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그 X은 믿으면 안 돼
익숙한 이름으로부터 전화가 온 것을 봤지만 애써 못 본 척 받지 않았다. 나는 콜 포비아가 있는 사람으로서 받아야만 하는 전화가 아니라면 받지 않는다(친구 남자친구 가족 제외). 특히 전 회사 상사라면 더더욱. 우리는 일자리를 동시에 잃었지만, 그녀는 늘 나를 위하는 척하면서 결국엔 본인의 이득을 챙기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를 은연중에 돌려서 까고, 늘 버릇처럼 거짓말을 하는, 내가 상종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내게 전화를 했다고? 할 말이 있으면 문자를 남기겠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내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긴 문자를 받았다. 나는 그냥 본인 앞에서 멍청한 척 행동하는 건데, 내가 자기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거라고 생각하는 꼴이 늘 웃겼다. 나도 그렇게 만만하고 멍청하진 않아 이뇨나. 그녀는 내게 일자리를 제안했다. 테크니컬 디자이너 포지션이라고 했고, 또 미국 회사라고 했다. 100% 재택이고 캐나다에서는 본인만 일하고 있다고 했다. 회사가 빨리 크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일이 바빠짐에 따라 사람 하나를 더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시 말하면, 내가 그 일자리를 수락하게 된다면 그녀와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고, 그녀를 도와주는 개인비서 정도로 부려먹을게 뻔했다. 아무래도 내가 일을 잘했었고 군말 없이 다 들어주니, 내가 생각났겠거니 싶었다. 그래, 내게 지금 일자리가 급하니, 한 번 이야기나 해보자.
나를 떠올려준 건 고마우니, 고맙다고 했다. '나는 언제나 좋은 좋은 사람들을 돕고 함께 일할 거야'라는 대답을 했던 그녀. 내가 좋은 사람인건 맞지만, 그냥 나는 네게 편한 사람이어서 연락한 거 아니야? 하는 마음으로 아이메시지 하트를 눌러줬다. 나도 참 이런 내가 싫었지만 어쩌겠니?
캐나다 시간으로 목요일(2월 29일) 3시에 (나의 감기 때문에 만나지 않았다! 감기야 고마워!) 영상통화를 하기로 했고,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더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그냥 오랜만에 봐서 좋은 척을 했다. 분명 내게 문자로는 FT, 즉 풀타임(정규직)이라고 했던 그녀가 갑자기 PT(파트타임)로 시작한다고 했다. 수습기간이 있어야 한다고. 역시 믿을 사람은 아니었지만 역시나 믿으면 안 됐구나 싶었다. 3개월 정도 수습기간을 둘 거지만, 자기가 봤을 때는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을 거라고 나에게 또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했다. 내가 자기랑 일할 때 풀타임을 받기 위해 1년 넘게 버텨냈던 건 생각나지 않나 보지? 우리는 집도 가까우니 내가 이 회사에서 일한다고 하면 같이 카페에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희망찬 미래를 그리는 그녀를 보니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이 여자는 대체 나를 뭘로 생각하는 걸까?
내가 다른 회사 면접을 기다린다고 했더니 어느 회사냐고 물었다. 그 회사는 캐나다에서 꽤나 큰 회사이고, 본인도 면접을 봤지만 잘되지 않았기에 '오~ 아동복이라니 흥미롭네'라는 말로 본인의 씁쓸함을 덮는 것 같았다. 그리고 느껴지던 다급함. 나는 그 회사에게서 다음 주 안으로 면접 결과를 통보받기로 되어 있었기에 '언제부터 일을 시작할 수 있냐'라는 그녀의 물음에 2주는 더 있어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랬더니 '2주는 너무 긴데, 1주일 안에 시작해야 해, 우리는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는 회사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 사람이 필요하거든'이라고 말한 그녀. 속이 너무 뻔히 보이는 거 아닌가, 내가 면접 본 그 회사에 붙으면 당연히 거기로 가겠지 파트타임을 제시한, 복지도 없는 네가 다니는 회사에 가겠니?라는 마음을 꾹 눌렀다. 아니나 다를까 '그 회사에서 오퍼가 오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라고 물어본 그녀. 당연히 고민할 거라고 했다. 하, 내가 내 발등을 찍었지, 귀찮은 일만 늘어났네 싶었다.
회사 공동 설립자들이 나와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고, 그러니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보내면 그들이 검토하고 날짜를 잡을 거라고 했다. 그녀가 보낸 이메일에는 당당하게도 'PT(파트타임)'이라고 적어 보냈다. 이 여자 진짜 웃기지도 않네. 내가 봤을 땐 자기 일이 너무 바빠지니 파트타임이라도 뽑자고 건의해서, 나를 기억해낸 건 아닌가 싶다. 너무 괘씸하다. 외국인 신분인 나를 이용해서 복지도 안 되는 미국 스타트업 회사에 나를 다시 끌어드리려고 하는 그 심보가. 면접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그 회사에서 떨어진다고 한들, 나는 이 회사에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다. 그리고 또 이 공동 설립자들이 딱히 급하게 뽑을거 같아 보이지 않는데? 내가 이력서를 보내지 않았는데도 아무 말이 없는거 보면?
잠시나마 나를 생각해 줬던 그녀의 마음이 고마웠고, 진심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모르지만(모든 게 내 추측이 뿐이다 그럼에도) 속내가 너무 보인다.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함께 보내라는 그녀의 제안을 듣지 않고 이력서만 보낼 생각이다. 내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항상 궁금해했던 그녀이기에 그냥 내 정보들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는 생각에 나의 포트폴리오는 보내지 않으려고 한다. 하 내가 너무 급해서 눈앞의 것들을 제대로 분간해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머리가 띵하다.
면접 결과를 기다리면서 이런 일까지 겹치니 감기가 더 심해지고 몸살이 났다. 캐나다 회사에서 나를 선택해 주면 좋겠다. 나에게 그 회사가 오퍼를 줘서 내가 전 회사 상사를 거절할 수 있는 확실한 이유를 주고 싶다. 나를 생각해 줘서 고마웠는데, 누군가의 간절한 마음을 이용하려는 심보가 너무 밉다. 하, 이제 어떻게 거절을 해야 할까. 정말 귀찮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