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고 싶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어린시절 공부는 잘했지만 집이 가난해서 현실과 타협해 살았다는 아버지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거다. 우리 아빠도 그 중 한 사람이었고, 그 말을 뒷받침해주듯, 현재도 아빠는 배움을 멈추지 않는다. 영어, 인도네시아어 그리고 자신이 관심 있는 모든 것은 깊게 파고드는, 우리 삼 남매와는 사뭇 다른 일명 너드(Nerd). 아빠는 법 공부를 하고 싶어했고, 어쩌면 어린 아빠의 마음에는 정의로운 판사/검사가 되어서 나쁜 사람들을 심판하며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삶을 꿈꿔왔을지도 모른다. 돈이 없어서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지 못해 모든 걸 독학했다는 아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우리 집에는 버리지 못한 아빠의 낡아빠진 법 책들과 영어 책들이 한가득하다. 지금은 펼쳐보지도 않고, 버리지도 못하게 하는 책들이지만 아빠에게 어떤 의미일지 문득 궁금해진다.
어릴 때는 아빠가 신기하기만 했다. 왜 저렇게 꿈이 없고 사람이 무미건조하기만 할까 싶었다. 나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우리 아빠는 왜 하고 싶은 게 없고 그냥 살아지는대로 사는 것 같을까? 하는 의구심이 매번 들었다. 생일이 뭐가 대수냐, 기념일이 뭐가 중요하냐 하고 어떨 땐 우리 나이까지 잊어버리고 살던 아빠(아마 지금도 내 나이는 모를 듯, 태어난 년도만 알면 됐지 뭐). 내가 20대 후반이 되고 현실의 쓴 맛을 알아가다 보니 그의 마음이 어땠을지 조금이나마 이해가 된다.
독학으로 공부해 3번이나 낙방한 아빠는 나보다도 더 어린 나이에 현실의 쓴 맛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나에게 지금 아빠처럼, 나의 친할아버지는 경제적으로 아빠를 지원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거니까. 졸린 눈을 비비며 전기를 쓰는 것도 아까워 작은 등불을 켜고 공부했을 아빠는, 그 숱한 밤 얼마나 많이 혼자 울었을까. 나보다도 더 어린 나이의 아빠는 계속되는 낙방에 스스로 얼마나 밉고 싫었을까 생각하면 안쓰러워진다. 얼마나 많은 밤을 혼자 울면서 버텨냈을지, 죄책감 속에서 살아갔을 어린 아빠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나에게 더 슬픈 것은 3번의 낙방 후 아빠는 더 이상 자신의 꿈을 고집할 수가 없었을거다. 다른 것도 아닌 '돈' 때문에. 그래서 그에게는 그 '돈'이 없는 설움이 얼마나 큰지 너무 어린 나이에 깨달았고, 현실과 타협해야하는 자신의 위치가 싫었을거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돈'에 붙잡혀 사는지도.
그는 자신의 꿈을 잠시 미뤄두고 현실에 맞서 돈을 벌어야 했을거고, 시간이 지난 뒤 돌아보니 다시 시도할 수 없었을거다. 혹은 미련이 뚝뚝 남은 그의 꿈을 그냥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떠나야했을거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겠지만, 어쩌면 나의 어린 아빠는 꿈을 꾸는 것보다 현실과 타협해야하는 방법을 먼저 배웠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보다 더 어린 그 시절에 노력으로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 있다는 걸 받아들였어야 했을거고, 그 뒤로 그는 더 이상 꿈꾸지 않는 어른으로 자랐을지도 모른다.
아빠는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잘 해주지 않았다. 아마 스스로도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의 어린 시절을 혐오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7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난 아빠는, 자신을 옭아매고 떼어낼 수 없었을 것 같던 가난을 진심으로 이겨내고 싶었을거다. 하루는 아빠에게 아빠는 꿈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던 나에게 해준 말이 있다. '꿈을 꾸긴 뭘 꿔. 꿈이 있었다면 가난한거에서 벗어나는 게 꿈이었지 뭐. 먹을 게 없어서 나무 껍질을 먹고 풀을 쑤어 먹고.. 그냥 가난이 무진장 싫었어.' 그래서 우리가 행복했으면,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종종 생각해보곤 한다. 꿈을 가지고 있던 그냥 작은 소년이었던 아빠를 만나는 생각.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꿈을 잃지 말라고? 현실과 타협하지 말고 네가 꿈꾸던 걸 이루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소년의 모습을 한 아빠에게 그렇게 얘기해줄 수 없을 것 같다. 그냥 만날 수 있다면 꼭 안아주고 싶다. 꿈 많고 하고 싶었던 것 많았던 40여년 전의 아빠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그 찬란했던 젊음을 기억해주고 싶다. 꿈을 포기하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당신의 젊음을 영원히 기억해줄 토끼같은 자식들이 생길거라고, 그렇게 꼭 한 번 안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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