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초콜렛과 가짜 초콜렛
"으아아앙!!"
오늘도 언어치료실에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초콜렛을 주려다 말이다.
"초코. 그래, 초코야. 초코."
초콜렛을 내밀었지만 아이는 완강했다.
"으아아앙!!"
내가 입만 떼도 소리를 지르고, 살짝 움직이기만 해도 경기를 했다.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초콜렛을 주려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아이는 ABC 초콜렛을 유난히 좋아한다. 그래서 평소에 초콜렛을 상으로 주곤 했다. 다만 오늘은 이 초콜렛을 미끼로 삼아 새로운 연습을 해보려 한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아이는 인지발달이 느리고 아직 의사소통이 적절히 되지 않는다. 최근 연습한 것은 같은 것끼리 짝짓는 '매칭하기'였고, 이제 '같다'는 개념을 알고 같은 사물끼리 짝을 지을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은 '교환하기' 연습을 시작해보려고 계획한 것이다. 가짜 모형을 선생님에게 주면 진짜 간식으로 교환해 주리라.
초콜렛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아이는 많은 간식 모형 중에서도 초콜렛을 기가 막히게 잘 찾아냈다. 아이는 초콜렛 모형 두 개를 찾아 양 손에 꼭 쥐었다.
자, 이제 초콜렛 모형을 주고 진짜 초콜렛을 받을 차례다. 초콜렛 모형을 든 손바닥을 펼쳐서 '주세요' 손 모양을 만들게 한 후 진짜 초콜렛을 선물처럼 올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게 있었다. 아이에게는 진짜 초콜렛뿐만 아니라 모형 초콜렛도 너무나 소중했던 것이다. 손바닥을 펴서 보여주는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를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소중한 모형 초콜렛을 선생님 앞에 내어 놓으라는 말이 들어먹힐 리 없었다.
어쨌든 이미 아이는 진짜 ABC 초콜렛을 눈으로 본 후였다. 아이는 모형 초콜렛을 양손에 꼭 쥔 채로 진짜 초콜렛을 향해 팔을 뻗기 시작했다.
"그래, 초코지? 초코. 초코 줄게."
아이의 손바닥을 펼쳐보려는 나의 시도는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으아아앙!!!!"
아이는 온 동네가 떠나갈 듯 소리지르며 울어댔다. 양 손에 모형을 꼭 쥐고 있어서 초콜렛을 주더라도 받기에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었다. 나는 아이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은 거였는데, 오히려 소중한 것을 빼앗아가는 나쁜 사람이 된 듯 했다.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걸 주려고 하는 건데...'
나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 계속해서 세상이 끝날 듯 울부짖는 아이를 바라보다 생각했다.
이것이 신과 인간의 관계일까하고.
진짜 초콜렛을 주려는 건데, 가짜 초콜렛을 놓을 수가 없어 진짜를 받지 못하고 목 놓아 울고만 있는 아이의 모습에서 나를 보았다. 진정 좋은 것을 주려는 신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 지금 당장 가진 것을 놓을 수 없어 기를 쓰고 버티는 내 모습 말이다.
언젠가 '번듯해 보이는' 직장에서 일하고 싶어서 맹목적으로 돌진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나의 목표는 강남에 있는 병원 부설 발달센터였다. 당시 나는 고작 경력 8개월차 초짜 언어치료사였지만, 내 정도 학벌이면 강남 센터에서 높은 급여를 받을 자격이 된다고 착각했었다. 면접을 보고선 바로 다음 달부터 출근하라고 하길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니던 센터에 한 달 뒤에 그만두겠다고 통보했다.
모집 요강에서는 경력 3년 이상을 구한다고 해놓고 경력이 1년도 안 되는 나를 왜 선뜻 써주는지, 아직 모르는 것 투성이인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지 약간 고민이 되었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보단 '강남'이라는 타이틀과 고급 아파트 상가 입지가 허영심을 채워 주었고, 병원 부설이라 경력에 비해 높아진 급여가 마음 속 욕심을 건드렸다. 실력은 일하면서 늘리면 되는 거라고 편한 대로 생각해버렸다.
그런데 막상 출근해보니, 석연찮은 점들이 많이 있었다. 병원 원장은 아동발달에 대해 무지한 의사였고, 센터 운영은 컨설팅 업체에서 대행해주고 있었다. 센터의 규모와 인테리어가 아주 번듯하고 좋아 보이긴 했지만, 정작 치료 시설과 운영 방식 등은 초보 치료사가 보기에도 '이건 아닌데' 싶은 게 많았다.
그럼에도, 가만히 있었다. 내가 원한 것은 허영심의 충족과 수익 증대라는 실리였으니까.
