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작품 건드리면 안 참아요
내가 근무하던 유치원은 졸업식 날 아이들이 받는 상장을 친구들과, 담임선생님이 아이의 특색에 맞게 만들어주는 전통이 있다.
처음에는 '한 명씩 다 만들어야 한다니 언제 다하지'막막하기만 했는데 생각해보니
친구의 좋은 점을 찾아주고, 친구들이 찾아준 나의 강점을 알고 기쁨과 자아존중감을 함께 키울 수 있는 기회다 싶었다.
그래서 무려 일주일에 걸쳐 활동을 했다.
1. '칭찬 샤워' 활동을 했다.
-한 명의 친구가 나온다
-이 친구의 좋은 점, 잘하는 점, 함께할 때의 기분을 생각해본다
-샤워할때의 물폭탄처럼 칭찬 폭탄을 날려 준다.
-칭찬 폭탄을 받은 친구는 어떤 칭찬이 가장 마음에 드는지 이야기하고, 부끄러워하며 들어간다.
2. '내 친구의 비밀' 활동지를 채워보았다.
- 친구들의 장점, 잘하는 것, 좋은 점을 이야기 나누고 칠판에 쓴다.
- 각 친구의 자리에는 활동지가 놓여 있고, 각자 친구 자리로 흩어져서 몰래 친구의 좋은 점을 써준다.
(모든 친구에게 다 써주어야 함)
- 친구들이 써준 장점만 보고 주인이 누구인지 함께 맞추어본다.
3. 함께 상장 이름을 정해 본다
'아이링고 전문가 상'
'천사 도우미 상'
'유니콘 피아니스트 상'
'힘이 센 축구왕 상' 등 개성 있는 상장이 탄생했다.
4. 모두 함께 상장 내용을 만들어본다
- 교사의 상장 파일에 함께 입력한다(아이들의 말을 상답게 다듬어내는 교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받는 친구의 마음에 들 때까지 수정해준다.
이렇게 여러 날에 걸친 교육활동 결과물로 상장을 만들었고,
아이들은 상장받을 날 만을 기대했다.
교사가 아무리 우울증이어도 아이들 교육활동만은 프로다.
나는 이 상장을 금박 상장 용지에 그대로 뽑으려다 혹시 몰라 부장님께 여쭈어보았다.
혹시... 아이들 상장 원장님께 검토받나요?
부장님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셨고,
원감님께서 대신 대답하셨다.
"당연하죠 선생님, 우리 유치원의 졸업식에서 나가는 상장인데 원장 원감 검토는 반드시 거쳐야죠."
아... 사실 예상한 상황이라 당황스럽진 않았다.
대신 내 의견을 말씀드렸다.
"적어도 저희 반 상장은 아이들 교육활동 결과물로, 아이들이 글자 하나하나 스스로 선정하고 교사는 도움만 주어서 탄생한 작품입니다. 사전에 보여드릴 수는 있으나 수정 요구 시 응할 수 없습니다. 상장을 주는 주체도 '바다반 선생님과 친구들이'로 되어있고, 유치원장 명칭은 그 어디에도 없으니깐요."
일단 두 분 관리자께 보여는 드리지만 절대 내용 수정하지 않습니다.
이거 수정하시면 아이들 작품을 임의로 고치는 거랑 같거든요.
서식, 오탈자, 상장번호 등 체계 위주로 검토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원감님께 정중히 말씀드리고,
혹시 몰라 구구절절 편지까지 적어 포스트잇에 붙여 서면으로 원장님께 제출했다.
돌아온 피드백 내용은 항상 그랬듯 가관이었다.
'유니콘 피아니스트상'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축구'왕'보다는 '대장'이 나은 것 같다.
천사'도우미'는 가사도우미를 연상시킨다(??)는 등
내 기준 이해할 수 없는 피드백이 가득했다.
이 피드백을 보고 기분이 나쁜 게
내가 가진 병 때문인 건지,
아니면 원장님께 하도 시달려 내 마음이 모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난 이 피드백을 수용할 수 없었다. 수용하기 싫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오탈자를 꼼꼼히 확인하고는
바로 상장 용지에 인쇄해버렸다.
인쇄하는 내 모습을 본 원감님은
"원장님께 최종 검토받으신 거죠?"하고 물으셨고,
난 당당하고 다소 뻔뻔하게
"아니요, 더 이상 검토받고 싶지 않아 인쇄했습니다. 천사'도우미'가 가사도우미를 연상시킨다는 게 일반적인 상식인가요? 백번 양보해 일반적 상식이라 하더라도 가사도우미도 자신의 소중한 노동력을 제공하고 노동의 대가를 받는 엄연한 노동자입니다. 전 이런 직업에 대한 편견은 원장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느껴집니다. 이런 피드백은 조금도 교육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건 아이들의 작품에도 예의가 아닙니다. 아이들의 작품을 존중하는 태도라고는 보이지 않아요."
한마디라도 더 붙였다간 기다렸다는 듯이 쏘아붙일
내 기세를 눈치채셨는지(당연히 난 할 말이 더 있었고, 지금까지 말씀드린건 예고편이었다)
원감님께서도 더 이상의 말씀 없이 돌아가셨고. 교무실에는 적막만 가득했다.
'하.... 오늘도 내가 교무실 분위기 망쳐 놓았구나'
근거 없는 마음의 불편함만 맴돌았다.
결국 우리 반을 제외한 나머지 학급의 상장은 셀 수 없는 수정 과정을 거쳤고(대체 그게 이 바쁜 학기말에 수정해야 할 만큼 중요한 수정사항인지는 모르겠지만) 졸업식과 수료식에 임박해서야 우리는 상장과 졸업장을 완성할 수 있었다.
적어도 내가 근무한 유치원에선 일을 '미리' '부지런히' 한다고 해서 절대 제때 끝나지 않는다.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될 '아이들과의 교육활동과 결과물'까지 이해 안되는 이유로 건드린다.
모든 업무에, 교사로서의 교육활동에 보람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