'삐링삐링 삐리링~'
전화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마당을 이리 저리 돌아다니며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었다.
“미처 사오지 못한 구들장 돌은 저걸 쓰면 될 거야.”
나는 누가 보지도 않는데 손가락으로 집 앞 기단을 가리켰다. 산불관리 아저씨가 말한 대로 넓적한 게, 마치 공장에서 만들어진 구들장돌과 비슷한 돌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참나, 뭐가 먼저이고 뭐가 나중인지 모르겠네.”
나는 실소를 했다. 분명 자연에서 찾아낸 둥글둥글한 구들장 돌이 먼저일 테고, 그걸 본따서 네모반듯한 화강암 구들장 돌을 만들었으니 공장에서 태어난 구들장돌이 나중일 테지만, 내 기준은 공장 구들장 돌이 되어 천연 구들장돌을 평가하고 있었다. 천연 구들장 돌은 네모반듯하지가 않아서 나란히 놓았을 때 아귀가 맞지 않을 테고, 두께 역시 들쭉날쭉이었다.
'삐링삐링 삐리링~'
전화가 잠시 끊기는가 싶더니 다시 울렸다. 회사 사무실에서는 전화벨이 한번 울리면 바로 손이 수화기 위로 올라가고, 두 번째 울리길 기다렸다가 받는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내버려두면 전화는 몇 번 울리다 끊기곤 했다.
“아쉬우면 다시 전화하겠지.”
나는 그렇게 쓸데없는 전화를 걸러내면서 얼마쯤 한적함을 즐기고 싶었다. 시골 산속까지 왔으니 아버지가 느낀 것과 같은 걸 느끼고 싶었다. 그 뒤에는 이 집을 깨끗이 팔아버릴 거니까. 그런데 전화벨이 끊임없이 울리며 오랫동안 시간을 끌자, 할 수 없이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아고, 여보세요.”
“아고는 또 뭐야? 전화는 왜 또 안 받고? 잘 쉬고 있어?”
카리스마 ‘없는’ 편집장이 질문을 쏟아냈다. 편집장은 아주 물러 터진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십 년도 넘게 편집장 자리에 앉아 있는지 미스터리였다. 편집일정을 사장이 원하는 대로 촉박하게 잡고 나서는 늘 일정에 맞추지 못해 전전긍긍했다. 편집장이 사장실로 들어간 뒤에는 늘 호통소리가 회사 안을 메아리쳤다. 하지만 밖으로 나온 편집장은 금세 헤헤거렸다.
“저러다 말겠지. 혼자 분에 못 이겨서 그러는 거야. 아침에 부부싸움이라도 했나?”
편집장은 능청을 떨면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돋보기를 끼고 책상에 붙어 앉아 모니터 뒤로 숨어버리곤 했다.
“이나 씨, 좀이 쑤시지 않아? 오늘 나랑 인쇄소 한 번 출동하지 않을려?”
서울 원룸에 있었으면 딱 환영할 만한 멘트였다. 편집장은 내가 의미 없는 일-예를 들면 휴가 같은-을 무척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하릴없는 휴가가 나흘이나 지난 뒤에 나한테 전화한 것을 보면 저 순해빠진 마음 속에도 약간의 짓궂음이 숨어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나는 인쇄소를 사랑했다. 심각하게 이직을 고려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거대한 패널로 튼튼하게 지은 인쇄소 안의 주인공은 단연 인쇄기였다. 인쇄에 따르는 복잡한 공정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게끔 조직적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그 기계는 유리상자 안에서 아귀를 딱딱 맞추어 리드미컬하게 돌아가는 도르래 기계 장치만큼이나 흥미로웠다. 또 마치 가는 누에실을 가로세로로 엮어서 매끄러운 비단을 만드는 직조기만큼이나 내 상상력을 채워주는 꿈의 기계였다.
거대한 공간에 자리잡은 두 개의 길고 묵직한 기계와 그 옆에 각각 자리잡은 큼지막한 라이트박스와 벽에 붙은 갖가지 색상표도 특별히 유난스러웠다. 인쇄소에 맡긴 책의 표지와 내지 디자인을 철판에 그대로 재현한 판을 인쇄기에 꽂은 뒤 기계를 돌리면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각기 소리치면서 대화를 이어가야 할 만큼 소음이 심하다. 우렁찬 기계소리에 사람들의 활기찬 대화와 박력 있는 몸집을 보고 있노라면 이곳이야말로 진짜 삶의 현장이라는 생각으로 가슴이 뛴다.
