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보낼 수가 없어
"투어. 투어."
아이가 나를 보자마자 한 첫 마디였다.
"추워?"
"투어. 투어."
아이는 신발을 채 벗기도 전에 몇 번이고 반복했다.
"춥다고? 서준이 추워요?"
"아이~ 투어!!!"
'추워'라는 말이 아니란 건 알겠는데,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아이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잘 벗겨지지 않는 신발을 벗으며 계속 같은 말을 했다.
"투어. 투어."
아이가 언어치료실에 들어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가운데 책장을 가리켰을 때, 그제야 깨달았다.
"아! 트럭!"
트럭을 말한 거였다. 책장에 있는 큰 덤프트럭 장난감을 갖고 놀고 싶었나보다. 아쉽게도 오늘 계획은 뽑기 장난감으로 언어 훈련을 하는 거였다.
"트럭 하고 싶구나? 그래, 선생님이 이따가 줄게~"
아이가 칭얼대기 전에 잽싸게 뽑기 머신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장난감을 본 것처럼 주의를 끌었다.
"우와~ 서준아, 이것 좀 봐! 이야~"
다행히 아이는 뽑기 장난감에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이며 책상 앞에 바짝 앉았다. 활동을 하면서 작은 미니어처 모형을 캡슐에 담아 넣을 수 있도록 하나씩 주었다. 아이는 모형을 넣은 캡슐을 뽑기 통에 쏙쏙 넣으며 즐거워 했다.
한참 활동을 잘 하다가, 갑자기 아이가 모형을 캡슐에 넣지 않겠다고 버티기 시작했다. 아이는 미니어처 모형 하나를 손에 꼭 쥐고서 이건 절대 넣지 않겠다는 의지를 비쳤다.
다름 아닌 귀여운 고슴도치였다.
나는 장난 반 단호함 반으로 고슴도치를 캡슐에 넣으려 유도했다. 다시 한번 고슴도치를 캡슐에 넣자고 하자, 아이는 출입문이 있는 구석으로 가서 울기 시작했다. 고작 5평 정도의 방 안에서 갈 수 있는 한 최대한 멀리 도망간 것이다.
얼마나 싫은지 알아달라는 듯 나를 보며 목청껏 큰 소리로 울어대는 아이에게 말했다.
"서준아, 고슴도치가 그렇게 좋아?"
아이는 잠시 울음소리를 그치고 구슬 같은 눈물이 가득찬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슴도치가 너무 소중해? 그래서 넣기 싫어?"
아이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네."라고 했다. 고슴도치를 품에 꼭 안고서.
"그랬구나. 서준이는 고슴도치가 너무 소중했구나.
선생님이 몰랐어. 고슴도치 안 뺏을 거야. 이리 와."
아이는 돌아와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고슴도치를 한 손에 쥔 채로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또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도고애!!!”
미니어처 모형 더미 속에서 돌고래가 나온 것이다. 아이는 반짝이는 눈망울로 돌고래를 가지고 놀다가 고슴도치가 없는 반대편 손에 꼭 쥐었다.
"서준아, 고슴도치랑 돌고래 중에 하나는 넣어주자.
뭐 넣을까? 고슴도치? 돌고래?"
아이는 둘 다 넣지 않겠다고 칭얼댔다. 다만 내가 놀이 규칙을 설명해주자 가만히 듣고 있었다. 소중한 것 딱 하나는 갖고 있을 수 있게 허락을 받았지만, 원래는 캡슐에 담아 뽑기 머신에 넣어야 한다는 것을 수긍하는 모양이었다.
"정했어? 고슴도치 넣을까, 돌고래 넣을까?"
겨우 지켜낸 소중한 고슴도치와 그 못지 않게 귀여운 돌고래. 아이는 고슴도치와 돌고래를 몇 번이나 번갈아 보았다.
“고슴도치? 돌고래?”
마침내 아이는 결정을 내렸다. 아이는 캡슐에 고슴도치를 담고서 뽑기 통에 미련없이 쏙 넣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잃고 싶지 않아서 멀리 도망가 울면서 지키던 고슴도치였다.