결국 얼마 안 가 그 센터는 문을 닫았다. 병원 관계자들과 컨설팅 업체가 서로 고소를 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야망을 좇아간 내가 얻은 건 강남에서 일해본 고작 몇 시간의 경험과 수당 30만원. 그게 다였다.
기존에 잘 다니고 있던 센터는 이미 그만두고 나왔는데, 하루아침에 실직을 하고 낙동강 오리알이 된 신세였다. 헛된 것을 좇다 헛살게 되었다는 자괴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어찌 신은 나의 편이신 건지, 뜬금없이 대학원 교수님께 연락이 왔다. 국책 연구의 석사급 연구원을 구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마침 연구 주제가 내가 석사 논문을 쓴 주제와 동일했다.
나는 학교에 돌아가는 게 죽도록 싫었다.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 연구는 적성에 안 맞는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하루 아침에 실업자가 된 이상, 선택지가 없었다.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의 심정으로 연구팀에 들어갔다.
다행히 연구팀에서의 나날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국책 연구 프로젝트라 끝나는 기한도 정해져 있었다. 길어야 10개월이니, 버틸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일하던 박사님께서 뜻밖의 제안을 주셨다. 강남권에서 발달센터를 하는 지인분께 나를 소개해주시겠다는 거였다. 언어치료사 원장님이 운영하는 안정된 센터였고, 망해버린 그 센터보다 급여도 더 많이 주는 곳이었다. 내가 경력 8개월차에 이직하려 했던 강남의 병원 부설 센터는 치료사에게 턱없이 적은 급여를 지급하는 곳이였단 걸 알게 됐다. 초보라 잘 몰랐을 뿐, 만약 그곳에 근무했다면 시간이 지나 후회했을 게 자명했다. 그렇게 나는 예상치 못했던 전개로 원하던 직장에 다니게 되었다.
예전의 내가 좇았던 강남 센터는 모형 초콜렛과 같았다. 겉모습은 초콜렛과 비슷했지만 먹을 수 없고 맛도 없는 가짜였다. 그렇게 먹을 수도 없는 가짜 초콜렛을 손에 꼭 쥐고서 그것이 최고인 마냥 어떻게든 놓치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연구팀에 들어간 것은 손바닥을 펴고 가짜 초콜렛을 내어놓는 일과 같았다. 그랬다. 그때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은 일이었다.
이제 보니 신은 내게 진짜 초콜렛을 주려고 하셨다. 내가 가짜를 놓지 않으려 해서 애먹으셨을 테다.
하지만 기어코 진짜를 주셨다. 내가 가짜를 내려놓고,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을 하였을 때.
목놓아 울던 아이는 결국 진짜 초콜렛을 받았다. 아이가 실컷 짜증을 내다가 우연히 손바닥을 잠깐 폈을 때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진짜 초콜렛으로 바꿔 주었다.
아이는 초콜렛을 얻자 울지 않았다. 모형 초콜렛이 더 이상 손에 없는데도. 초콜렛을 혼자서 깔 수 없는 아이가 홀로 고전하다 힘이 빠질 무렵 조심스레 다가가 포장을 바스락바스락 까서 입에 넣어주었다.
'아이야, 선생님은 원래부터 이렇게 해주려던 거였단다.'
삶은 때때로 소중한 것들을 가차없이 앗아간다. 오랜 기간 야심차게 준비한 것들이 한 순간에 산산조각 무너진다. 내 것을 지켜내려는 부단한 노력은 허사로 끝난다. 아무리 갖은 애를 써도 높은 벽에 가로막힌 듯, 절대로 열 수 없는 문이 닫혀버린 듯.
과거에는 기어코 난관을 극복해내려고 기를 쓰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다. 고난과 시련은 귀 기울여야 할 경고 메세지일 수도 있다는 것을.
모든 고난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은 아니다. 때로는 가고 싶지만 가지 말아야 할 길일지도 모른다. 인생을 돌아보니 일이 꼬일 때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더는 헛된 것을 좇다가 헛살고 싶지 않다.
지금은 사뭇 다른 태도로 인생을 관망해보곤 한다. 난관을 극복해내기에 앞서, 잠시 가만히 앉아 돌아보려 한다. 혹시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건 아닌지, 혹시 내가 틀린 문을 열려는 건 아닌지.
그리고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려본다.
진짜를 갖기 위해
가짜는, 비록 아깝더라도, 내어놓기로 한다.
서툴고 부족한 어린 아이를 보는 어른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낮추어 바라보면 한 인간을 지켜보는 어떠한 큰 존재의 애정어린 시선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내가 속뜻을 몰라주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는 그 존재의 마음이 내 삶에 작용하는 순간, 그때에 고집을 세우지 않고 기꺼이 선물을 받을 줄 아는 생을 살기로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