하지만 내게 인쇄감리란 그림의 떡이었다. 나는 색의 미묘한 차이를 편집장이나 디자이너만큼 구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세월이 더해 가면 좀은 나아지련만 내겐 그런 센스가 부족했다고나 할까? “천하의 이나 과장도 못하는 게 있었어!” 인쇄소에 견학 온 신입사원들이 뒤에서 수군거렸다. 그때만큼은 편집장이 잘난 척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샘플로 인쇄한 책표지 한 장을 라이트박스에 올려놓고 편집장은 잘도 지껄여댔다.
“어, 여기는 마젠타를 좀 올려야 할 것 같은데요, 기장니임~!’”
“뭐어라아고오요오~?”
칫칵칫칵 칫칵칫칵.
기계의 규칙적인 소리에 분열을 일으키려는 편집장과 기장의 자부심에 찬 고함소리가 날 침울하게 하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직을 단념해 버리자 십년지기, 사람 좋기만 한 편집장과 인쇄소로 출동하는 건 일종의 나들이가 되었다. 편집장이 침침한 눈으로 연신 안경을 치켜올리며 끙끙대는 동안, 나는 인쇄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우리 출판사의 책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출판사의 막 인쇄된 따끈따끈한 책들의 파편을 흘끔거리기도 했다. 인쇄물은 고개를 이리저리 기울여 가며 내용을 읽여야 했는데, 전지에 인쇄된 페이지들의 방향이 사방팔방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찍은 전지를 일정한 방식에 따라 접으면 페이지를 넘김에 따라 읽을 수 있는 소책자가 된다. 그리고 페인트통 만큼이나 커다란 통에 담겨있는 갖가지 잉크에서 나는 잉크 냄새를 깊이 들이마시기도 했고, 각을 잡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가지런히 쌓여있는 수천, 수만의 정렬된 인쇄물 산들을 보면서 기계문명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하기도 했다. 인쇄소 사장과 인스턴트 커피 한 잔을 하며 한담을 나누는 것이나, 보람찬 감리를 마친 후 근처 기사식당에서 푸짐한 식사를 하는 것도 나들이의 주요 즐거움이었다.
“음, 오늘은 좀 곤란하겠는걸.”
“오야,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데이트?”
“아니, 지금 지방에 와 있거든.”
평소 같으면 데이트 상대에 대해 허풍을 쳐 가며 농담 따먹기라도 하련만 지금 내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어서 구들장 만들기에 착수하고 싶었다.
“웬 지방?”
“아, 아버지 사시던 집, 정리하려고 내려왔어. 며칠 있다 가려고.”
“에, 텅 빈 집에서 혼자 뭐해?”
“뭐, 서울에 있으면 뭐하나 싶어서...”
“그래, 아버지 생각하면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겠다?”
“그렇지 뭐...”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모하는 시간은 잠깐이었다. 편집장이 잠시 뜸을 들이다 한 마디 날렸기 때문이다.
“아니야, 아냐... 뭔가 냄새가 나는데? 거기 누구... 멋진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아, 그... 이나 씨 아버지가 늘 말씀하셨다던?”
“에이구. 무슨 소리야. 그 사람은 생전 코빼기도 안 보인다고.”
나는 당황해서 거짓말을 해버렸다. 하지만 생거짓말은 아니었다. 그 사람은 그야말로 코빼기만 보이니까. 아침이나 저녁때 잠깐 와서 성질만 돋우고 가버린다. 원래 농사라는 것이 그렇게나 바쁜 일인지. 그가 우리 아버지한테 신세 많이 졌다는 말도 다 예의상 한 말이 아니었나 싶었다. 아니, 우리 아버지가 그 사람한테 신세를 많이 졌다고 했던가? 어쨌거나 편집장,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그러게 곰 같은 사람이 섣불리 여우 흉내를 내려고 하다니! 우습다, 얘.
