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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분카레 Jan 27. 2024

핏줄

시어머니 댁은 시골이다. 이전에는 농사도 많아서 농번기 때는 빠짐없이 모였고, 지금도 김장 등 굵직한 연중행사가 있을 때마다 가족들이 다 모인다. 그 외 명절, 제사, 생신, 가족여행 등 비교적 함께 하는 시간이 잦다. 어머니 슬하에 3명의 자녀와 6명의 손주를 두었는데 손주들은 어렸을 때부터 자주 만나다보니 사촌들끼리 우애가 깊은 편이다. 가족들 간의 왕래와 잦은 모임들이 결성된 데에는 어머니의 공이 컸다. 옆에서 지켜 본 나로서는 가족의 화목과 안녕이 어머니의 희생과 인내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된다. 어른노릇 쉽지 않다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니었으며 자식들 알게 모르게 평형을 유지하려 무지 애를 쓰시는 것 같았다. 때론 인위적이고 형식적인 방식에 살짝 반감이 들기도 했지만 어른말씀이니 못이긴 척 따랐다. 어느 한 집에 우한이 생기면 어머니는 다른 두 집에 전화를 해서 안부전화 해 주라는 당부를 남기셨다. 나 같으면 모른 척 해주면 더 좋을 것 같은 일에도 어머니는 사람 사는 일이 그게 아니라며 극구 아는 체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여하튼 어머니의 그와 같은 숨은 내조 덕인지 삼남매는 얼굴 붉히는 일 없이 그럭저럭 잘 지내오고 있다. 


사촌지간인 6명의 아이들이 베트남 여행을 다녀왔다. 발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지난 김장때도 가족들이 모였었다. 아이들이 크면서 바빠져 차츰 출석률이 저조해져 이번 김장때는 3명만이 같이했다. 맨 막내가 이번 대학입시를 끝으로 모두 성인대열에 들어서게 된다. 대학합격 발표를 앞둔 막내에게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었더니 알바해서 돈을 버는 일과 해외여행이라 했다. 셋은 머리를 맞대고 가까운 어디가로 여행계획을 잡는 것 같았다. 그저 막연한 계획에 그치고 말거라고 생각했었다. 

 

동생을 위해 언니들이 여행을 계획하는 모습이 기특해서인지 할머니가 즉흥적인 제안을 하셨다. "너희들 다 같이 가면 이 할미가 찬조금을 내 놓으마"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들은 본격적인 계획에 돌입했다. 그 자리에 없는 사촌들에게 연락을 하고 날짜를 잡고 구체적인 장소를 정했다. 전국 네 개의 도시에 제각각 흩어져 있는 여섯 명이 함께 여행을 가는 일을 그리 간단치는 않았다. 그렇게 아이들은 무사히 여행을 다녀왔다. 직장인도 있어 어쩔 수없이 짧은 기간에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며 다녀왔다.  


평생을 핏줄을 강조하며 살아오신 어머니는 손주들의 하나됨에 마냥 흐뭇함을 감추지 못하셨다. 세대는 차이가 나지만 부모인 우리 역시 사촌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확인하니 든든하면서 뿌듯했다. 서로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고 살면서 서로 큰 싸움 없이 사이좋게 지내는 일은 정말 운이 좋은 일이다. 멀리 떨어져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어머니가 기준점이 되어주어 정기적으로 헤쳐모여 기능이 잘 작동되었던 덕분이다. 이후 어머니의 부재가 당도하는 날 우리에게 가족이란 어떻게 남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는 내 가정의 미래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친구들이나 주위 사람들을 보면 이미 양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안 계신 가족들은 더 이상 확대가족들이 명절에 모이는 경우가 드물다. 명절 제사도 없애는 추세이고 가족들이 먼 길을 이동하고, 또 한 집에 모이는 번거로운 일들을 감당하려 하지 않는다. 친지들 중에서도 어느 가정은 자식들을 모두 결혼을 하지만 어느 가정은 비혼과 독신을 선포한다. 너도나도 못사는 시절에는 결혼식과 같은 대사에 십시일반 돈을 모아 살림을 위한 마련을 도왔다면 지금은 그만한 돈은 도움도 안 되는 적은 액수가 되어 버렸다. 또한 품앗이 개념이던 축의금은 이제 손익을 따질 수밖에 없는 개념이 되었다. 


<핵개인의 시대>의 작가인 송길영씨는 오늘날을 일컬어 ‘가家는 있지만 ’族족‘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라고 말했다. 가족의 형태가 다양화 되어가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으며 점점 천륜은 사라지고 연대가 남는 형태로 변해 간다고 말한다. 자녀수가 줄어들다보니 멀리 있는 친척조차도 그 수가 줄어들거니와 인친(인스타그램 친구), 동친(동네친구)이 더욱 협력적이고 연대감을 이어주는데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핏줄로 맺어진 가족을 뛰어 넘어 다양한 결혼 형태가 생기고 있다. 국제결혼에 이어 동성가족, 대안가족 등 협력가족의 형태가 늘고 있다. 다양성이 생태계의 희망이라고 한 작가의 말은 앞으로 변화해가는 우리 사회에 개인이 지녀야만 하는 태도를 당부하는 것 같다. 한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들이 얼마나 다양한가, 그리고 소수자들을 배려하는 문화가 있는가 하는 것이 그 사회의 건강정도를 측정하는 도구라고까지 했다. 


도움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관계라면 거기에 핏줄 운운하는 진부한 말은 끼어들 자리가 없다.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말이 오래전부터 생겨난 걸 보면 사람은 자신의 가까이에서 정을 나무며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 왔던 것이다.  


족族이 무너지는 사회는 오히려 더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가족, 친척 간의 결속을 당위성이라는 이름으로 속박한다고 해서 구속되어지는 시대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핏줄이라는 개념이 오히려 누군가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일들로 행해져 왔는지도 모른다. 피가 섞인 가족에 연연해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맞이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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