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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봄 Jun 30. 2022

장마철의 유치원 교실

바깥놀이가 필요해

장마철이 시작되면,

모든 사람들이 물 먹은 솜처럼 지치지만

그럼에도 에너지가 폭발 것만 같은 곳도 있다.

바로 유치원 교실이다.


비 오는 날 아침,

교실에 들어와 가장 먼저 이 눅눅한 공기를 없애고 싶어 제습 모드를 가동한다.

기회는 오직 한번뿐, 지금 제습해두지 않으면 하루 종일 더 이상의 습기를 없앨 기회는 없다.


아이들이 움직이면 아무리 제습을 틀어도 소용없다.


아이들이 등원하자마자 교실은 정신이 없다.

오는 길에 양말이 젖은 친구,

가방 속 물건을 다 빼고 가방부터 말려야 하는 친구,

오는 길에 어머니께서 해주신 예쁜 머리가 습기에 다 망가져버려 속상한 친구,

심지어 비 오는 날은 지각하는 친구도 많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젖은 지각생이 등장한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마음을 다잡는다.

'비 오는 날은 사고 나기 딱 좋다. 오늘 정신 똑바로 차리자'

하지만 교사도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장마철에는 무언가 평소보다 집중되지 않는다.

그래서 난 더 불안했다.


역시나.

자유놀이 시간이 시작하자마자 아이들은 미처 발산하지 못한 에너지를 뽐낸다.


10시 방향에는 누워서 뒹굴거리는 아이들

12시 방향엔 미술 재료로 파티 중인 아이들

3시 방향에는 블록을 바닥에 밀고 뛰어넘는 놀이를 하는 중 (달리지 못하게 했더니 제자리에서 점프만 한다고 주장하며... 논리 왕 일곱 살,)

7시 방향에서는 멀리까지 날아온 블록에 놀이가 방해된다며 짜증을 내는 친구들

5시 방향에서는 마치 악상이 떠오른 천재 음악가처럼 피아노로 벼락 소리 만드는 중


하...... 정신이 없다

눈앞에 아지랑이가 피는 것 같다

소리가 울리고 또 울려 뇌 속에 메아리가 크게 울려 퍼진다


고민이 된다

'이렇게 정신없다간 일 날 것 같은데, 한번 조용히 시켜야 하나?'

vs

'며칠째 밖에서 뛰어놀지 못하니 얼마나 답답할까. 저렇게라도 에너지를 풀게 둬야 하나'


한참 고민하다.

 '장마철 안전 수업을 하기 위해' 놀이를 중단한다.


"해봄반 친구들, 긴 바늘이 6에 가면 정리할 거예요.

놀이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긴 바늘이 어디에 있니? 6이 되었다! 이제 부지런히 정리 시작하세요"


이 와중에 여름 감성을 포기할 수 없으니,

딱 두 번만 연주하고 정리시간 끝이라며 엄포를 놓은 뒤 히사이시 조의 'summer'를 정리 음악으로 연주해준다.


아이들은 반주 리듬에 따라 통통통통 노래를 부르며 정리한다.

그래 이렇게라도 에너지가 조금은 발산되기를!


그리고 장마철, 비 오는 날 안전교육을 진행하는데

아이들이 평소보다 착석을 너무 힘들어한다.

그래, 나도 눕고 싶은데 7살인 너희는 오죽하겠니...

빠르게 수업을 마무리해버린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외쳐댔다

"바깥놀이 가고 싶어요" (비 와서 놀이터 못 가잖니)

"강당 놀이 가고 싶어요" (오늘은 우리 반이 강당 쓰는 날이 아니란다. 나도 참 안타까워.....)

 

우리 유치원은 학급수가 9 학급임에도 불구하고

강당은 한 반이 쓸 크기 정도로 하나,

놀이터도 한 반이 쓸 크기로 하나뿐이다.

이 말은 매일 어딘가에서 뛰어놀 수 없고, 교실에만 있어야 하는 날도 많고, 날씨가 안 좋으면 꼼짝없이 교실에 갇힌다는 것이다.


그렇게 놀이를 중시하면서

'공간도 없는 곳에 9 학급이나 인가를 내다니! 이런 탁상행정!'이라 생각하며 교육청을 원망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그저 아이들을 좀 더 실내에서 움직이게 도와주는 것뿐.....!

그게 너희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큰 마음먹고, 숨겨두었던 체육 매트를 꺼내 펼친다

아이들에게

"오늘은 이 매트 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른 반 친구들도 써야 해서 하나밖에 못 가져왔는데 여기서 뭘 하면 좋겠니?"


나는 실컷 점프하겠다! 이 정도로만 예상했는데

답은 기상천외했다.


구를래요!!! 저는 옆돌기도 할 수 있어요!!!!!!!

K-태권도장에서 단련된 우리의 일곱 살들은 어마어마한 체육인들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여기서 내가 선생이니, 다치지 않고 하는 법을 알려준답시고 시범을 보여주었지만....

내가 제일 못하는 것은 몸 쓰는 것이다.


아이들 앞에서 처참하게 앞구르기 실패.

다행히 옆돌기까지 가능하다는 친구가 나와 안전하게 구르는 비법을 전수해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구르고 또 굴렀다.

심지어 질서 정연하게 줄을 서서 자기 차례가 되면 구르고, 구른 친구가 매트에서 사라지면 다음 친구가 굴렀다.

아주 안전하게 굴러대고 있었다.


아이들은 장마가 끝날 때까지

매일 구르고 또 굴러댔다.

"안 어지럽니?" "안 힘드니? 너 지금 땀 아주 많이 나고 있어." "너희들 데굴데굴 구르는 바퀴 같아", "이러다 쓰러질 것 같아서 걱정돼"

아무리 말을 걸어도 멈추지 않는 그들의 에너지.....!


그렇게 장마기간 내내 구르기만 했다.

이 귀여운 장꾸 쇠똥구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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