전화를 끊고 보니 갑자기 한숨이 나왔다. 정신이 산란해진 것 같았다. 무지하게 넓은 안마당을 왔다갔다하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짓이기면 짙은 물이 스며나올 것 같은 초록 천지에 눈을 내맡겼다. 초록 위로 천연의 검푸른 깃털과 밝은 노란 깃털이 푸드덕대면서 서로 물가 자리를 다투고 있었다. 물까치와 어치였다. 아버지의 새 도감을 밤새 뒤적거린 덕분으로 집 주변에 사는 몇몇 새들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물까치는 익살스러운 도둑처럼 머리에 검은 두건을 쓴 채 혼자서 물가를 찾아온 어치를 나무랐다. 어치가 꿈쩍도 안 하자 물까치는 떼를 이뤄 야단스럽게 위 아래로 날아다니며 어치의 흉을 보았다. 자존심이 상한 어치는 알록달록 예쁜 날개를 펼치고 도도하게 그 자리를 떠나려 했다. 하지만 커다란 몸은 이상하게 뒤뚱거려지고, 목에서는 까마귀 소리 같은 꺽꺽 소리밖에 안 나온다. 당황한 어치는 창피해서 양 볼을 붉힌 채 물까치떼에 쫓겨 반대편 숲으로 날아가 버렸다.
인터넷으로 구들장 놓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동영상도 물릴 만큼 보았다. 어쨌거나 구들장은 서양 건축처럼 수치화, 매뉴얼화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아무래도 수요가 없다보니 그런 듯했다. 대신 ‘구들장은 이렇게 놓으면 좋다더라’라는 수많은 ‘카더라’ 류의 정보들 중에서 내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을 선택해 보려고 했다.
아버지는 방 바깥에서 불을 피워 방 안으로 열기를 보내는 공간(연소실 또는 함실이라고 부른다)을 먼저 조성해 두셨다. 그리고 불길과 뜨거운 연기가 방을 가로질러 가 바깥으로 빠지는 굴뚝 구멍까지 다 파 놓으셨다. (최진이가 이 부분에서 활약했다며 어찌나 뻐기던지) 함실과 굴뚝이 일직선으로 놓인 걸 보니 아버지가 불길(고래)을 어떻게 만들려고 하셨는지 추정이 가능했다.
“허튼고래구들, 곧은고래구들, 부채고래구들 정도네...”
허튼고래는 일정한 불길을 만들지 않고 그냥 고래둑(벽돌로 쌓은 짧은 기둥)을 점점이 놓아 그 위에 구들을 얻는 고래방식이었다. 곧은고래구들은 벽돌을 쌓아 불길을 굴뚝까지 죽 1자 모양으로 여러 개를 나란히 놓는 방법이었다. 부채고래구들은 이름대로 부챗살모양(방사형)으로 불길을 내는 것인데 이 고래놓기 법은 커다란 방에 주로 한다고 한다. 제일 쉬운 건 허투루 고래둑을 쌓아도 될 것 같은 허튼고래였지만, 크기가 일정치 않은 천연 구들돌을 올려놓기에 오히려 어려울 것 같았다. 일단 나는 일자로 고래를 내는 곧은고래구들 방법을 택했다.
방향을 정했으니 남은 건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 나는 벽돌을 한 장 한 장 날라서 쌓기 시작했다. 그런데 쌓으면서도 뭔가 이상했다. 그때 갑자기 만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평평한 바닥에 벽돌 놓고, 그리고 또... 흙손으로... 시멘트 한 덩이 척 떨어뜨려 놓고 그 위에... 벽돌 올리고!
아차, 나는 이마를 탁 쳤다. 벽돌 사이에 시멘트를 발라야 하잖아! 아버지 창고에 시멘트가 한 포 있는 걸 본 것 같았다. 부리나케 창고로 달려가 확인해 보니 과연 있었다.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걸 또 어떻게 옮겨올까? 무게가 40킬로그램이나 나가니 말이다. 내가 나이 마흔이 되려니, 어느새 40이란 숫자가 공포의 숫자가 되었는데, 이놈의 건축자재들이 그걸 아는지 죄다 하나에 40킬로그램이니 말이다. 구들장 돌도, 시멘트도... 몸무게가 40킬로그램이었던 적은 초등학생 때 이후로 전혀 없었던 일이니 40이 꿈의 숫자가 되리라는 희망을 가질 전망은 없었다.
그 자리에서 가위로 포대를 열어서 넓적한 고무 대야에 물과 함께 넣고 삽으로 개었다. 물을 조금씩 넣어가면서 조절하니 의외로 반죽이 찰지게 잘 됐다. 그것을 통에 조금씩 담아가지고 방으로 돌아가 벽돌을 위에 착착 얹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금 하다 보니까 벽돌로 된 고래둑이 1자가 아니라 S자인 듯 똑바르지 않고 구불구불하게 되었다. 이누크도 그걸 알아보았는지 의아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누크는 아침 내내 무얼 잡는지 풀숲을 뛰어다니더니 온 털에 잔풀 같은 게 잔뜩 매달려 있었다.
