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단약 다이어리> 약을 먹고 싶은 유혹

#유혹 #항우울제 #항불안제 #요요현상 #하루만 먹을까 #단약

by 산책이

제목 : 약을 먹고 싶은 유혹


정신과 약, 이제는 그만 먹고 싶었다. 언제까지 약에 의존해 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단약을 시작하고 부작용 없이 첫 2주를 버텨낸 나는 기뻤다. 2년 동안 약 없이는 살 수 없었는데, 이렇게 2주나 약 없이 살아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찼다.


‘아, 내가 낫고 있구나.’

‘약 없이도 자생할 수 있구나.’

‘약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겠구나.’


내가 조금씩 치유되고 있다는 걸 온몸으로 느꼈다. 한 알도 끊기 어려웠는데 여러 알을 끊어냈다니, 스스로가 대견했다.

하지만 가끔 약을 다시 먹고 싶다는 유혹이 불쑥불쑥 찾아온다.


‘오늘 하루만 먹고 잘까?’

‘오늘만 약을 먹고 버틸까?’

‘계속 먹는 것도 아닌데 괜찮지 않을까?’


특히 내가 감당하기 벅찬 인간관계를 마주해야 할 때, 나는 약을 꿀꺽 삼키고 싶은 충동이 올라온다.

예를 들어, 연락하고 싶지 않은 가족과 통화해야 할 때가 그렇다.

한때 우울함을 위로받기 위해 찾았던 원가족이 사실은 내게 부채감과 감정의 찌꺼기만 넘겨준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가족과의 연락을 끊었다.


하지만 ‘연’을 완전히 끊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가끔 연락해야 할 일이 생기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차라리 약을 먹을까?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 예민해지는 직장 동료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한때는 함께 으쌰으쌰하며 직장생활을 버텨야 한다는 공동체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 연대감이 와르르 무너졌던 순간이 있었다. 그 기억이 너무 강렬해 아직도 동료애는 회복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직장에 나가야 한다. 나를 먹여 살려야 하니까. 불편하고 껄끄러운 관계 속에서도 상투적이고 어색한 친절의 가면을 쓸 수밖에 없다.

인간관계의 어색함, 낯섦, 예민함, 세심함이 뒤엉켜 나를 지치게 할 때 나는 문득 약을 먹고 감정과 생각을 눌러버리고 싶어진다. 무엇보다 가장 힘든 건 내 감정에 내가 목이 막히는 순간이다.


‘너무 힘들다.’

‘도망가고 싶다.’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일까.’

‘인생은 이렇게 계속 버티기만 해야 하는 건가.’

이런 말들이 자꾸만 입속에서 맴돈다.


내가 나 자신을 건강하게 붙잡지 못할 때, 나는 금세 취약해진다. 그래서 생각한다.

“차라리 약을 먹고, 억지로라도 이 긴장감을 눌러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바로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의 불안 앞에서, 오늘을 짓누르는 인간관계 앞에서 ‘차라리 약 먹고 버티자’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끝나지 않고, 결국 손이 약으로 향할 것 같았다.

단약의 부작용이 확실히 사라졌다는 걸 인지했을 때 나는 결심했다. 남아 있던 약을 버렸다. 눈앞에 보이면 또 먹고 싶어질까 봐 두려웠다.


약도 중독이었다. 약도 의존이었다. 약을 안 먹고도 버틸 힘이 생겼는데도, 힘내고 싶지 않아지는 순간이 찾아왔고, 그 힘으로 오히려 나 자신을 다시 해치게 될까봐 두려워졌다.

약을 먹으며 괜찮게 지내던 날들도 있었다. 울음을 멈추고, 폭식을 줄이고, 밤에 잠들 수 있게 되면서 몸과 마음에 회복할 힘이 생겼다. 그래서 지금도 마음이 힘들어지면 문득 약에 다시 손이 갈 것 같은 유혹이 올라온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2년 만에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자는 생활 리듬을 되찾았다. 나를 힘들게 했던 원가족과는 물리적으로 거리를 잘 두고 있고, 직장에서도 나를 괴롭히던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업무를 조정했다. 이제는 쌩하니 인사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칠 만큼 단단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울컥 올라올 때가 있다. 모든 걸 내려놓고 그냥 도망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여기까지 얼마나 힘들게 왔는데, 단약하기까지 얼마나 버텼는데…’ 하는 생각도 잠깐일 뿐일 때가 있다.

다이어트를 하다 어느 날 폭식으로 무너지는 것처럼, 다이어트에 성공했어도 요요현상으로 다시 살이 찌는 것처럼, 나도 어느 순간 약을 다시 찾고 싶은 마음이 올라온다.


그렇다고 내 의지가 약한 건 아니다. 단약 과정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반응일 뿐이다. 유혹은 있지만 다시 빠져들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다.

슬픔과 화를 눌러 살다 보니, 기쁨과 행복에 대한 감각까지 무뎌졌다는 걸 느낀다. 싫은 감정을 버리겠다고 좋은 감정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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