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계곡에 빠져 계시진 않나요?
흔히들 더닝 크루거 효과라고 불리는 인지편향 그래프인데, 미리 말하자면 아래의 그래프는 사실 더닝 크루거 효과의 연구와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이다.
'더닝 크루거 효과란 것 자체를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라고 한다면 오히려 좋다.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실제 더닝 크루거 효과의 연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는 '잘못 알려진 더닝 크루거 효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함에 있기 때문이다.
잘못 알려진 더닝 크루거 효과
간략하게 이야기하자면, 대략적인 개요는 다음과 같다.
1.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수준에 비해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쳐나는 구간을 '우매함의 봉우리'라 부른다.
2. 학습을 거듭하면서 자신이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절망의 계곡'
3. 절망의 계곡을 벗어나 조금씩 더 많은 지식을 쌓으며 나아가는 '깨달음의 비탈길'
4. 그 모든 영역을 넘어선 학습을 통해 안정감을 얻어가는 '지속 가능성의 고원'
누가 번역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기가 막힌 네이밍 센스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껌뻑 넘어가기에 참 좋은 구성을 가지고 있다. 검증된 논문도 아니고, 논문의 실제 내용도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보면 꽤나 들어맞는 부분이 더러 보인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물어보고 싶은 것이다. 혹시, 공부로 지친 지금 당신은 '절망의 계곡'에 빠져있는 것은 아닐까?
학기가 막 시작될 때면, 대부분의 학생들의 눈빛은 초롱초롱하기 그지없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데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체로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보다는 새 학기가 시작되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넘쳐난다. 그것이 비단, 공부 자체에 대한 흥미와 기대만은 절대 아니겠지만, 그때의 파릇파릇함은 언제나 기분을 좋게 한다. 그러나 일정기간이 지나게 되면 금세 지치는 학생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시기쯤에 들려오는 곡소리는 언제나 한 가지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예요.", "저는 말하는 감자입니다.", "저는 안 될 거예요." 그럴 때면 항상 저 그래프를 꺼내든다. 그러고는 그림판을 켜서 아래와 같이 그림을 조작한다. - 어차피 잘못 알려진 그래프인데 조금 조작해도 괜찮겠지... 하는 생각으로.
내가 지금 무언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공부를 잘해나가고 있다면, '절망의 계곡'은 무한히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금 잘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잘 알게 된 그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복합적인 새로운 지식을 습득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나는 또다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조금 이해하였다고 생각한 부분에서 다시 모르는 부분이 등장하게 될 것이고 굴레는 계속 반복된다.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일 수도 있지만, 만약 지금 당신이 '아직 공부해야 할 것이 이렇게나 잔뜩 남았어.'라는 생각이 들고 있다면 앞으로 잘 나아가고 있다는 이정표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영원히 이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라고 한다면, 학업을 멈추기 전까지는 아마 영원히...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제자리에서 챗바퀴만 굴리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분명 변화하는 것이 존재한다. 앞선 챕터에서도 이야기하였듯, 우리는 실수와 실패 속에서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다. 그리고 그 실패에서 얻는 영감의 폭은 이 무한히 반복되는 절망의 계곡에 차곡차곡 쌓여나가고 있다. 처음 가는 길을 개척하는 것은 분명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수 번, 수십 번 반복하며 나아가면 그곳에는 내 발자국으로 이뤄진 길이 만들어져 있을 것이다. 그것도 굳게 다져진 탄탄한 길이. 그렇다면 다음번 시도에는 첫 시도보다 훨씬 수월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실패들이 쌓여 앞으로 나아갈 원동력이 된다는 달콤한 말과 여러 번 반복하여 학습하면 조금씩 나아질 거라는 말은 단순한 사탕발림이 아니다. 에빙하우스의 보유 곡선, 혹은 망각 곡선이라고 잘 알려진 아래의 연구 결과는 인간의 뇌가 어떻게 장기기억을 만들어 나가는지를 보여준다.
어제 하루 온 힘을 다해 필기하고, 공부한 내용이 다음날이 되었을 때 기억에 남은 것이 별로 없었던 적이 늘 있었을 것이다. "분명 교재를 보면서 하면 다 기억이 나는데, 교재를 덮으면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아요." 역시나 늘 듣는 레퍼토리이다. 마찬가지로 지극히 정상이다. 한 번 본 것을 토씨하나 안 틀리고 기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초능력이 아닐까? 내가 아무리 좋아하는 가수라고 하더라도, 새 앨범이 나오면 노래를 따라 부르기 위해 몇 번이고 반복해서 불러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좋아하고, 감명 깊게 들은 3분 남짓한 노래조차도 제대로 암기하기 위해서는 수백 번을 암기하여야 하는데, 그 많은 이론과 용어들을 과연 우리는 얼마나 반복하며 학습하고 있을까? 그 지루한 싸움을 언제까지고 반복하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주입식 교육의 폐해? 과연 그 때문일까?
수업을 진행하는 강사가 "그냥 외우세요."라고만 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 도니 수업방식이다. 그리고 그렇게 외우기만 한다면, 며칠 가지도 못해 기껏 힘들게 암기한 공식은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없다. 그런데,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면 내 머리에서 빠져나가지 않을까? 명확한 이론을 이해하고, 왜 그렇게 동작하는지를 이해한다면 그 공식은 자연스럽게 내 머릿속에 자리하게 될까? 그럴 리가! 그렇게 이해한 이론조차도 시간이 지나면 머릿속에서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거 외워야 하나요?" 역시나 매일 같이 듣게 되는 질문이다. 그럴 때면 매번 어떻게 답변하여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웹 서버가 어떻게 동작하는지 이해시키기 위해 각종 상황과 동작 원리들을 열심히 설명하고 나서 이 질문을 받게 되면 양 어깨의 힘이 축 빠진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외워야' 하는 것일까? 동작 원리 자체를 이해하는 행위는 암기의 영역과는 다른 것일까? 사람마다 '암기하다'의 범주가 다를 것이다. 명확히 어느 시점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암기의 범주에 대한 이해는 포기하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생각하자. 내가 공부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에 집중해 보자.
앞에서 오답 노트를 이야기하였다. 내가 틀린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돌아보자. 학습 내용을 필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 학습한 내용을 다시 한번 복습할 때, 내가 지금 이해하지 못한 용어나 이론들을 키워드별로 나열해 보자. 그것이 어제 배웠던 내용이어도 괜찮다. 앞서 말하였듯, 어제 학습한 것을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하나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복합적인 단어와 용어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중, 한 두 가지가 빠지게 되면 결국 다시 암기의 영역으로 돌아가버린다.
심화 학습, 응용의 영역은 결국 이론의 기본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 이해도 역시 크게 차이가 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지난주에 학습한 내용 정도는 이제 익숙해질 때쯤이 올 지도 모른다. 그때가, 다시 나의 메타인지가 '우매함의 봉우리'에 올라선 시점이 될 것이다. 축하한다. 다음 절망의 계곡으로 빠질 시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