“어라, 이누크. 이게 뭐야? 털이 마구 엉켰잖아.”
내 고래둑 역시 단정치 못한 모습이었으니 아버지가 보셨다면 잔소리깨나 늘어놓으셨을 것 같았다. 하지만 뭐 어때. 아버지도 안 계시고, 게다가 구들돌 놓고 위를 흙으로 메워 버리면 보이지도 않을 텐데.
하지만 그대로 진행하기엔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그렇잖으면 나중에 되로 막을 거 말로 막게 되지 않을까? 내가 야단스럽게 만들어 직원들에게 배포한, 편집자를 위한 충고 제1조를 생각해 보아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이었다.
“초교를 3교처럼!”
원고를 컴퓨터 프로그램 상에 책꼴이 되게끔 편집한 뒤 프린트한 것을 교정지라고 한다. 담당 편집자는 교정지를 꼼꼼히 살펴 오자를 찾아내고, 비문을 정리하며, 글자체나 일러스트 등에 개선점은 없는지 꼼꼼히 살펴 교정지 위에 약속한 부호로 표시한다. 그러면 담당 디자이너는 편집자가 표시한 부호를 참고, 편집자와 상의하여 컴퓨터 상에서 수정 또는 개선을 한다. 이런 과정을 총 세 번 정도 거치는데 그것을 초교, 2교, 3교라고 부른다. 초교를 볼 때 앞으로 두 번이나 더 교정을 볼 기회가 있기 때문에 술렁술렁 교정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안 될 말이다. 초교 교정지를 그대로 인쇄소에 넘겨도 될 정도로 완벽하게 봐야 한다.(이때 사무실의 깝죽이는 ‘교정본 것을 디자인부에서 제대로 고치기만 한다면야’라며 깝죽거려서 엉뚱하게 디자인부와 편집부 간에 싸움을 붙였다.) 그렇지 않으면 2교, 3교 때 무척 고생하게 되며 마음이 급해져 실수를 할 우려까지 높아진다.
나는 한숨을 쉬며 창고에서 긴 비닐끈을 찾아와 흙바닥에 못으로 고정시켜 줄을 맞추었다. 5줄 정도 나왔다. 검은 흙바닥에 줄맞춰 늘어선 끈을 보니 내가 구들장 장인이라도 된 것처럼 어깨가 으쓱거려졌다. 이누크가 그제야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침을 줄줄 쏟았다.
벽돌을 더 날랐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방 가장자리가 마뜩잖았다. 뭔가 깔끔하게 마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다시 인터넷에 올라온 구들방 공사 사진을 찾아보니 방 가장자리에는 커다란 받침돌들이 둘러져 있었다.
“이런 젠장!”
벌써 마당에 햇빛이 닿으면서 날이 무더워졌다. 이 산중에서 돌이라고는 시냇가에 널려 있는 기암괴석밖에 없었다. 바위는 나 아니래도 최진이라도, 하물며 역도 선수라 해도 들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외발 수레에 자갈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이나의 현실적인 방법으로.
앞마당에 자갈 더미가 쌓이기 시작하자 벌써 점심때였다. 오전 내내 한 게 없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지? 급한 마음에 덤벼들어 일을 하다보니 배고픈 것도 잊었다. 그러고 보니 이누크가 아까부터 우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누크는 사료를 잘 먹지 않고 꼭 사람먹는 걸 먹으려 한다. 자기가 사람인 줄 아나보다. 그렇다면 좀 돕지 그러니.
마당에서 민들레 잎을 조금 뜯었다. 땡볕에 자라는 민들레는 땅에 낮게 엎드리고 잎이 좁고 질긴 반면, 풀숲과 같이 해가 들었다가도 그늘이 잘 지고 촉촉한 땅에 뿌리를 내린 것은 이파리가 크고 넓적하며 연해 먹을 만하다. 요즈음 너무 가공식품만 먹었더니 입맛을 버린 듯 한식 한 상이 무척 그리웠다.
마당 가장자리의 풀이 우거진 곳에서는 쇠비름 이파리가 통통하게 물이 올라 있었다. 얼른 아버지의 야생초 책을 살펴 확인해보니 과연 먹을 수 있는 식물이었다. 연초록 꽃이 핀 듯한 앙증맞은 모습에 먹으면 아삭아삭할 것 같은 풀의 이름은 돌나물이었다.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돌나물은 마트에서도 파는 걸 본 것 같다.