"고슴도치 넣었어? 고슴도치 소중하잖아. 괜찮아?"
아이는 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도고애 더 죠아."
돌고래가 더 좋아서 고슴도치를 포기했다는 거다.
아이들은 참 단순하다. 무언가에 엄청나게 집착하다가도,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서서 잊곤 한다. 하지만 감히 가볍다고 치부하기에는 그 마음이 상당히 진심이다. 오히려 자신의 감정에 참으로 성실하게 솔직하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남몰래 묘한 감정을 느꼈다. 마침 일년을 만난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상실감에 허우적대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 지독한 실연의 아픔은 대체 언제쯤이면 사라질까, 아니 사라지기는 할까 싶었다.
하필이면 고슴도치는 내가 좋아한 그 사람을 닮았다. 뾰족한 가시는 사람을 다치게 할 수도 있는 무기이지만, 어쩐지 고슴도치는 귀여운 구석이 있다. 그 사람도 간혹 가시를 세울 때가 있었지만, 나는 그것이 워낙에 여린 마음을 지키기 위한 그의 보호장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의 손에서 고슴도치를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그가 생각이 났다.
고슴도치를 잃지 않으려고 품에 꼭 안고서 방구석으로 도망가 서럽게 우는 아이의 모습이 마치 밤마다 컴컴한 방안에서 혼자 배겟닢을 적시며 스러지는 추억을 부둥켜안는 내 모습 같았다. 그래서 더 측은했다. 고슴도치가 그렇게 소중하냐고 물을 때 아이에게 묻고 있었지만 마치 나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그 사람이 그렇게 소중해?’
그런 내게 아이는 한 가지 진리로 위안을 주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하는 만고불변의 진리 말이다.
아이의 고슴도치만큼이나 소중한 누군가를 잃었다고 해도, 돌고래가 나타나면 언제 울었냐는 듯 고슴도치는 말끔히 잊고 돌고래를 보며 다시 웃을 것이다. 나도 언젠간 마음 속의 고슴도치를 떠나보내줄 때가 올 테다. 어쩌면 다음 사람은 뾰족한 가시 하나 없이 해맑고 자유로운 돌고래를 닮았을지 모르겠다.
누군가가 무척 소중하다면 한 사람쯤 가슴에 품고 살아가도 괜찮다. 잊어야 하는 걸 알면서도 도저히 놓을 수가 없어 온몸으로 아파하고 있대도, 그래도 괜찮다. 살다 보면 또 가슴에 품고 싶은 존재가 생길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옛 사랑은 자리를 비켜주기 마련이다. 그때가 오면 멋쩍은 웃음이 피식 나올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금방이어서, 이렇게 쉽게 바뀔 마음이었나 하고.
이별의 슬픔이 언제 사라질까를 생각하면 하루가 긴 고역이다. 하지만 이별의 괴로움도 언젠간 사라진다는 것을 기억하면, 그리움으로 고단한 하루마저 원망으로 흘려보내기엔 아름다운 시간이다. 모두 다 내가 진심으로 사랑한 시간의 흔적들이니까.
지금 슬프다면 슬퍼해도 괜찮다. 그리운 만큼 추억해도 된다. 그저 내 감정에 충실하면 된다. 시간이 더 지나면 일부러 하려고 해도 더이상 처음만큼 아프지 않을 것이다.
사랑도, 슬픔도, 그리움도 다 때가 있다.
돌고래를 제외한 미니어처 모형을 모두 넣은 후, 언어 훈련한 것을 복습하며 동전을 넣고 캡슐을 뽑았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는 뽑기 장난감에서 모든 캡슐을 다 뽑았다. 귀여운 미니어처들이 한가득 책상 위에 쌓였다.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투어!!!"
그랬다. 고슴도치도, 돌고래도,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가장 원했던 건 트럭이었다.
나는 트럭을 꺼내 아이에게 주었다. 아이에게 연습이 끝나고 최애 장난감이 주어지듯, 나의 연애사에서도 수련이 끝나면 가장 멋진 사람이 주어지기를 내심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