나물을 씻으면서 보니 짐승이 뜯어먹은 듯한 자국이 보였다. 어떤 짐승일까? 설마 멧돼지가 안마당까지 왔을라구. 그렇다면 사슴? 언젠가 아버지께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래,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이면 거실 창을 통해 원두막 아래에서 쉬는 사슴을 바라볼 수 있노라고.
그 순간 앞마당의 초록 병풍이 새끼바다표범의 새하얀 솜털로 뒤덮인 듯한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제아무리 조심하느라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해도, 흰 눈 위에 길게 남는 발자국이야 어쩔 수 없다. 사슴은 코를 씰룩거리면서 호기심에 아버지의 집 주변을 서성대다가 마른 땅을 찾아 원두막 아래로 기어든다. 아버지는 미리 마른 짚풀을 그곳에 조금 가져다 두셨다. 아침에 보면 짚풀은 꽤 육중한 무게에 눌린 채 양이 줄어 있었고, 기념물처럼 남기고 간 검은 콩 같은 사슴 똥이 군데군데 모여 앉아 있었다.
나는 커다란 양푼에 방금뜯은 신선한 생나물이랑 계란프라이를 넣고 고추장과 참기름, 그리고 밥(나는 압력밥솥 조종하는 법을 익혔다.)을 넣어 슥삭슥삭 비볐다. 숟가락을 쥐고 거실 창틀에 앉아서 원두막 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명상에 잠긴 채 밥을 우물거리고 있는데, 언덕께에 누군가의 머리가 보였다.
“멍멍!”
반가운 듯이 달려나가는 이누크의 엉덩이가 몹시 토실토실했다. 올라온 이는 최진이었다. 최진이는 밝게 웃었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갑자기 가슴이 설레는, 낯선 감정을 느꼈다.
“안녕하세요?”
“이번주는 바쁘시다면서요..”
“아, 바쁘긴 한데 점심시간에 잠깐 도망쳐 나왔지요.”
아니, 뭘 하려고? 설마 나를 만나려고? 최진이는 영락없는 농사꾼 차림이었다. 늘어난 반팔 티셔츠에 길숨한 바지를 걷어올린 모습은 어디 논에서 모라도 심다 온 사람 같았다. 아마 동네 할아버지들과 막걸리에 점심인지 새참인지 먹으며 한바탕 가락을 뽑아내며 쉬는 현장에서 빠져나온 듯했다.
“오, 비빕밥 했어요?”
최진이는 갑자기 신을 벗고 주방에 들어가더니 숟가락 하나 달랑 들고 나왔다. 설마 이 밥을 먹으려고? 예상이 들어맞았다. 최진이는 숟가락을 내 그릇에 박더니 크게 한 숟갈 떠서 자기 입속에 욱여넣었다.
“어머, 제가 먹던 건데요.”
“괜찮아요!”
최진이는 배가 고팠는지 입에 든 걸 꿀꺽 삼키고는 다시 한 숟갈 크게 떴다. 이러다 내 밥 다 먹어버리겠네. 나도 질세라 밥을 급히 퍼먹기 시작했다. 이누크가 자기도 달라는 듯이 간절하게 쳐다보았지만 최진이는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이누크, 이건 너무 매워서 안 돼.”
이누크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자기 밥그릇으로 가더니 마치 사료한테 분풀이라도 하듯이 맹렬한 속도로 사료를 씹어대기 시작했다.
그래도 양심이 있는지 최진은 마지막 한 숟가락을 나한테 양보했다. 평소 같으면 더럽다고 생각했겠지만 배가 너무 고파서 그런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최진이가 호일에 싸서 가져온(새참에서 슬쩍 들고 온) 부침개 두 장을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다.
최진이는 내가 꾸며놓은 공사현장을 둘러보았다.
“오, 뭔가 시작한 것 같은데요.”
“처음이라 뒤죽박죽이에요. 하지만 두고 봐요. 잘할 수 있을 테니까.”
내 마지막 멘트에 최진이가 돌아보면서 웃었다. 이제 보니 그는 한쪽 볼에 보조개가 살짝 팼다.
“시냇가에 가서 자갈을 좀 더 날라와야겠네요. 제가 잠깐 도와드리죠.”
“아니, 괜찮아요.”
“아뇨, 밥 얻어먹은 값을 해야죠.”
그러고 보니 최진이가 내 밥의 반은 더 먹어 버렸다. 겨울에 아버지를 찾아온 사슴에 관한 명상도 방해했고. 어젯밤에는 날 놀렸겠다.
“그럼, 자갈보다 좀 더 큰 돌을 가져오셔도 좋겠네요.”
최진이 얼굴이 헉하는 표정으로 변하더니 깔깔깔 웃기 시작했다. 그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씩씩하게 시냇가로 내려갔다. 그는 한참 만에 수레를 끌고 낑낑대면서 올라왔는데 수레 안에 보니 돌이 얼마 밖에 없었다.
“아휴, 돌이 이렇게 무거울 줄 몰랐어요!”
내 이럴 줄 알았지. 뼈다귀 같이 말라서는 무슨 일을 하겠나 싶었다. 내가 가져온 자갈보다는 훨씬 큰 돌이었지만 여남은 개 뿐이었다. 최진이는 구시렁구시렁 한참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한숨 돌릴 시간을 벌려는 것 같았다. 나는 속아 주는 척하면서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최진이가 내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아참, 시냇가에 뱀 있더라고요. 조심하세요.”
참나, 내가 닷새 동안 살면서 뱀이라곤 그림자도 못 봤는데, 웬 뱀이 있다고. 생각보다 이곳엔 뱀이 적은 것 같았다. 뱀은 남미의 밀림 속에나 사막 같은 데 있는 것 아닌가? 나는 픽 웃음을 흘렸다. 자기도 남자라고 저런 식으로 남성성을 과시하려고 하는군. 뒤에서 계속 떠들어대는 스테레오에 맞추어 나도 구시렁거릴 참이었다.
그때였다. 돌담 사이에서 뭔가가 스르륵 기어나오는 게 얼핏 보인 것은. 얼어붙은 듯 멈춰 서서 그쪽을 바라보니 기다란 그것은 뱀이었다! 몸은 그래, 알록달록하기까지 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바로는, 알록달록한 뱀은 독사다. 내가 숨을 멈춘 사이, 뱀은 막 개구리 한 마리를 잡았다. 발버둥치는 개구리를 서서히 마비시키며 천천히 목구멍으로 넘기는 뱀의 모습은 마치 텔레비전 프로그램 ‘동물의 왕국’의 슬로우 모션 한 장면을 보는 듯 생생했다.
“까악~!”
어이없게도 내 발은 나도 모르게 여성성을 호소하며 부리나케 이 주변에 하나밖에 없는 남자에게로 냅다 뛰어갔다. 이누크는 암컷이었다.
“왜, 왜 그래요?”
“배, 배엠~!”
“뱀? 어디, 어디?”
최진이는 내가 말한 곳으로 가서 뱀을 확인하고는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뱀을 많이 봤다는 게 진짜였는지 그는 그리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기다란 나무 막대를 들고 뱀 곁으로 가만히 다가갔다. 나는 멀찍이 서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뱀은 개구리를 먹느라 열중한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최진이는 바람처럼 재빨리 막대를 휘둘렀다.
나와 이누크는 생전 처음으로 뱀이 하늘을 나는 것을 보았다. 뱀의 맨들맨들한 비늘이 태양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뱀은 그림같이 파란 하늘에 물음표를 그리며 반대편 산기슭 쪽으로 천천히 떨어졌다. 최진이의 자세는 완벽했다. 나이스 샷이었다.
최진이는 자기가 실어 온 돌을 하나씩 날라서 방 가장자리에 죽 둘렀다. 최진이가 두 번쯤 더 돌을 날라왔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최진이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최진입니다.”
수화기에서 웬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말인지까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여자가 틀림없었다.
“아이쿠,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곧 갈게.”
최진이는 그래도 실어온 돌 여남은 개를 방으로 옮겨주고 갔다. 최진이는 내게 고맙다는 말을 들을 새도 없이 허둥지둥 산을 내려갔다. 나는 왠지 바보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하긴 어여쁜 여자가 아닌 늙고 추레한 아버지에게도 이 남자는 자주 찾아왔었지. 아버지에게는 무척 바람직한 일이었지만 나는 왠지 실망감을 느꼈다.
“흥, 최진이의 동정 따위 필요 없어! 나 혼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갑자기 하늘이 청명한 푸른색이 아니라 검은빛이 도는 푸르딩딩한 색으로 변했다. 공기에서 축축한 냄새가 났다. 이누크가 임시로 자기 지붕을 삼은 창고로 쏜살같이 내뺐다. 일이나 해야지 하고 나도 창고로 따라 들어가니 시멘트가 반쯤 굳어 있었다.
“젠장.”
목장갑을 벗어 던져버렸다. 세찬 소나기가 쏴쏴 하며 슬레이트 지붕을 때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